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7화

“하여튼 김지안 대리는 무모해서 탈입니다. 창조자님과 제가 거절했다면 어찌하실 생각이셨어요.”

잠입 작전 결행 전날에 만난 마키나는 아주 대놓고 내 앞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한숨을 쉬고 있었다.

“당연히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지. 과타노차는 돈이면 뭐든 해 주니까.”

“그럼 저는요?”

“어…. 마키나라면 전쟁을 싫어할 거라고 생각했어.”

“…….”

“왜?”

“너무 대책 없이 감으로만 뭐든 진행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아… 소장님? 듣고 보니 뭐든 기세로 해결하는 느낌도 드는 것 같아.”

“김지안 대리 이야기입니다.”

내 얘기였구나.

차마 반박은 할 수 없었다.

마키나가 말한 대로 뭐든 감에 의지하며 대충 어떻게든 되겠지, 같은 뻔뻔하고 안이한 태도로 일을 진행해 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뭐, 여태까진 전부 순조롭게 풀리긴 했다.

다만, 딱히 그걸 내 실력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내 실적의 절반, 아니 70% 이상은 운이 좋았기에 달성할 수 있던 것들이다.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처리했던 안건은 물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면서 겪은 세계수 담보 대출이라든지 다른 안건들은 내가 혼자 힘으로 처리한 것이 아니다.

다른 행원과 힘을 합치고 외부의 도움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불가능해 보이는 안건을 차례대로 해결할 수 있던 건 신의 가호 같은 게 내게 깃들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애초에 내가 차원신용금고에 채용된 것도 제출한 적 없는 이력서가 서류 전형을 통과해서 면접까지 받게 된 결과가 아닌가.

…어라. 생각해 보니 정말로 뭔가 있긴 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신의 축복 같은 거 받아 버린 거 아니냐고.

“어쨌든, 여태껏 잘 풀렸다고 해서 앞으로도 잘될 거란 보장은 없습니다. 아무리 시뮬레이션을 돌려 봐도 반드시 실패하는 패턴이 섞여 있어요.”

“그래. 나도 알고 있어. 최대한 신중을 기하는 수밖에 없겠지. 그나마 다행인 건 이런저런 디테일을 만지는 건 문외한인 내가 아니라 비슈티 과장님이나 다른 전문가들이라는 거야. 물론 너랑 과타노차도 거기 포함되어 있고.”

“하아… 그래요. 인맥도 실력에 포함된다고 사람들은 말하지 않습니까. 오랫동안 그런 말이 범차원 세계에 남아 있다는 건 오랫동안 검증을 거치고 시간의 시련을 버텨 냈다는 말일 테니까요. 절대 틀린 소리가 아니겠죠.”

뭐지, 안 본 사이 좀 더 감정표현이 풍부해진 것 같다. 은근슬쩍 띠꺼워진 거 같기도 한데, 과타노차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걸까? 아니면 단순히 인터넷에 연결된 시간이 많아서 영향을 받은 걸까.

어느 쪽이든 여전히 세 살짜리 어린아이가 할 법한 소리는 아닌데 마키나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어려운 말을 늘어놓고 있어 보는 나에게 상당한 위화감을 안겨 주었다.

물론 그런 모습마저 얼마 전까지 제대로 된 감정표현조차 하지 못하던 인공 지능의 성장이라고 생각하면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움직인 건 이해합니다만, 다음부턴 조금 더 신중한 접근법을 사용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알겠으니까 잔소리 그만해. 형도 참 힘들다.”

“형은 무슨….”

내 딴엔 농담이라고 건넨 말이었지만 마키나의 인간성은 아직 농담에 적절한 답을 내놓을 정도로 발전하진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든, 내일 작전에 차질은 없을 겁니다. 비슈티 과장과 요하네, 그리고 이로울 대리와 경비원의 잠입과 탈출 모두, 저와 창조자님이 확실히 서포트할 예정이니까요.”

“그렇게 말해 주니까 든든하네.”

나 역시 아이작네 호텔에 마련된 회의실에서 조금 전까지 필요한 모든 준비를 마치고 마키나를 만나러 온 참이다.

