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78화

며칠 후.

싸늘한 가을바람이 몰아치는 16차원 이졸데 행성, 툼스토니카.

삶과 죽음을 동일시하는 언데드들의 도시에, 우리는 도착했다.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 소장, 슬리크 엘라마.

다차원 출장소 프라이빗 뱅킹 섹터 담당 과장, 엑토플 라즈마.

본점 감사부 대리, 이로울 하이네아.

마지막으로 다차원 출장소 대출 창구 담당 대리인 나, 김지안.

“생각보단 평범한 곳이네요.”

갓 툼스토니카에 도착한 이로울은 멀쩡하게 돌아가는 도시의 모습이 의외였는지 신기하단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이곳은 시민 중 언데드의 비율이 이상하리만치 많았지만, 6-2차원의 여타 대도시와 이렇다 할 차이점을 느낄 수 없었다.

“왜. 인구 분포 중 언데드의 비율이 높은 차원이면 끔찍한 디스토피아가 펼쳐져 있을 줄 알았습니까?”

평소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라즈마였지만, 이로울의 발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목소리에서 노골적인 적개심이 느껴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라즈마 ‘과장님’. 이쪽 오면서 조심하라고 부장님이 누누이 말씀하셨는데 제가 깜빡하고 말았네요.”

천사들은 직급 상관없이 다른 행원들에게 형제님이니 자매님이니 하는 호칭을 쓰고 있었고.

그들의 신앙과 문화를 존중하는 의미에서도 차원신용금고 내에선 이를 암묵적으로 용납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유독 언데드에게만큼은 제대로 직급을 붙여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과거 대전쟁 시대 시절, 그들이 각각 다른 진영에 속해 있던 천사와 언데드 사이에 앙금이 남아 있는 까닭일지도 모르겠다.

듣자 하니 당시엔 네크로맨시로 사자를 되살려 병사로 부렸다고 한다.

그것도, 아군과 적군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천사들 입장에선 죽은 전우들이 시체가 되어 자신들에게 덤벼드는 기이한 상황과 마주했을 테니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짐작이 갔다.

예전에 술자리에서 이로울의 나이가 겉보기보다 훨씬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대전쟁 시대에 참전했다는 델 몬테 지점장보다 조금 어린 정도라고 하던데.

이로울이 지점장님처럼 직접 전쟁터에 뛰어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언데드에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는 건 틀림없었다.

“이로울. 잠시만.”

나는 엘라마에게 커피를 사 오겠다고 둘러댄 다음 카페로 이로울을 끌고 가 테이크아웃 주문을 마쳤다.

“대체 무슨 생각이야? 16차원이 어떤 곳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

“죄송합니다, 지안 형제님. 안 그래도 이럴 것 같아서 불안했는데 계속 속내가 나오는군요….”

예상했던 대로 이로울은 언데드들에게 영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지금은 일하러 온 거니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해.”

“지당하십니다. 우리 주께서도 차별을 금하셨으니… 아무리 제가 망자들을 볼 때마다 트라우마가 유발된다 해도 이런 반응을 보여선 안 되겠죠.”

이로울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 손은 계속해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단순히 화가 난 정도가 아니다.

이로울의 머리 위에 둥둥 떠 있는 후광의 고리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천사들의 감정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건 그들의 표정이 아닌, 후광이라고 들은 적이 있다.

지금 이로울이 품고 있는 건 분노가 아닌, 분명한 살의.

이른 아침부터 카페에서 커피를 즐기는 언데드를 바라보며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휩싸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본점에선 대체 어떻게 버틴 건데….”

대체 무엇이 그의 트리거를 촉발한 걸까.

“…사실 본점에선, 꾸준히 약을 복용하고 있었거든요.”

이로울은 조용히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대체 어떤 PTSD를 겪고 있길래 약까지 먹어야 하는 걸까.

나는 아까 공과 사를 구분하라고 이로울에게 말한 것을 후회했다.

녀석은 과거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을 겪은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언데드가 우글대는 본점에서 일하기 위해 약까지 복용할 일은 없겠지.

“약 어디 갔어.”

“그게 실은….”

이로울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말을 잃었다.

“…없어졌다고?”

“네.”

나는 그제야 어제 입행 동기 채팅방에서 이로울이 먹던 약이 사라졌다고 말했던 사실을 떠올렸다.

설마 그게 정신적인 증상을 완화해 주는 것일 줄이야.

“어쩌다가 잃어버린 거야?”

“그제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점심 나가서 먹었는데 돌아왔을 땐 사라졌더라고요.”

“비축은 따로 없고?”

“저희 차원에서만 만드는 희귀한 물건인지라 특정 시기에 정량만 판매되고 있어요. 급하게 구하려 해도 감사부 다른 선배님들은 복용자가 아닌지라….”

이쯤 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이미 대전쟁 시대의 전쟁 병기인 델 몬테 지점장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본 적이 있다.

동일하게, 나는 천사가 단순히 날개와 빛의 고리가 달렸을 뿐 평범한 인간인 나와 아무 차이도 없을 거라고 순진한 착각을 범하지 않았다.

지금의 이로울은 아마도 람보처럼 PTSD에 시달리는 퇴역 군인.

그걸 알고도 약을 훔친 다음 이로울을 16차원에 밀어 넣은 자가 있다.

“…이로울. 미안한데, 병가 내고 6-2차원으로 돌아가 주지 않을래?”

