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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화 (14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44화

베신져 중령이 브레바 중령과 바리타스에게 내건 조건은 단순했다.

막대한 돈, 그리고 자신들과 가족의 안전.

이야기를 듣고 판단한 그와 그의 부하들의 심성은 하나같이 비겁하기 그지없었다.

아비아노의 명운이 달린 방어 병기 차원 결계를 관리하고 있는 주제에 그들은 일신의 안위만을 추구하려 했다.

하지만 그 덕에 굳이 비싼 우주 전함을 경매에서 낙찰할 필요가 없어졌다.

브로커가 연결한 비밀 통신은 아비아노군에게 건너가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변수만 일어나지 않으면 성공할 터.

하나 걱정되는 게 있다면, 베신져 중령과 휘하 군인들이 100% 선금을 요구했다는 점.

“양심 없는 놈들 같으니라고.”

제2우주군 군단장은 브레바 중령의 보고를 듣자마자 테이블을 내려치며 성을 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닙니다. 적국으로 전향하는 건 저들에게 있어 크나큰 리스크를 짊어지는 일입니다. 확실하게 보수를 받고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어야 움직이겠다고 마음먹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요.”

“아예 놈들이 아비아노를 배신하려 했다는 사실을 아비아노의 스파이가 눈치채도록 조용히 흘리겠다고 협박하는 건 어떤가.”

“베신져 중령은 이쪽이 그렇게 나올 것마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지?”

“만일 바리타스 측이 아비아노에게 자신들의 전향 사실을 알릴 경우엔 경매에 지불할 돈보다 저렴한 값으로 결계를 여는 건 꿈도 꾸지 말라더군요.”

“흠….”

베르바 중령의 말대로였다.

협박해 봤자 바리타스 측이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아비아노에게 배신을 알리겠다고 협박해도 공짜로 결계를 열어 주는 일은 절대 없다고 이미 상대가 단언한 이상 협상의 여지는 적어 보였다.

가뜩이나 본국에서 연일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반전시위를 하고 있는 참이다.

신속히 아비아노를 제국의 것으로 만들라는 황제의 지엄한 어명이 선포된 이상 전쟁이 길어질수록 힘이 든 건 비단 아비아노만이 아니었다.

실리를 중시하는 황제 폐하라면 아비아노의 결계를 뚫을 수 없다는 보고가 올라오는 순간 군단장을 보직 해임하고 내정으로 방향을 틀 것이다.

마치 선대 황제가 그랬던 것처럼, 제국 전체에서 끌어모은 돈으로 전쟁을 벌인 다음 돈이 떨어지면 침공을 멈출 게 뻔하다.

그다음은 적당한 은행을 찾아 거액의 융자를 받아 점령지에 ‘빵과 서커스’를 베풀어 민심을 얻고 내정에 집중하기 시작할 터.

바리타스는 여태껏 이와 같은 과정을 밟아 오며 영토를 넓히고 제국을 성장시켜 왔다.

주기적으로 전쟁과 휴전 혹은 정전을 반복하며 야금야금 주위 국가들을 집어 삼켜온 것이다.

이번 아비아노 공략은 전쟁의 주기의 마지막 작전.

이 전쟁이 무승부로 막을 내리게 된다면 이번 주기의 바리타스는 영토를 거의 넓히지 못하고 내정에만 힘을 쏟아야만 한다.

황가에선 국토를 확장하지 못한 황제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지금의 황제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로 돈이 떨어지면 언제든 전쟁을 그만둘 수 있는 위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문의 수치가 된 황제가 어디에도 화풀이를 하지 않고 혼자 모든 걸 끌어안을 리는 없다.

만일 이대로 전쟁이 끝이 난다면 그는 반드시 제2우주군 수뇌부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선택지는 없군.”

군단장은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베신져 중령인가 하는 사내, 군인으로선 실격이지만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잡은 게 틀림없다.

