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34화
아비아노를 바리타스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지켜 내기 위해 달성해야 하는 주된 전략적 목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 리베르토티에 융자해 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그들이 경매 날짜를 미루도록 해 시간을 버는 것.
둘째. 벌어들인 시간을 이용해 리베르토티에 잠입해 그들이 매물로 내놓으려 하는 전함을 파괴, 혹은 차원 결계를 무효화시키는 장비를 부수는 것.
셋째. 전함 낙찰보다 더욱 가성비가 좋은 거짓된 방법, 예를 들어 결계를 관리하는 자와 내통해 강제로 아비아노 본성으로 진입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고 꼬드겨 가용한 자원을 낭비시키는 것.
이 세 가지를 모두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준비는 드래곤 팰리스 아일랜드를 방문해 클렛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얼추 해결되려 하는 중이었다.
가장 필요한 건 두 가지였다.
하나는 충분한 자금을 갖추는 것.
그리고 나머지 하나가 바리타스를 두려워하는 일 없이 아비아노를 위해 경매에 뛰어들어 가격을 끌어 올려줄 대리인의 존재.
클렛은 반년 수익률 20%라는 말도 안 되는 수익을 낼 수 있다는 라즈마의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4조 굴덴을 쾌척해 주었다.
물론 이득을 보기 위함이지만 흔쾌히 리스크를 감수한 건 플루토 디스파테르가 내리는 신언神言의 축복을 얻기 위해 그가 내놓은 대가였다.
그게 대체 얼마나 가치가 있길래 4조 굴덴이 휴짓조각이 되는 리스크를 짊어지나 궁금했지만 도저히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신의 축복, 확실히 지구의 신화에서도 억만금을 들여도 얻을 수 없고 어디까지나 신이 자신에게 호의를 표시해야만 받을 수 있는 것이긴 하다.
아마 신들이 실존하는 이쪽 세상에선 정말 대단한 무언가로 취급되고 있겠지.
그게 4조 굴덴을 들여야만 얻을 수 있을 정도려나. 4조 굴덴은 진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액수인데.
뭐, 어쩌면 4조 굴덴이 날아가지 않고 5조가 되어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있는 건지도 모른다.
경박하지만 사리 분별은 가능한 사내.
아마도 고민하던 5초 동안 모든 계산이 끝났을 것이다.
근거와 직감 모두를 의지해 눈앞의 장애물을 파괴하고 위기를 헤쳐나가는 유형의 사람.
이 경우는 직감이 웅변했을 것이다.
이 자들에게 돈을 맡기면 반드시 수익을 얻을 거라고.
25%의 수익은 누군가에겐 크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쪽 세상에도 가상화폐든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수익을 많이 낼 수 있는 투자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룻밤 만에 두 배의 수익을 얻는 일도, 열 배의 이득을 내는 것도 가능하다.
운이 좋거나, 올바른 정보를 빠르게 입수할 수 있거나, 자신이 판을 짜는 사람이라면.
하지만, 모든 것엔 한계가 있는 법.
자금이 백만 원이고 개잡주에 투자해 세 배를 불리고 엑싯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다.
그런데 자금이 그 열 배라면, 백 배라면, 천 배라면 어떨까.
1억을 고작 하루 만에 세 배로 불리는 건? 10억을 몇 배로 불리는 건?
절대 쉽지 않다.
주식이든 뭐든 그만한 숫자를 사고팔려면 시장을 지탱하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
액수가 커질수록 자금을 빼내는 건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진다.
그렇다면 4조 굴덴의 25%, 1조 굴덴의 수익을 얻는 건 과연 얼마나 어려울까.
장담하건대 누가 해도 쉽지 않다.
행장님이 공중제비를 돌든, 국가 원수가 세계순방을 하든, 1조 굴덴은 절대 공짜로 생기지 않는다.
그런데 고작 반년 내로 4조 굴덴이 5조 굴덴으로 변한다고?