“그런 불가능합니다. 감사부 행원으로서 맡은 바 사명을 다해야 하거든요.”

잠시 잊고 있었다.

이로울은 직업의식이랑 양심 하나만큼은 누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투철하다는 사실을.

“…….”

나는 이로울의 직무권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천사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는지 역시도.

하지만 확실한 건 이로울이 매일 복용해야 하는 약을 잃어버릴 정도로 덤벙대는 녀석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악의 타이밍에, 아마도 전쟁의 PTSD를 억눌러 주는 약을 잃어버린 건 누군가의 설계에 의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놈들이 노리는 것은 아마도―

“7-B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예상 가능한 최악의 상황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애써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이로울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 * *

같은 시각.

그레이트후리텐의 수도 린딘에 위치한 차원신용금고 본점.

전산관리과에선 근무 1년 차 특채 출신 신입 행원 과타노차 대리는 고작 출근한 지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의자 두 개를 사용해 누운 채 유유자적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산관리과 과장을 포함해 그 누구도 주의를 주지 않는 데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차원신용금고 본점 전산관리과는 다른 부서와 달리 구성원들의 성격 탓에 상당히 독특한 분위기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둘째. 과타노차는 출근 후 한 시간 만에 할당된 모든 업무를 마친 건 물론이요, 선배 행원들의 업무까지 모조리 도와 마쳤다.

과타노차의 도움으로 업무 부담이 몇 배는 줄어들었지만, 당사자는 그걸 갖고 생색을 낸다거나 인사고과 반영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업무를 마친 다음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뿐.

이 수수께끼의 촉수 생명체는 언제나 업무 내용을 논하는 게 아닌 이상 타인과의 대화를 꺼렸다.

그가 정상적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입행 동기 몇 명 외엔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이미 모두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처럼 늘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덕을 보고 있는 행원들은 과타노차를 언제나 호의적으로 대했다.

사람들은 알아서 과타노차에게 간식거리와 음료를 제공했고, 그의 기분을 해하지 않도록 행동했다.

고작 신입 대리 하나가 부서의 업무를 모두 파악하고 처리하는 건 차원신용금고의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상황.

하지만 그 일 처리는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완벽하고 빨랐기 때문에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는 없었다.

물론, 몇몇 인원들이 과타노차가 주목받는 걸 보고 그의 업무 태만을 지적하거나, 상부에 보고서를 올리는 등 트집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지난 이야기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공격을 시도한 이들은 이미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이 아니었다.

자신을 적대시하는 선배 행원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미리 포착한 과타노차가 드론과 감시 카메라 등을 사용해 그들의 약점을 잡아 선수를 쳤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무런 증거나 흔적을 남기지 않고.

과타노차는 이 일이 생긴 다음에도 그 어떠한 감정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남은 시간을 여유롭게 원하는 대로 사용하다 퇴근하는 것을 반복하는 생활.

그 기계적인 삶의 방식과 태도에 공포마저 느낀 전산관리과 행원들은 절대 과타노차에게 무언가를 부탁할망정 강요하거나 불쾌함을 유발할 수 있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과타노차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푸는 이들에게 업무적인 도움을 주었고, 다른 이들은 과타노차가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 평화로운 공생관계가 형성된 데엔 이런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스스로의 감정을 외부로 표출하는 일 자체가 드문 과타노차가.

“하핫. 걸작이군, 이건.”

오늘은 계속 모니터 앞에서 웃음을 멈추지 못하고 있었다.

당연한 소리지만 전산관리과 행원들은 과타노차가 무엇을 보고 저리 유쾌하게 웃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개중 단 한 명도 근처로 가서 그의 열여섯 개의 모니터가 무엇을 비추고 있는지 확인할 만큼 용감하진 않았다.

“그런 거였군. 그 머저리를 왜 기어코 현장 실사에 동행시키나 했더니….”

담배를 들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복도로 나가는 선배 행원들의 모습을 감각 기관으로 포착하며, 촉수 생명체 과타노차는 음침한 미소를 띠었다.

그가 보고 있던 건 인사부의 비밀 데이터베이스 센터에 엄중히 봉인되어 있던 대전쟁 시기의 영상이었다.

이것을 과타노차가 발견한 것은 정확히 석 달 전의 일이었다.

당시 남아도는 시간을 감당하지 못하던 과타노차는 미칠 것만 같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은행 전산망을 이 잡듯 뒤졌고, 그 과정에서 존재 자체가 비밀리에 부쳐진 수수께끼의 데이터베이스를 발견했다.

과타노차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시큐리티를 우회해 데이터베이스를 복제했지만, 그 내용은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달랐다.

안에 담겨 있던 것은 대전 시대의 전쟁 기록을 담은 영상이었고, 전쟁을 가장 비효율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타노차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인사부의 밀리터리 마니아가 은행 컴퓨터에 자신이 좋아하는 사료史料를 저장해 두었을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 입행 동기인 감사부 대리 이로울이 언데드로 가득한 16차원으로 개인 대출의 실사를 위해 출장을 다녀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과타노차는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 과타노차는 평소처럼 출근 후 한 시간 만에 모든 업무를 마친 다음 영상을 재생했다.

“미친놈들 같으니라고.”

봉인된 영상에는 뚜렷하게 찍혀 있었다.

중무장한 치천사 이로울이 신에게 사사받은 막대한 권능이 담긴 빛의 검으로.

언데드로 가득한 도시를 일격에 베어 지도의 형태를 바꾸는 광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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