가장 자신의 몸값이 높을 때 상대가 피눈물을 흘리며 값을 지불하도록 만들다니.

“그래서, 놈들이 요구하는 액수는?”

“실은 그게….”

브레바 중령은 제2우주군 군단장에게 다가가 그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미친놈들.”

무려 우주 전함의 예상 낙찰가의 절반에 달하는 금액.

군단장이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큰 액수였다.

“그래도 전함을 낙찰할 필요가 없어지니까 이 정도 출비는 감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사실이다만, 아무리 그래도….”

군단장은 한동안 팔짱을 끼고 고민했다.

“브레다 중령의 말대로입니다. 전함의 반값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면 싸게 먹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으음….”

그의 곁에 있던 수석 참모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어 브레다 중령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알겠네. 그게 좋겠군. 본국에 연락해 예산을 끌어와야겠어.”

“그럼, 경매는 불참하시겠습니까?”

“아니. 그건 곤란해.”

군단장의 말에 수석 참모와 브레다 중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경매에 불참할 거란 사실이 알려지면 아비아노 놈들은 우리가 다른 해법을 찾아냈다고 의심할 거야. 만일 그런 일이 생겼다간….”

“아비아노가 내부의 배신자를 색출하려 하겠군요.”

“바로 그거야.”

군단장의 말을 들은 부하들이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는 자명하다.

“경매에 참석하되, 분명 그곳에 섞여 있을 아비아노의 대리인과 경쟁해 최대한 가격을 끌어올린 다음 놈들이 결과적으로 낙찰받도록 유도해야겠군요.”

군단장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성공한다면 아비아노 측은 막대한 자금을 사용해 전함을 낙찰하게 될 터.

전함을 사는 데에 돈을 쓴다면 그들은 더는 오래 농성을 이어 갈 수 없을 것이다.

상대의 자원을 낭비시킨 다음, 전함을 낙찰하는 데에 드는 돈보다 훨씬 적은 액수로 결계를 해제한다.

그야말로 완벽한 작전.

“전쟁의 승패는 정해졌다. 머지않아 승리의 축배를 들 수 있겠군.”

군단장이 서랍에서 값비싼 시가를 꺼내 수석 참모와 브레바 중령에게 하나씩 건네고 자신도 입에 물었다.

“미리 진급을 축하드립니다, 군단장님. 아니, 바리타스 우주군 원수님.”

끝을 자른 시가에 성냥불을 갖다 댄 채 빙글빙글 돌리는 군단장의 얼굴은 참모의 아부를 즐기며 웃고 있었다.

* * *

다가온 경매 당일, 리베르토티 행성에는 귀빈들의 인파가 들이닥쳤다.

그들의 첫 번째 일정은 평화로운 웰컴 파티. 입식으로 진행되는 간단한 점심 모임에선 칵테일과 핑거 푸드를 즐기며 이리저리 움직이는 VIP들의 모습이 보였다.

이번 경매에 출품되는 건 국민들의 돈으로 사치스럽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다 끝내 모든 것을 잃고 추방된 독재자의 컬렉션이었다.

값비싼 보석과 범차원 세계를 통틀어 단 한 점밖에 존재하지 않는 위대한 예술품, 호화의 끝을 보여 주는 초고급 스포츠카, 독재자의 밑에서 일하던 셰프가 개발한 모든 스페샬리테의 레시피를 기록한 비법 노트, 캡슐 형태로 압축해 항상 소지하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별장, 거대한 요트와 크루즈, 기타 등등.

독재자가 행성의 부를 착취해 누렸던 럭셔리한 모든 것이 오늘 밤 하나씩 범차원 세계의 갑부와 기업, 박물관 등에게 팔려나갈 예정이었다.

그리고, 개중에서도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독재자가 자신을 비판하는 아비아노 정부를 겁주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가 예산 수년 어치를 사용해 군수 업체에게 커스텀 오더를 부탁한 원 오프 결전 병기.

크로노급 우주 전함 머큐리 유니콘호였다.

