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122화

“며칠 남았더라. 양 장난 아니네. 이걸 다 외우라니 제정신인가.”

숙소로 돌아온 나는 엘라마가 배포한 자료를 빠르게 살피고 있었다.

본점 방문까지 남은 시간은 5일.

받은 자료는 그 양이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지라 인쇄하면 어마어마한 두께가 될 것이다.

“어떻게 된 게 죄다 보기만 해도 골치가 아파지냐.”

자료의 내용은 차원신용금고가 오랫동안 품어 온 골치 아픈 안건들이었다.

거액의 융자를 내주었지만 회수하지 못한 고객. 그중에서도 재정 건전화가 오랫동안 이루어지지 않아 채무를 상환할 가망이 없는 거래처에 관한 기록들.

죄다 은행이 직접 나서서 재건을 돕지 않는다면 확실히 숨통이 끊어지는 기업 혹은 국가.

개중에는 이미 차원신용금고의 에이스가 한 번 투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지 않은 곳 역시 많았다.

“과연….”

엘라마의 주장은 꽤나 설득력이 있었다.

굳이 우릴 주말에 불러내는 건 남들에게 맡기지 못할 심각한 사안을 출장소 행원들에게 할당하기 위함이 틀림없었다.

표창은 어디까지나 구실.

우리의 실적을 치하하고 싶었다면 내부에서 반발이 있든 말든 진즉에 움직였을 터.

“그나저나 이걸 진짜 우리한테 덤터기 씌울 생각인가.”

반대파가 숙인 것도 우리에게 무리한 일감을 던져 주는 걸 조건으로 표창 진행에 동의한 거겠지.

“자금난만 따지면 나노이보다 더 심각해 보이는 곳도 있고…음?”

배달 음식을 주문하고 나서 계속 자료를 살피다가 하나, 묘한 안건을 발견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었더라…?”

기업이 아닌 국가. 차원신용금고로부터 엄청난 액수의 대출을 받았지만 만기가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환하지 않고 있다.

문제는, 그 이름이 상당히 낯이 익다는 사실이었다.

“아.”

기억났다. 뉴스에서 본 적이 있다.

바리터스 제국.

나노이만큼은 아니지만 뛰어난 과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제국인데 선대 황제가 우주 전쟁으로 넓은 영토를 확보했지만 내정에 문제가 있어 유동성 부족으로 인해 차원신용금고에게서 자금을 수급한 곳이다.

참고로 그게 70년도 더 지난 이야기.

이 제국의 이름을 굳이 내가 기억하고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바리터스 제국, 영토에 매장된 대량의 대체 에너지를 발견.>

<차세대 대체 에너지 ‘아벨바늄’은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클린 에너지.>

<바리터스 수도 대학의 석학 누벨 교수, 기업과 공동 연구를 통해 아벨바늄 가공과 추출한 연료를 사용하는 엔진을 개발.>

다름이 아니라, 뉴스에서 연일 바리터스가 대박을 터뜨렸다고 떠들어 대는 탓이었다.

“…빚 충분히 갚을 만큼 여력 되는 거 아닌가. 빨리 돌려받아야 하는데. 대체 왜 만기를 연장해 준 거지.”

요즘 바리터스의 대기업과 천재 과학자, 공학자들이 힘을 합쳐 개발했다는 엔진 탓에 아벨바늄의 수요는 말도 안 될 정도로 늘고 있었다.

대기에 매연을 뿌려 대지 않는 청정에너지. 게다가 핵연료처럼 한 번 유출했다가 주위를 초토화시키는 것도 아닌데 가격과 연료 자체의 성능이 무지막지하게 뛰어나다고 한다.

아벨바늄은 고체의 형태로 채굴되지만 가공해 액체로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연료로 사용하면 어지간한 화석 연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엄청난 힘을 끌어낼 수 있는데, 단순히 불을 붙이거나 압력을 가하는 식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마도 공학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이런 연고로 전용 연소 기관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긴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화석 연료처럼 보관 중에 불이 붙어 폭발하는 등의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이 장점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특수한 마법이 작용하는 상황에서만 연소가 가능하다는 안정성과 말도 안 되는 에너지 효율.

이를 모두 만족하는 꿈만 같은 연료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놈의 말도 안 되는 이세계는 고작 7년도 지나지 않아 이를 안전하게 활용하는 방법을 연구해 상용화까지 성공시켰다.

