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79화

우린 엘라마와 라즈마가 기다리는 차원 문 앞으로 돌아갔다.

“뭘 꾸물대고 있나. 약속 시간에 늦을 판인데.”

성내는 엘라마에게 대충 사정을 얼버무린 다음 택시를 두 대 잡아 나눠 탔다.

이젠 정말로 실사 현장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엘라마는 라즈마와 함께, 나는 이로울과 같이 차에 탔다.

“그러고 보니 지안 형제님, 가방이 조금 무거워 보이는데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 괜찮아. 혼자서 들 수 있어.”

“굉장히 준비를 열심히 해서 오신 모양입니다. 감사부인 저는 거진 몸만 온지라 죄송해지는군요.”

“각자 맡은 업무가 다르니까 어쩔 수 없지, 그건.”

가방이 무거운 건 준비해 온 서류가 많아서가 아니라 내 목숨을 지켜 줄 로봇 병기가 들어 있어서다.

어떤 일이 생길진 전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어쩌면 가방 안의 콜로서스를 꺼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경이 복잡해졌다.

심지어 그 힘을 행사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대가 입행 동기인 이로울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욱 괴롭게 했다.

그래도, 일단은 가 보는 수밖에.

이로울의 약을 누가 훔쳤다는 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실수로 옆에 있던 쓰레기통에 떨어졌거나 어디 틈새로 굴러가 찾지 못하는 걸지도 모르는 일이다.

괜히 나 혼자 불길한 상상을 해서 불안감을 키울 필요는 없지 않을까.

천사라고 해서 꼭 지구의 신화에 나온 것처럼 도시 하나를 잿더미로 만들거나 사람들을 몽땅 소금 기둥으로 만드는 그런 기적 같은 힘을 다룬다는 법은 없다.

본점 이사들이 무슨 예언자나 신도 아니고 어떻게 정확하게 출장 나간 이로울이 16차원 현지에서 갑자기 PTSD가 도져 언데드를 썰고 다니는 등 거하게 사고를 칠 거라 예상하겠어?

내가 생각했던 거긴 하지만 정말 근거 하나 없고 끔찍할 정도로 허황된 상상이다.

“…….”

곰곰이 생각해 보니 본점 사외 이사 중에는 신이 없어도, 대주주 중에는 있었다.

예를 들어, 12차원 올림포스에서 신입 행원 연수할 때 등산 코스에서 마주친 주주분들이라든지.

“…하데스.”

케르베로스 산책시키다 반갑다며 자판기에서 넥타르 뽑아 주고 갔지, 아마.

“대주주님 이름은 갑자기 왜요?”

“아무것도 아니야.”

뭐,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약 한 통 없어진 거로 쓸데없는 생각을 너무 많이 하고 말았다.

“목적지 도착할 때까지 잠시 눈 좀 붙여야겠어.”

“피곤해 보이니 그게 좋겠네요. 이따 깨워 드릴게요.”

이로울은 평소처럼 상냥하게 웃고 있었다.

제발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 *

우린 시내 중심가에서 택시를 타고 한 시간 반가량 이동한 다음에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교외에 위치한 베르나데 박사의 병원은 5층 건물이었는데 시가지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 인기척이 드문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휑한 오르막길을 차를 타고 오르는 동안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처럼 거무튀튀한 색을 띠고 있었다.

자꾸 불안한 생각 안 하려 하는데 이런 사소한 일들이 불길한 징조처럼 내 머릿속에 연출을 때려 박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나는 대출 받으려는 훌륭한 의사 선생님네 병원이 똑바로 굴러가고 있는지, 그 대단하다는 분이 매일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고 계시는지 구경 나왔을 뿐인데.

왜 겉모습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입행 동기의 과거나 PTSD에 관해 걱정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와서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동기 데리고 조퇴하겠습니다, 같은 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법.

나는 용기를 쥐어짜 택시 문을 열었다.

그런데.

“언데드의 재소생을 시도하는 사악한 의사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천륜을 배반한 악마의 앞잡이!!”

“앞잡이다!!”

“저주받은 지옥의 하수인이다!!”

“하수인이다!!”

병원 앞에는 서울역에서 외치면 100%의 확률로 주위 사람들이 미치광이라고 생각할 멘트를 확성기까지 사용해 외치는 집단이 포진해 있었다.

“…세상에.”

종교 집단, 인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특정 종교의 심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외치는 구호에 이렇다 할 교리가 반영되어 있지 않았으니.

수백 명에 달하는 시위대의 구성원은 당연하지만 전부 살아 있는 사람.

개중에서도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건 휠체어를 타고 있거나 팔을 하나 잃은 등 사고나 부상을 당해 장애를 얻게 된 노인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하나같이 심상치 않은 분노가 서려 있었는데, 이곳에 오기 전 16차원에 관해 조사하는 동안에도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줄은 알지 못했다.

“대전쟁 시대의 생존자분들이군요.”

그들의 정체를 알려 준 건 이로울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16차원에서도 당시 징집당한 분들이 많았거든요. 저기, 날개가 하나 없는 동포가 보이는군요.”

이로울이 손가락을 뻗어 가리킨 사내는 날개가 하나 없었다.

그의 머리 위에 부유하고 있는 빛의 고리는 금이 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보였다.

위태롭게 빛이 들어왔다 사라지는데, 그 점멸이 멈추면 천사의 생명의 불 역시 꺼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언데드가 대전쟁 시절의 적이라서 시위 중인 건 아닌 듯한데.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언데드 자체를 혐오하는 거라면 이런 인적이 드문 언덕에 있는 병원이 아니라 시내로 나서야 한다.