누가 생각해도 사기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말한 게 차원신용금고의 잘나가는 과장님, 심지어 프라이빗 뱅킹 섹터에서 가장 잘나가는 구C의 에이스 엑토플 라즈마라면?
그(그녀)의 곁에 있는 게 다른 누가 아닌 여신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의 친동생인 플루토 디스파테르고 신언에 의한 축복을 해 주겠다고 이야기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범차원 세계를 뒤져 봐도 저 둘, 특히나 플루토 디스파테르만큼 신원이 보장된 자는 찾아볼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이 아닌 여신.
신의 약속은 절대적.
탐욕의 화신과도 같은 비즈니스맨인 알 아이프 클렛에게 있어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 틀림없다.
그 축복의 상세야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가 축복을 탐내는 건 확실하다.
이 기회를 이용하지 않을 수단은 없다.
4조 굴덴은 우리와 아비아노가 이번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총알이 되어 줄 것이고, 대통령과의 교섭이 끝난다면 거기에 더해 경매에도 대리인으로 참가해 줄 것이다.
이 두 가지 준비가 끝난 지금, 차원신용금고와 아비아노는 본격적으로 작전 수행을 위해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다음 단계에 착수해 볼까요.”
총알도 준비되었고, 보험도 준비되었다.
이젠 본격적으로 적을 파괴하고 승리를 거머쥘 시간이다.
* * *
며칠 후, 아비아노 공화국의 스틸레토 대통령이 무엇을 약속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클렛은 차원신용금고와 아비아노 공화국에게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아무래도 클렛으로선 범차원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인프라를 지니고 우량 기업의 본사가 다수 존재하는 아비아노 공화국을 위기에서 구해낸다면 전후에 큰 수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결과 교섭에 나섰을 텐데, 대통령이 기분 좋게 충분히 합리적인 보수를 약속한 게 틀림없었다.
충분한 자금을 지닌 클렛은 빛과 어둠을 모두 아우르는 브로커로만 활동하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자신의 편을 정해 움직이기로 했고, 중립을 벗어나는 리스크는 충분한 보상을 얻어 상쇄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우리와 함께 가장 먼저 착수한 건 리베르토티를 구워삶는 것이었다.
리베르토티는 전대 정권을 틀어쥐고 있던 독재자에 의해 황폐한 땅으로 변해 있었고, 푸른 자연과 번영을 되찾기 위해 독재자의 유산을 경매에 내놓으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유산 중 몇몇은 범차원 세계에서 리베르토티와 타 국가의 외교 관계에 심각한 영향을 주는 것이었고, 이러한 의견 때문에 경매 날짜는 쉽게 정해지지 못하고 있었다.
국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선 가진 것을 팔아치워야 하지만, 그걸 산 놈이 엉뚱한 곳에 써먹을 가능성이 농후한지라 책임을 회피할 수 없는 상황.
국가 원수도, 여당도, 기껏 정권을 쥐게 된 상황에서 개혁을 시도하긴커녕 외교 관계를 망쳤다고 국민들의 원성을 들어야만 하는 최악의 궁지에 처해 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클렛의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바리타스의 침략 전쟁을 간접적으로 도와 아비아노의 원한을 사는 대신, 클렛의 투자를 받아들여 국가 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이번에 잘 처리되면 아비아노 측에는 리베르토티가 우방으로서 역할을 다해 주었다고 발표하도록 부탁해 볼게.”
클렛은 아비아노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예 이번 사태를 통해 바리타스의 국력을 약화시키며 거대한 이득을 얻겠다고 결심을 세운 이상, 그는 절대로 망설이지 않았다.
물론 그 배후에 있는 건 우리였다.
차원신용금고의 이름을 감추는 것이야말로 클렛을 얼굴마담으로 세운 이유.
클렛은 자신의 자산이 아닌 우리와 아비아노의 총알을 판돈 삼아 수완을 발휘할 수 있었다.
“제안해 주신 내용은 곧바로 검토에 들어가겠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이 보답을 해야 할지…!”
리베르토티의 새로운 정권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을 지배하던 독재자는 알 아이프 가문의 고객이었다.