물론, 바리터스가 정복한 행성이나 국가 전역에서 불러모은 천재들을 갈아 넣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지만 상용화까지 이미 마친 시점에서 거의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었다.

새로운 연료를 사용하는 데에 따르는 기술적 리스크나 사람의 몸이 노출되었을 때 상정되는 위험 등, 세상의 반발을 잠재우는 데에 필요한 모든 연구까지 마치고 그 누구도 쓸데없는 음모론을 퍼뜨릴 수 없도록 건수 자체를 주지 않는 데에다 그 속도 또한 전격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빨랐다.

이걸 알고 있는 건 아벨바늄이 연수원에서 케이스 스터디의 주제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12차원 올림포스에서 진행된 신입 행원 연수 당시 나는 밀라를 비롯해 특채 동기들과 조를 짜 리서치를 하고 발표에 임했기 때문에 대략적인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바리터스는 여전히 주변 국가를 군사력으로 압박하거나 정복하며 영토를 늘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바리터스가 공격 중인 국가에는 얼마 전 차원신용금고와 거래를 시작한 곳 역시 존재했다.

“흐음….”

이젠 충분히 돈 갚을 능력 있고 잘나가는 제국이 어째서 아직도 징징대면서 대출 만기 연장해 달라고 조르는 걸까.

받아 줄 이유 따윈 없는데 군사력 때문에 참고 있는 건가. 아니면 차원신용금고가 이미 할 만큼 했는데도 배 째라고 나오고 있는 건가.

어느 쪽이든 국가 단위로 양아치짓을 하는 놈들인 건 틀림없다.

뭐, 비단 바리터스만이 아니라 이 자료에 이름이 실려 있는 다른 곳도 대충 비슷하겠지.

모든 케이스가 고객이 일부러 돈을 갚지 않은 건 아니겠지만, 은행 입장에서 봤을 때 빌려준 돈 절찬리에 떼이는 중인 건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액수나 디테일의 차이는 있어도 그놈이 다 그놈이다 이거네.”

여기 적힌 안건 중 이사회가 우리에게 어느 걸 던지더라도 골치가 아파진다는 뜻이다.

고민에 잠긴 나의 주변을 정령들이 맴돌기 시작했다.

“왜. 걱정이라도 되는 거야?”

-뀨우우…

녀석들이 마음 졸일까 싶어서 저번에 인질로 잡혔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는데, 내 표정이 어두워진 걸 보고 불안한 듯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아무래도 희귀한 생명체라 평소같이 돌아다니는 게 어려워서인지 자신들이 따라가지 않은 곳에서 내가 위험에 처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모양이었다.

“괜찮아. 요즘 이상한 일 많이 겪은 건 사실이지만 이번 건 그냥 평소처럼 업무 보는 거잖아.”

분명 별일 없을 거다. 본점이 아무리 난제를 던져 봤자 은행원의 업무 범주를 크게 넘지 않을 터.

“…….”

아니.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없었다.

단언하기엔 여태껏 겪은 일들이 너무 스펙터클하긴 했지.

“응. 어떻게든 되겠지.”

그래도, 지금까지 상대해 온 말도 안 되는 안건들보단 나을 거다.

조금 전에 예상했던 안건이 나올지, 아니면

이번 일은 나만이 아니라 각 파벌 에이스는 물론 든든한 동기 아이작과 플루토까지,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근무자가 전원 함께 움직일 거니까.

* * *

그렇게 맞이한 토요일.

오전 7시에 키키와이 차원 공항 출발 층에 집합한 우린 탑승 수속을 마쳤다.

“소장님 면세점 다녀와도 돼?”

“출발 시간에 늦거나 경비에게 잡혀가지만 않는다면 쇼핑을 하든 폭탄 테러를 벌이든 맞선을 보든 멋대로 하라고 아까 말했을 텐데?”

“아. 맞네.”

“말이 짧다?”

“고마워. 다녀올게.”

수속을 마치자마자 플루토는 30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엘라마의 신경을 성공적으로 긁어 놓았다.

그리고 나선―

“대리님.”

“…나?”

“어.”

“왜…?”

“따라와.”

“……??”

대뜸 내 손목을 잡더니 설명도 없이 끌고 갔다.

“언제부터 그런 사이였나.”

아이작이 넌지시 한마디 던졌지만 대답할 틈은 없었다.

날 잡아끄는 플루토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이었다.

“빨리.”

“어어?”