만에 하나 내일 있을 잠입 작전이 실패하게 된다면 차원신용금고와 아비아노 공화국은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바리타스는 공개적으로 우릴 비판할 것이고, 아비아노 역시 다른 국가가 매물로 내놓은 자산을 훼손하려 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겠지.

그러니까,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자연스럽게 진행되어야만 한다.

리베르토티가 보유한 우주 전함은 치명적인 결함이 발생한 결과 판매할 수 없는 상태, 혹은 본격적인 수리가 필요한 상태에 처해야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개입이 수면 위로 드러나선 안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리베르토티를 찾아온 수리팀이 우주 전함을 제작한 군수 업체의 직원이 아니라는 사실은 빠르게 들통날 것이다.

이 사실까지 감추는 방법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모든 은폐 공작은 어디까지나 잠입자의 정체를 감추는 데에 집중되어야만 한다.

누가 범인인지 알 수 없다면 리베르토티도 바리타스도 우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을 테니까.

물론 이번 작전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결과는 따로 있긴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목표의 초과 달성 같은 거니까 부담감을 갖지 말아야겠다.

상황이 잘 풀리지 않을 경우를 대비한 비상대책도 일단은 하나 숨겨 두고 있긴 하니까, 최악의 상황이 닥치더라도 어떻게든 되겠지.

“조언 고마워. 말해 준 대로 최대한 신중하게 움직여 볼게.”

“모쪼록 이번 안건도 무사히 해결되길 바랍니다.”

“그러면 정말 좋을 텐데 말이야. 의외의 상황 같은 게 생기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 슬슬 늦었으니 돌아가야지. 마지막으로, 어제 말해 둔 걸 부탁해도 될까?”

“얼마든지요.”

나는 자그마한 USB를 마키나에게 건넸고 녀석은 측두부의 머리카락을 쓸어올린 다음 USB를 꽂았다.

-위잉

노출된 단자에 삽입된 USB. 마키나는 3초도 지나지 않아 그것을 빼낸 다음 다시 내게 돌려주었다.

“완료되었습니다.”

“좋아. 이제 진짜 푹 쉴 수 있겠다.”

“거짓말.”

“응. 사실 한숨도 못 잘 것 같아.”

내 직장과 한 행성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마음 놓고 코 골며 잘 수 있다면 틀림없이 평범한 신경의 소유자가 아닐 터. 최소한 나는 평범한 인간인지라 그럴 수가 없다.

“이상한 은행에서 일하게 되어 서로 고생이 많군요.”

“그러게 말이다.”

그렇게, 전산망을 운용하는 인공 지능 솔루션과 평범한 출장소 대리는 인사를 나누고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머지않아 수면 아래에서 벌어질 치열한 싸움을 대비하기 위해서.

* * *

다음 날 새벽.

주말 휴무로 인해 ATM 코너 외의 출입이 금지된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출장소 건물 정문 셔터가 닫혀 있었지만 그 안에선 여러 인원들이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소형 차원 관문 사용 기록 삭제할 준비해 둬. 나중에 얘기 나오지 않도록.”

“전산이랑 연동 끊어 두었습니다. CCTV도 사전에 녹화한 화면만 계속 출력되고 있고요.”

“항공기 티켓도 전부 수배 완료해 두었습니다. 위조 여권으로 비자도 받아두었고요.”

“이미 테스트 마쳐 둔 여권이라 평범한 설비로는 적발조차 불가능합니다.”

평소 다른 차원의 고객을 맞이하는 입구로 사용되는 차원 관문은 작전 지역으로 잠입하기 위한 출입구가 될 예정이었다.

손목시계로 이동할 차원의 좌표를 입력한 넷, 그러니까 비슈티 과장, 경비원 영감님, 요하네, 그리고 이로울은 차분한 표정으로 군수업체의 로고가 박음질된 모자를 쓰고 있었다.

복장만 보면 우수해 보이는 엔지니어 그 자체. 안경까지 쓰고 있으니 꽤나 인텔리 느낌이 난다.