당연히 리베르토티의 부가 외부로 새어 나간 데엔 알 아이프 가문 역시 얽혀 있었다.
그들로선 클렛은 미워해야 하는 존재.
하지만, 가뭄의 단비 같은 그의 제안을 마다한다면 어떻게 될까.
범차원 세계 최고의 브로커가 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듯 내민 손을 잡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리베르토티는 알 아이프 가문이 대표적인 서비스로 내걸고 있는 중재와 소개를 비롯한 다양한 혜택을 절대로 누리지 못할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 확고한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라도 알 아이프 클렛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들로선 최선의 선택.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리타스 제국의 뇌물을 받고 경매 일정을 앞당기려 하는 정부 고위 인사들의 존재였다.
“남의 투자를 받아서 국민을 먹여살리는 건 결국 나라의 미래를 팔아치우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지금이야 크게 대가를 요구하지 않겠지만 나중 일은 어찌 될지 모르는 거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그 강대한 바리타스 제국을 거스르는 행동이 이 시점에서 용납될 리가 있을까요?”
“바리타스가 당장 우주 함대의 선수를 아비아노가 아닌 우릴 향해 틀어 버릴지도 모르죠.”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독재자의 지배에서 해방된 조국을 전쟁의 불꽃에 휘말리게 한 아둔한 지도자라는 오명을.”
“후세에 길이길이 남을 겁니다. 역사와 후손이 책임을 묻겠죠.”
“역사나 후손이 남아 있을지조차 의문이군요. 바리타스를 거슬렀다가 행성 자체가 파멸하는 미래가 다가올까 저는 두렵습니다.”
리베르토티의 대통령은 두 편으로 갈라져 싸우는 의원들 탓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국제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선 아비아노의 편을 들고 클렛의 투자를 받아들이는 게 옳았다.
하지만 아비아노를 선택한다면 바리타스의 전쟁 병기가 당장 리베르토티를 유린하기 위해 우주를 건너 날아올지도 모른다.
어느 쪽을 골라도 지옥만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
그가 내린 결정은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아닌 ‘보류’였다.
“경매 일정을 미룹시다. 아직은 한쪽의 편을 들 때가 아닙니다. 전황에 변화가 일어나면 그때 다시 고민해 보기로 하죠.”
“아니 될 소리! 경매를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바리타스의 분노를 사게 될 겁니다!”
“중도를 걷는 건 지금 상황에서 나쁘지 않은 판단일지도 모르겠군요. 변명거리만 적당한 걸 준비해 두면 불가능하진 않을 겁니다.”
“전함에 문제가 생겼으니 수리가 필요하다고 하는 건 어떨까요?”
“제작한 군수 업체 측에 AS를 요구합시다.”
“묘안이군요! 상품의 품질에 완전을 기한다는 이유를 대면 바리타스도 뭐라 하지 못할 겁니다.”
리베르토티는 결정을 내렸다.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의 김지안 대리가 처음에 계획한 것처럼 투자에 혹해 경매 일정을 연기하게 된 건 아니고 과정 역시 예상과는 조금 달랐지만, 어쨌든 결과는 은행원들이 원했던 것처럼 바리타스에 불리하고 아비아노에게 유리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이번 긴급회의에서 오간 모든 대화는, 엄청난 실력을 지닌 해커와 그가 설계한 탁월한 컴퓨팅 파워와 영혼을 지닌 인공지능의 손을 통해 다차원 출장소의 멤버들에게 전달되었다.
“AS를 부른다는 핑계로 시간을 끌 생각인가 보오.”
“연락을 인터셉트할 수 있다면 업체 대신 저희 측의 잠입 팀을 대신 보내는 것도 가능하겠죠.”
“좋아. 그럼 일이 쉽게 풀리겠군. 김지안, ‘그놈’에게 연락해라.”
“예, 소장님.”
나는 전화기를 들고 그동안 한 번도 연락한 적 없던 번호로 문자를 보냈다.
역사상 최고의 실적을 가진 킬러의 연락처로, 정식 의뢰 요청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