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4화

린딘 차원공항에 도착했을 땐 시계는 이미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미 금요일 저녁에 주말여행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출발했는지 출발 층 쪽은 한산했지만 주말 동안 나들이 온 사람들로 도착 층은 붐비고 있었다.

“오셨군요.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본점 비서실 행원으로 추정되는 이들이 셋, 우리를 발견하자마자 다가와 대기시켜 둔 밴으로 안내했다.

여섯 명이 모두 탑승하자마자 차는 곧바로 출발했다.

내심 경비원 영감님이 불려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만 아쉬웠다.

뭐, 이번엔 본점이 분명 표창하고 금일봉 주는 겸 귀찮은 일을 시키려 부르는 게 뻔하다 보니 어쩔 수 없긴 하다.

“출발하겠습니다.”

중형 밴 두 대가 미끄러지듯 공항을 나섰다.

“흥흥~”

놀러 온 거로 착각한 사람이 하나. 플루토는 아까부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플루토 씨 조용히 좀 해.”

아까부터 라즈마 과장이 앙칼진 눈으로 그녀를 노려보고 있는 것 따윈 안중에도 없는 모양이었다.

모처럼 온 린딘은 키키와이보다 기온이 상당히 낮았는데, 아까 비행기 안에서 에어컨 바람을 쐰 탓인지 자꾸 기침이 날 것 같았다. 그걸 내가 참고 있는 이유는 하나. 아까부터 차 안에 동승한 비서실 사람들의 분위기가 여간 냉랭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이려나.’

일단 그래도 표창받으러 온 건데, 좀 살갑게 굴 법도 하지 않나?

나였으면 은행 강도에게 시달리느라 욕봤다고 한마디 위로라도 건넬 것 같은데.

이 사람들은 아까 우릴 처음 봤을 때부터 기묘할 정도로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경계하는 걸까, 아니면 다른 악감정이 있는 걸까.

속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 괜히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는 게 다른 누군가의 지시일 것 같아 불안해질 따름이었다.

나와 엘라마가 예상한 대로라면 이사회 내부에 우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들이 섞여 있을 텐데.

아마도 오늘 나온 비서실 사람들 역시 그쪽 라인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뭐, 근데 비서실이 우리한테 나쁜 마음 품는다고 뭔가 불이익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차 타고 가는 동안 좀 눈치 보이는 것 외엔 불편한 게 없으니 그냥 참으면 되겠지.

“어이. 차에 냉장고 달려 있는 거 아니었어? 물 한 잔 정도는 돌리지 그래.”

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는데 엘라마가 대놓고 기 싸움을 시도하던 비서실 사내에게 꼽을 주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기강 잡으려고 선글라스 끼고 왔던 놈은 본전도 못 뽑고 순순히 차에 비치된 소형 냉장고에서 미네랄 워터를 한 병 꺼내 조심스럽게 잔에 따라 엘라마에게 건넸다.

“하여튼 누구한테 교육받은 건지 모르겠군. 본점 비서실 일한다는 자식들이 빠져 가지고….”

“…….”

엘라마는 노골적으로 운전수와 다른 동승자에게 들리도록 중얼거렸다.

“소장님…그냥 넘어가시면….”

“시끄러워. 닥치고 수분 보급이나 해라, 애송이.”

“예.”

하여튼 진짜, 저 성질머리도 이럴 땐 또 듬직하다고 해야 하나.

* * *

오랜만에 도착한 본점은 평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근방은 금융 회사가 모여 있는지라 평소부터 고객과 행원, 그리고 다른 금융업 종사자들로 붐비는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토요일.

당연하지만 평소와 비교하면 유동 인구의 숫자는 4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우린 차에서 내려 그대로 안으로 들어갔다.

“표창식 어디서 하는 거였죠?”

“지하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아나.”

“아, 맞다.”

본점 지하에 들르는 건 오랜만이다. 예전에 연수 끝내고 정식 행원이 될 때 지하 강단에서 배지를 받았었지.