“조금 덥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모자 위에 위장용 스티커를 붙여 로고를 가린 이로울은 수리공 느낌이 물씬 나는 점프슈트 위에 한 겹 더 바지와 웃옷을 겹쳐 입었다.

다른 셋도 똑같은 방식으로 안에 입고 있는 옷을 가려 이중 변장을 완성하던 참이었다.

이들은 이제부터 군수업체의 본사가 위치한 82차원으로 이동한 다음 곧바로 그곳의 공항에서 예약한 항공기 좌석에 탑승해 리베르토티로 건너갈 예정이었다.

본래라면 차원신용금고가 이런 방식으로 차원 관문을 통과해 도착한 지역에서 차원 항공기 등에 탑승해 또 다른 차원으로 건너가는 건 범차원 특별법으로도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법을 어길 수밖에 없는 상황.

잠입팀이 도착하게 될 출입구 주위엔 카모플라주를 위해 사전에 파견된 행장의 심복 행원들이 사전에 준비를 마쳐두었다.

82차원의 출구로 나오자마자 대형 SUV가 엔지니어로 변장한 넷을 태우고 최고 속도로 공항으로 이동할 예정이다.

“그럼, 무운을 비는 거로.”

어느덧 출발 시간이 되었다.

내가 인사를 건넸지만 받아 준 건 이로울과 요하네뿐.

네 명의 잠입 팀은 행원들과 아비아노 관계자의 배웅을 받으며 유유히 차원 관문 너머로 사라졌다.

“잘 풀리겠지…?”

일이 안 풀리거나 예상외의 장애물과 마주치더라도 저들이 들고 간 가방 안에 든 내 최후의 안배가 어떻게든 최악의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막아 줄 터.

작전 준비가 늦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굳이 의식하진 않았지만 바리타스 제국 놈들 역시 암약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이제부턴 서로 얼마나 많이 준비해 왔고 돌발사태에 제대로 대응해 왔는지가 승패를 가리게 될 것이다.

“전면전 같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그나마 다행인 건, 이쪽에 머리싸움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는 아군이 다수 포집해 있다는 사실일까.

* * *

잠입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공항에서 옷을 갈아입은 잠입팀은 군수 업체의 수리 전문 엔지니어의 신분으로 항공기에 탑승, 리베르토티로 무사히 입국했다.

공항에서 대기하던 리베르토티 정부 공무원들은 잠입팀의 넷을 픽업해 우주 전함이 보관된 비밀 격납고로 안내했다.

물론 그 위치를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어렵게 모신 엔지니어들에게 눈가리개와 귀마개를 씌운 탓에 잠입팀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려웠지만.

허나, 고작 그 정도 허술한 보안 조치로 위치를 드러내지 않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항공기가 리베르토티에 도착하자마자 이로울이 가방에서 꺼낸 콜로서스는 사전에 마키나가 짜 둔 알고리즘을 따라 공항 상공을 부유하며 잠입팀이 탑승한 차량을 추적, 기어코 리베르토티의 매물인 우주 전함이 보관된 비밀 격납고를 찾아냈으니까.

<과타노차다. 추적은 원활히 진행 중. 필요하면 콜로서스로 개입하는 것도 검토해 보는 게 좋겠군.>

“고마워. 참고할게. 그래도 일단은 과장님과 이로울이 어떻게든 해 줄 거라 믿어 보자고.”

차량은 무려 5시간 동안이나 시속 200km를 유지하고 이동, 황량한 사막에 도착했다.

정지한 차량의 앞에서 모래 언덕이 기울어지며 경사진 지하 진입로로 모습을 바꿨다.

“저런 곳에 숨겨두었으니 아비아노 측도 발견하기 어려웠겠네.”

“위치가 드러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까지 경매를 미루다니.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

꼭꼭 숨겨진 비밀 격납고로 진입한 차량.

그 뒤를 따라 콜로서스가 소리 없이 비행해 안으로 숨어드는 데 성공했다.

리베르토티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의 소중한 매물은 이제부터 박살이 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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