“세기의 경매를 직접 구경할 수 있게 되다니, 감개무량할 따름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두 국가의 명운이 걸려 있는 매물을 볼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죠.”

호사가들은 벌써부터 옹기종기 파티장 구석에 모여 가장 주목받는 매물에 관해 떠들어 대고 있었다.

과연 아비아노와 리베르토티 중 어느 쪽이 전함을 낙찰하게 될 것인가, 같은 무난한 화제부터 전함의 예상 낙찰 가격까지.

경매를 주최하고 모든 매물을 내놓은 리베르토티 정부도 이번 경매가 두 국가 사이에 벌어진 전쟁의 연장 선상에 있다는 것을 잘 파악하고 있을 터.

벌써부터 장난기 많은 부유층은 전함에 몇 번인가 입찰해 가격을 뛰게 해 판돈의 규모를 억지로라도 더욱 키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몇 번인가 상위 입찰하는 정도로는 아비아노도 바리타스도 낙찰을 포기하지 않을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까닭이다.

값을 부풀릴수록 아비아노와 바리타스 대표가 고통 속에서 자신들의 번호를 들고 상위 입찰을 진행하는 미래가 뚜렷하게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어차피 한쪽이 멈추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는 치킨 레이스.

사람들의 머릿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매장에 음식물을 반입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파티장의 음식 중에 팝콘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낙찰하든 빅 뉴스가 될 건 틀림없군요.”

“개인적으로는 아비아노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결계 해제 능력과 막대한 화력 외엔 쓸모가 없는 오버 파워 우주 전함을 이 타이밍에 그들이 낙찰했다가 유지 보수에 쩔쩔매는 모습이 보고 싶어서요.”

“하하. 정말 악취미군요. 저는 바리타스가 낙찰받는 걸 보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번에 그들이 얼마나 영토를 늘릴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라서.”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기라도 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좋습니다. 하지만 베팅은 어디서….”

“실은 그게 말이죠―”

호사가들 사이에서 조용히 하나의 URL이 공유되고 있었다.

범차원 세계의 모든 것을 베팅 대상으로 삼는 안전한 놀이터, 온라인 카지노.

지금 가장 핫한 화제는 바로 바리타스와 아비아노 중 어느 쪽이 우주 전함을 낙찰할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비아노가 풍전등화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뜻밖에도 바리타스 제국이 아닌 아비아노가 경매의 승자가 될 것이라는 데에 돈을 더욱 많이 걸고 있었다.

여기엔 두 가지 근거가 기여하고 있었다.

아비아노가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긴 해도 빅 테크 기업들의 성지라 불리는 국가다. 장기간의 전쟁으로 상당한 예산을 소모한 바리타스 제국보단 남은 돈이 많을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로 베팅에 사용된 화폐.

아비아노와 바리타스의 화폐로 막대한 베팅 금액이 아비아노를 경매의 승자로 점치고 있었다.

‘인사이더의 베팅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굳이 티를 내지 않았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분명 아비아노와 바리타스 양국의 정보를 쥐고 있는 이들이 각각 자신의 국가에서 크게 베팅을 한 것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그들의 예상은 정확했다.

처음부터 아비아노에게 전함을 낙찰시켜 자금을 낭비하게 할 생각이었던 우주군 관계자들은 사돈과 팔촌까지 찾아가 거액의 돈을 빌려 아비아노의 승리에 베팅한 참이었다.

전향을 결심한 아비아노의 군인들 역시 사전에 베르다 중령을 통해 이러한 정보를 입수한 덕에 영혼까지 끌어모아 아비아노에 베팅을 마친 참이었다.

“아비아노에 걸면 못해도 1.3배는 먹는 건가.”

“너무 압도적이라 반대쪽에 걸 생각조차 들지 않는군요.”

사람들은 멋대로 다양한 예상을 내놓으며 베팅 버튼을 눌렀다.

그날 밤에 어떤 변수가 터질지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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