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5화
생명체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황폐한 세계, 98차원.
사시사철 오염된 마력이 바람을 타고 지상을 휩쓰는 이곳은 언데드 외의 다른 생명체가 거주할 수 없는 범차원 세계의 금역禁域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보호구 없이는 무슨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1시간 이상 생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게다가 강력한 마력장이 대기권을 덮고 있는 탓에 대부분의 통신 장비가 의미를 잃는다.
한 세기에 두어 명가량,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만용에 몸을 맡기는 이들이 98차원에 숨겨져 있다는 비보를 찾아 옆 차원에서 건너오는 일이 있긴 했지만, 매번 그런 용자들의 소식은 끊어지기 마련이었다.
이제는 망자들조차 이생의 즐거움을 찾아 떠난 탓에 생명체는커녕 영혼의 빛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된 버려진 땅.
죽음도 죽일 상대를 찾지 못해 무료해진 결과 거리를 두게 된 이곳에는 생명의 흔적조차 풍화되어 무無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디까지나, 지표면 위에 국한된 이야기였지만.
* * *
동 차원, 눈 덮인 설산의 산봉우리에 설치된 출입구를 기준으로 1km 아래에 위치한 누군가의 거처.
구석에 마련된 안전장치 따위 존재하지 않는 간이 차원 관문이 일렁이더니 구부정한 그림자를 토해냈다.
-우우웅!!!
모습을 드러낸 건 구형 휴대 전화기를 든 어인魚人의 해골.
얼마 전까지 범차원 세계 곳곳을 누비며 무기를 팔아치우던 무기 암거래상은 해골이 되어 그가 배신한 단골 고객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어어, 수고 많았어. 가가멜.”
“어어억, 으어, 끄어억….”
자신의 신체를 자유롭게 변신시킬 수 있는 특수한 힘을 지닌 암살자, 요하네는 가장 선호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채로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었다.
외부 세계와 완벽하게 단절된 이곳은 그의 아지트.
유전자 단위로 자신의 몸을 뒤바꾸는 능력을 사용하면 추적 따위는 간단히 따돌릴 수 있지만, 그는 비수기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을 선호했다.
물론 이곳이 아닌 리조트에 구매해 둔 별장에서 쉬는 선택지 역시 존재했지만 이번만큼은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얼마 전, 그는 자신을 배신한 오랜 친구이자 비즈니스 파트너인 가가멜을 추적해 살해했다.
그리고 나서 뒷세계의 네크로맨서를 찾아가 가가멜을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언데드로 되살렸다.
요하네의 명령을 거스를 수 없게 된 가가멜은 자신이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 낱낱이 실토했다.
물론, 자유 의지의 9할이 사라진 까닭에 말이 어눌해져 차분히 겪은 일을 정리해 알려 주진 못했고 필담에 의지해야만 했지만.
“하여튼, 그 빌어먹을 사채업자만 아니었으면 너도 멀쩡히 살아 있었을 텐데 말이야.”
요하네는 짐짓 친구에게 벌어진 일이 슬프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가가멜이 건넨 휴대 전화를 받아 들었다.
가가멜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요하네 자신이다.
물론, 이는 가가멜이 배신한 대가를 치르게 한 것이고 가가멜 역시 과거 절대 요하네의 뒤통수를 치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이나 약속을 했으니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뒷세계에도 규칙이 존재한다. 피로 맺은 신의와 약속을 어길 경우 어떠한 대가도 감내해야 한다는 규칙이.
가가멜은 그 규칙을 모욕했다.
그리고 그늘진 세상을 살아가는 요하네는 가가멜의 목을 베어 그 대가를 받아 가야만 했다.
법 밖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존중하는 유일한 룰.
이를 친구인 자신이 집행하지 않는다면 가가멜은 더욱 끔찍한 죽음을 맞이했을 테니까.
최소한,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두려움 역시도.
가가멜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치채기도 전에 목이 베였고 다시 해골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그러니까, 요하네는 가가멜에게 죄책감 같은 걸 하나도 품고 있지 않았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난 원인은 가가멜을 사주해 자신을 배신하게 만든 정체불명의 사채업자.