다짜고짜 날 데리고 간 플루토는 빠른 걸음으로 카트를 가져오더니 내 양손을 잡아 손잡이 위에 얹었다.

“대리님 나랑 같이 쇼핑.”

“…헤?”

진짜 뜬금없는 소리에 입에서 얼빠진 소리가 나왔다.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왜. 이럴 때 아니면 남자랑 쇼핑 가고 그럴 일도 없으니까 한 번 시도해 보겠다는 건데, 그게 어때서.”

“아무리 그렇답시고 직장 동료를 끌고 가진 않아, 보통은….”

멀쩡하게 생겼는데, 아니, 멀쩡하다 정도로는 형용이 안 되는 외모를 지닌 사람이 왜 이렇게 굴까.

평소엔 그냥 저번에 우연히 셋이서 만나 밥을 먹게 된 친언니인가 하는 사람도 그렇지만 플루토는 밖에서 돌아다니면 지나가던 남자 스물 중 열여덟은 고개를 돌릴 정도의 굉장한 미인이다.

평소 집에서 게임하고 만화 읽고 드라마 보는 게 낙이라고는 들었지만 플루토씩이나 되는 사람이 같이 쇼핑 다닐 남자를 구하지 못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어라?

이거 어디서 들어 본 얘기 같은데.

‘오빠는 왜 여자친구 안 사귀어요?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허구한 날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거 보기 좀 그런데.’

‘그런 너는 왜 남친이 없냐.’

‘어… 바빠서?’

‘지도 못 만드는 주제에 왜 나한테 그러고 있어. 바쁘면 직장에서 찾아도 되잖아.’

‘사내 연애는 좀…아니, 사실은 괜찮은데 그냥 본점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거든요. 근데 오빠 진짜 연애 생각 없어요? 키키와이면 예쁜 언니들 진짜 많을 거 같은데….’

‘아직 1년 차인데 연애할 힘이 남아돌겠냐, 너 같으면. 출장도 잦고 집 돌아오면 뻗기 바쁜데.’

‘하긴, 출장소 일 힘들어 보이긴 해요.’

‘연애 같은 소리나 하고, 인사 쪽 일 많이 편한가 보네?’

‘와! 지안 오빠 방금 인사부 비하한 거예욧?!’

“…….”

음. 나한테도 똑같이 적용되는 얘기네. 플루토한테 뭐라 할 입장이 아니긴 하다.

저때 ‘사내 연애’ 힘들면 ‘여자 연애’하라고 말했다가 밀라한테 오지게 갈굼당했던가.

뭐 어쨌든.

플루토도 딱히 진짜로 나한테 무언가 감정이 있어서 면세점 쇼핑 끌고 나온 게 아니라 그나마 저 중에 같은 종족이 나 혼자라 끌고 온 거겠지.

정확히는, 엘라마도 있지만 그 사람은 출장소장이고 유부남이고 도와 달라 부탁하면 화낼 사람이라 끌고 갈 수 없던 거겠지만.

그러고 보니 저번에 만난 플루토네 친언니, 나한테 자꾸 이상한 질문 하면서 못살게 군 거 같은 제1금융권 근무자인데 내가 똑바로 일하는지 궁금해서 그런 게 아니라 동생한테 치근덕대는 놈이라고 오해하고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진짜, 이렇게 둘이서 다니면 오해받기 딱 좋은 상황인데….

“대리님 나 저거 갖고 싶어.”

“어. 월급으로 사면 되잖아.”

“그러려고. 이것 좀 밀어줘.”

예상대로 플루토는 나한테 카트를 맡기더니 여기저기 데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왜. 나 얼굴에 뭐 묻었어?”

“딱히.”

생긴 건 진짜 흠잡을 데 없이 예쁘긴 한데, 진짜 종잡을 수 없는 녀석이다.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남자한테 오해받기 딱 좋다는 걸 모르고 있으려나.

저런 행동이 딱히 업무에 지장을 불러일으킬 거란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조금 껄끄러운 건 사실이다.

“대리님. 눈치 참 없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플루토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던졌다.

“갑자기 눈치는 왜 찾아.”

“이번에 표창받는 거 내 덕인데 안 고마워?”

“어….”

이번엔 내가 잘못한 게 맞는 것 같다.

“…출발하기 전에 맛있는 거 먹을까?”

“응.”

플루토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여태껏 보았던 얼굴 중에서 제일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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