언데드는 16차원에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으니까.

“굳이 옛날 일을 갖고 저리 화를 내는 건 아닐 겁니다. 훨씬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겠죠.”

“어떤 문제?”

“참전 용사인 자신들에게 할당되어야 하는 의료 보험 예산과 기타 혜택을 되살아난 언데드들이 나눠 갖고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겠죠. 되살아난 이들 중엔 과거의 전우들도 섞여 있는데 말이죠.”

충분히 납득이 가는 사유였다.

이쪽 세상에서 참전 용사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지급되었을지도 모르는 복지 예산이 되살아난 것도 모자라 반영구적으로 살아가는 언데드들에게도 쪼개지는 건 분명 용납할 수 없는 일이겠지.

저들의 장애와 심리적 트라우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언데드에 의해 새겨진 것이었으니까.

다만, 그걸 전부 언데드의 탓으로 돌리는 건 도리에 어긋난 일이다.

왜냐하면, 대전쟁 시대 당시 언데드는 자유 의지를 지니지 못하고 네크로멘서들에게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수십 년의 세월이 필요했긴 했어도 언데드가 자유 의지를 되찾고 여러 차원에서 시민으로 인정받은 것 역시 이러한 사유가 참작된 결과였다.

물론, 이러한 흐름을 머리로 이해하고 있다 해도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는 게 별개의 일이라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만일 내가 저들과 같은 일을 겪었다면 이렇게 중립적인 시점에서 얘기할 수 없었을 테니까.

“안 그래도 언데드가 자신들의 권리를 침범하고 있다 생각하는 사람들이니, 언데드만 걸리는 병을 치료해 더욱 오래 살게 만드는 의사를 증오하는 심정도 이해는 가.”

반대로 언데드의 입장에선 저들이 우스워 보일 거다.

그렇게 부러우면 네크로멘시 시술을 받아 언데드가 되라고, 절반 정도 조롱이 섞인 조언을 건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게 쉬웠다면 죽을 날이 다가온 사람들이 모두 언데드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거다.

윤리적, 생리적, 종교적, 경제적,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 탓에 사람들은 망자가 되길 거부하고 있다.

내가 저들이었어도 아마 같은 결정을 내릴 것이다.

아직 서른도 되지 않아서인지 죽음은 내게 있어 너무나도 먼 곳에 존재하는 공포였고, 굳이 내가 잘 이해하지 못하는 힘을 빌어서라도 구차하게 연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잃을 게 그리 많지 않아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직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이 없어서.

자신이 죽은 다음 주위에 남는 사람들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서.

아직 그리 나이를 먹지 않고 경력도 일천한 탓에 자신의 손으로 쌓아 올렸다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게 없어서.

무언가 미련을 품을 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아서.

“…….”

먼 옛날 반려자나 하인들을 같이 무덤으로 데려가는 순장은 언제나 왕이나 그에 맞먹는 권력을 지닌 귀족들이나 하던 짓이었다.

소유한 것이 많고 잃을 것도 많으니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사후 세계에 몸만 달랑 가는 것보단 살면서 자신이 다져온 부, 명예, 그리고 기타 트로피를 모조리 저승으로 테이크아웃하길 바란 것이리라.

언데드가 된다는 건, 어쩌면 그런 사고방식의 연장 선상에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많이 가진 이들에게 공감할 수는 없지만 가진 걸 잃기 싫어하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같은 마음을 품은 적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망자의 몸으로 세상에 남아 연명하는 자신을 상상하기 싫고, 상상할 수도 없긴 하다만.

이루지 못한 무언가가 남아 있을 때, 원하는 걸 마침내 손에 넣었을 때 잔혹한 운명이 다가온다면.

과연 나는 여전히 같은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니, 계속해서 생을 이어 가는 언데드의 마음도, 그들과 자원을 나눠야 한다는 사실에 분노를 토로하는 이들의 심정도, 모두 어느 정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안심하세요. 저기 보이는 사람들, 만에 하나 나쁜 마음을 먹어도 아무것도 못 할 겁니다.”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눈치챈 건지 이로울이 침착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시 정부에 신고된 시위인진 몰라도 경찰까지 병원을 지키고 있으니 함부로 덤벼들었다간 잡혀갈 테니까요.”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마음 한편을 지배하고 있는 불길한 예감은 여전히 제자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저 중에 자기 목숨을 걸어서라도 원하는 것을 이루는 과격주의자가 섞여 있지 않길 기도하는 정도밖에 없다.

“맞다. 지안 형제님. 아까 저기 동포가 있다곤 말했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리 천사가 강하다 해도 빛의 고리가 저 지경이 된 이상 아무런 능력도 발휘하진 못할 테니.”

“…빛의 고리가 멀쩡하면 어디까지 할 수 있길래 그래?”

“그건, 굳이 말씀드리고 싶지 않네요.”

이로울의 한마디에 잠시 사그라들려 했던 불안이 다시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뭣들 하고 있나. 어서 들어가지 않고.”

그때였다. 뒤이어 도착한 또 한 대의 택시에서 내린 엘라마가 우릴 부른 건.

“소장님 기다리고 있던 건데요.”

“그래서, 내가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 하나?”

엘라마는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시위대가 점거한 병원의 지상 주차장을 우회해 긴급 환자 이송용 출입구를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차원신용금고에서 왔습니다. 베르나데 박사님은 계시나요?”

약속 시간 3분 전.

우린 곧바로 병원 1층 원무과로 걸어가 용무를 전했다.

“네, 안쪽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건장한 체격의 간호사는 우릴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마침내, 결단을 내릴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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