놈에 관해 알아낸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심지어 대부분은 도시 전설을 방불케 하는 기이한 소문뿐.
솔직히 말해서 믿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영혼을 담보로 잡고 돈을 빌려준다든지, 끔찍할 정도로 강하고 집요해서 돈을 빌린 자가 도망치도록 두지 않는다든지, 인간의 몸으로 수백 년의 시간 동안 늙는 일 없이 살아왔다든지, 마도 공학과는 다른 기이한 능력을 다룬다든지, 그런 이야기.
“…대체 뭐 하는 놈이길래.”
그 사채업자라는 자가 어째서 가가멜에게 비살상 무기가 아닌 살상 무기를 팔도록 시킨 건진 알 수 없었다.
놈의 계약도, 돈을 빌린 당사자 모두 너무나도 오래되고 비밀스러워 제대로 된 기록을 찾을 수 없던 까닭이다.
돈을 빌려준 상대의 후손에게서 원금과 산정된 이자를 회수하는 기이한 수단을 보면 그가 오래 산다는 이야기만큼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했다.
“뭐, 믿기 힘들긴 한데… 다른 사람이 보면 나도 비슷한 놈인 거려나.”
요하네는 자신이 뒷세계에서조차 도시 전설로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쓰게 웃었다.
최소한 자신이 정체불명의 사채업자에 관한 소문들을 보고 ‘비현실적이다’ 같은 소리를 할 입장은 아니라는 것을 자각한 까닭이었다.
“악마와 계약하기라도 한 걸까. 특이한 녀석이네.”
금융업에 종사하는 주제에 기적에 가까운 힘을 다루는 자들이라면 짐작 가는 구석이 있었다.
예를 들어, 저승과 부를 주관하는 오커스 디스파테르 여신이 행장을 맡고 있는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원들이라든지.
“…사채업자라. 최소한 배후에 신이 있는 건 아니겠지.”
요하네가 일시적으로 아지트에 숨은 건 가가멜을 통해 정보가 누설된 걸 알게 된 사채업자가 이쪽을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요하네는 충분히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암살자로서 쌓아 온 커리어에 뿌리를 둔 것.
상대의 전력을 파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정면충돌할 각오로 밖을 쏘다니는 건 암살자로서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도, 언젠간 꼭 죽여 버려야지.”
살면서 누군가의 눈치를 본 경험이라곤 전무했던 요하네였기에, 지금 이 상황은 그에게 있어 일종의 거대한 굴욕처럼 느껴졌다.
사채업자고 나발이고, 반드시 목을 잘라 내리라고.
범차원 세계 최고의 암살자는 결심했다.
“이런 답답한 곳에 갇혀 있게 만든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어.”
접수한 의뢰가 아닌 이상, 뒷세계의 규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 이상, 다른 누군가의 목숨을 해하는 건 요하네가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자신의 유일한 친구 가가멜에게 배신을 강요한 자인 이상, 요하네는 자기 자신의 분노와 증오를 고용주 삼아 칼을 휘두를 생각이었다.
“뭐, 일단은 천천히 쉬면서 그 자식 조질 방법이나 생각해 봐야겠네.”
통신조차 차원문을 통해 다른 ‘전파가 통하는 차원’으로 가가멜의 해골을 보내 문자 메시지를 송수신하는 방식 외엔 허락되지 않아 답답하기 그지없는 이곳에 갇혀 있다 보니 정신이 나갈 것 같았지만 당분간은 얌전히 지내는 수밖에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 지금은 비수기다.
어지간히 재밌는 업무가 아니라면 편안하게 뒹굴대며 게임과 독서로 시간을 때우는 게 낫다.
요하네는 그렇게 자신을 위로하며 천천히 가가멜이 가져온 휴대 전화를 확인했다.
“음?”
있었다. 딱 하나.
답답한 아지트에 갇혀 무료함에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자신을 구원해 줄 흥미롭고 달콤한 보상이 약속된 의뢰가.
* * *
엘라마는 내가 유능한 해커들을 어디서 알게 된 건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고, 대신 간단한 테스트를 요구했다.