시간은 벌써 3시 50분.

10분가량 기다리자 줄줄이 부행장과 구D 이사 서너 명이 위층에서 내려와 강당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이군.”

그리운 얼굴. 가장 먼저 엘라마에게 다가와 말을 건 건 부행장이었다.

“저번에 들렀을 때 인사드리지 못해서 아쉬웠습니다. 부행장님.”

엘라마는 그리 반갑지 않은 얼굴로 부행장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분위기로 미루어보아 부행장은 엘라마를 썩 좋아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엘라마를 좋아하는 행원 따윈 차원신용금고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도 무난할 터.

저번에 들은 이야기지만 부행장은 차원신용금고의 고위 간부 중에서도 극소수에 속하는, 특정 파벌에 속하지 않은 행원이라고 한다.

파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만 올라온 남자.

그렇기에 구D의 에이스인 엘라마나 출장소의 다른 과장들이 영 탐탁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

-찌릿

엘라마와 대화하다 슬며시 이쪽을 보는데 순간 나를 보는 눈빛이 엘라마를 대할 때보다 아주 조금이지만 부드러워 보인 건 착각이었을까.

“쓸 만해 보이는 부하를 두었군.”

“아직은 별거 아닌 놈입니다.”

아직은 별거 아니다, 라니.

잘 생각해 보니 엘라마가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처음인 듯하다.

외부인 앞이라고 괜히 좀 비행기 태워 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별거 아니라는 소리는 언젠가 괜찮은 은행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뜻이 아닌가.

엘라마가 할 수 있는 최대한도의 칭찬이 틀림없다.

“멍청한 놈이라 한참 배워야 쓸 만해질 테죠.”

…음. 잘 생각해 보니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게 틀림없다.

저딴 말도 칭찬이라고 받아들이게 되다니.

“네가 그리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버릇 나빠집니다. 그쯤 해 두시죠.”

뭐지. 진짜 칭찬이었어?

아니 근데 엘라마의 말을 저만큼 알아듣는 사람 처음 봤다, 진짜로.

은행에서 오래 일하면 저렇게 되는 걸까. 대체 어떻게 살아야 저걸 칭찬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걸까.

아니, 애초에 저 말을 칭찬이랍시고 하는 엘라마의 신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 슬슬 시작하지.”

부행장과 다른 이사들은 엘라마를 대표로 단상으로 불러내 천천히 표창장을 수여하고 금일봉을 건넸다.

진짜, 그 광경만 보면 굳이 본점까지 불러낼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간단한 과정.

5분도 필요 없는 의식.

아무리 생각해도 우릴 불러낸 이유는 표창이 아니다.

아무리 은행이 이런저런 행사 하는 걸 좋아하는 집단이라고 해도 고작 봉투랑 종이 쪼가리 주겠다고 본점으로 불러내진 않는다.

여섯 명 어치 비행기 티켓과 호텔 방까지 예약해 두었을 정도니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꼴이니까.

“자네들을 위해 행장님께서 특별히 시간을 내주시기로 했다. 대화 나누고 저녁 식사 마치면 하룻밤 린딘에서 묵고 나서 키키와이로 돌아가도록 하게.”

“배려 감사드립니다.”

예상대로 부행장은 표창식 다음 무언가가 있다는 암시를 주고 나서 자리를 떠났다.

우리를 본점으로 데려온 비서실 사람들도 부행장과 이사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남은 건 우리 여섯 명뿐.

분위기를 보아하니 알아서 행장실까지 올라가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모양이었다.

“외부에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 단속하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네요.”

“결국은 예상대로 흘러가는가 보오.”

내가 말하자 비슈티 과장이 한숨을 쉬며 반응했다.

“행장님께서 직접 지시하실 만한 안건이 있다는 거군요.”

아이작은 불길한 예측이 현실로 다가온 게 여간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나 역시 벌써부터 꽤나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었다.