과연, 효율성의 마인이라고까지 불리는 대머리. 그 손속에는 거침이 없었다.
“유능함만 증명되면 얼마든지 돈은 지불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아마 내일 저녁까진 끝나 있을 겁니다.”
과타노차와 마키나는 하루도 지나지 않아 엘라마가 요구한 대로 바리타스 제국의회의 유명 정치가의 치부를 해킹해 범차원 세계 전역에 뿌렸다.
뉴스 채널은 연일 정치가의 불륜, 비리, 위법 사업체의 실소유 등에 관한 증거를 보도하며 반전 여론에 더욱 불을 붙였다.
부패한 제국 바리타스와 범차원 세계의 경찰 아비아노의 대결이라는 프레임이 씌우진 이상 타 차원에 존재하는 국가의 시민들은 대부분 아비아노를 지지하게 되었다.
바리타스는 오랜 침략전쟁으로 획득한 광대한 땅덩이를 지니고 있었지만 외교 관계는 최악.
당연히 그들의 편을 드는 우방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기에 제국은 외로운 싸움을 강요당하기 시작했다.
“충분히 쓸 만하군. 원하는 보수를 듣지.”
엘라마의 물음에 음성 통화 중이던 과타노차가 위조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번 일로 차원신용금고가 얻게 되는 수익의 1푼.>
1%로 충분하다는 말에 엘라마가 어이가 없다는 듯 껄껄대며 웃었다.
전권이 위임된 이상 합법과 불법을 가리지 않고 어떤 짓이든 벌일 수 있게 된 그다.
침입 작전을 도울 해커에게 지불할 금액 역시 엘라마의 재량 안에서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건 조금 욕심이 과한 것 같다만.”
<…….>
과타노차는 물러서지 않았고, 엘라마는 계속해서 압박을 가했다.
그 광경을 마냥 지켜볼 만큼 여유롭지 않았던 나는 제자리로 돌아가 마저 해야 할 일을 했다.
아마 둘이 극적인 타협에 달하기까진 최소한 이틀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은행 업무랑 위법 행위를 병행하는 삶이라니. 이게 진짜 맞나 모르겠어.”
“…까라면 까야 한다 할 땐 언제고, 벌써부터 약한 소리를 하는 건 너답지 않군.”
옆자리에 있던 아이작이 언제 가져온 건지 에너지 드링크 캔을 하나 건네주었다.
방금 전까지 냉장고에 들어 있던 듯 차가워서 잠이 확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소규모 침투 작전…. 이런 걸 우리가 주도하게 될 줄이야.”
“디테일을 구상하는 건 아비아노군의 유능한 장교와 비슈티 과장이다. 어련히 잘하겠지.”
“뭐, 과타노차랑 과타노차 친구도 돕는다니까. 실력 하나는 확실하니 딱히 걱정은 되지 않아.”
마키나의 존재를 노출할 수 없었기에 과타노차의 친구라고 일단은 둘러댔다.
걱정이 되지 않는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총 든 군인이 우글대며 경계를 서는 우주 전함 격납고로 업체 관계자인 척 잠입해 파괴 공작을 진행한다.
말로 하면 쉬워 보이지만 언제 누가 다치거나 죽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초안을 작성해 제안한 건 나기에, 내 손으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어젯밤엔 투입된 인원이 모조리 죽는 꿈까지 꾸었다. 죄책감에 한동안 토한 다음에야 잠에 들 수 있었다.
“…너는 해야 할 일을 했다. 나머진 전문가들에게 맡기면 돼.”
-끄덕
딱히 위로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쪽엔 든든한 베테랑이 붙어 있지 않나.
비슈티 과장님이 어떻게든 해 줄 거다.
하얀 사신이라고 불리던 사람이 아닌가.
게다가, 이쪽에는 비밀병기가 있다.
우주 전함이 제아무리 커도 말 그대로 일도양단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전쟁 병기가.
“여보세요? 어. 나야, 이로울. 잠시 시간 괜찮아? 안부 물을 겸 몇 가지 얘기할 게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