금일봉이나 그런 거 받는다고 뭐가 달라지는 게 아니다. 당장 통장에 찍히는 잔고야 늘어날진 몰라도 여기서 어마무시한 업무 폭탄이 떨어지는 대가라고 생각하니 마냥 웃을 수 없다 이거다.

엘라마 역시 나나 아이작처럼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경계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우리 중에 평온해 보이는 사람은 딱 둘밖에 없다.

일이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는 생각인지 그냥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는 라즈마 과장.

그리고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표정은 뚱하지만 계속 좌우로 고개를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플루토 씨.

“어쩌면 행장님은 그냥 내가 보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행장님이 플루토 씨를 왜 보고 싶어 한다는 거야.”

“그야 당연히―”

“행장님 기다리고 계신다. 빨리 움직이지 않고 뭘 하나.”

플루토가 무언가 말하려 한 순간 엘라마가 우릴 재촉했다.

우린 그대로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21층으로 이동.

행장실 문 앞 복도는 고요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대체 무슨 얘기가 튀어나올지 불안해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럼, 들어가 볼까.”

그런 나의 심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라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끼익

“안녕하십니까, 행장님.”

그리고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늦지 않게 왔군. 기다리느라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

꽤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 * *

패닉은 꽤나 오래 갔다.

그도 그럴 게, 행장의 얼굴은 상당히 눈에 익었다.

틀림없다. 저번에 키키와이에서 우연히 번화가를 돌아다니다 플루토 씨와 마주쳤을 때 같이 있던 사람이다.

저 사람은 분명 플루토 씨의 친언니였을 텐데.

그때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고 이것저것 떠들었지 않았나.

여러모로 곤란한 질문을 많이 던지느라 짜증 났었는데, 그래도 마지막엔 사과해 줘서 인상 자체는 나쁘지 않았던 거로 기억한다.

근데 왜 그 사람이 행장님의 의자에 앉아 있는 거지?

“…다들 구면이군.”

“김지안도 그새 보신 겁니까?”

“키키와이에 들렀다가 우연히 만났다.”

“별일이 다 있군요.”

일련의 대화를 듣고 나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단발머리. 안대. 쿨한 외모. 차분하고 어른스러운 분위기.

내가 만난 여성이랑 단순히 닮은 게 아니라 진짜 동일인물이다.

내가 그날 만난 건 행장님. 오커스 디스파테르.

그리고 그 말인즉―

“언니 오랜만!”

“그래. 잘 지내는 모양이군.”

“응. 근데 저 민머리가 계속 나 괴롭혀.”

“…….”

“분명 행장님 동생이든 나발이든 신경 쓰지 말고 부려먹으라고 들었습니다만. 문제라도?”

엘라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플루토의 고자질을 반박했다.

“엘라마의 말대로다. 경박하게 굴지 마라, 플루토.”

“재미없어. 칫.”

여기서 알 수 있는 건 플루토의 정체가 행장님의 여동생이라는 것.

즉, 그동안 알 수 없었던 그녀의 풀네임은.

오커스 디스파테르의 친동생, 플루토 디스파테르다.

‘내 첫 번째 신도인데, 특별하지.’

‘서비스야. 대리님한테는 가호 듬뿍 줄게.’

출발 전에 공항에서 플루토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녀가 면세점에서 몇 개 브랜드 과자를 내게 사 달라고 조른 것도, 내게 칭찬해 달라고 강요한 것도, 전부 이유가 있던 거다.

“은혜, 공물, 그리고 숭배….”

이쪽 세상의 신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 그 대가로 숭배와 공물을 받아 신으로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었다.

이번에 플루토는 예금이 위조지폐라는 사실을 알려 줌으로써 ‘은혜’를 베풀었다.

결과 나는(원하든 원치 않든, 그리고 그녀가 여신인 걸 몰랐지만) 비싼 과자를 공물로 바쳤고.

플루토를 칭찬하고 머리를 쓰다듬음으로써 여신의 위업을 찬양했다.

나는 꼼짝없이 플루토 디스파테르의 첫 번째 신도가 된 것이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