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6화

김지안과 다른 행원들이 고객을 암살자의 손에서 지키기 위해 분투하고 있던 오후 2시.

차원신용금고의 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는 전용기의 창문 너머로 키키와이의 아름다운 바다를 주시하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방심할 수 없는 남자군.”

직접 만나 본 김지안은 생각했던 이상으로 배짱이 있는 남자였다.

엘라마가 기용한 자인 이상 동료 직원의 이름 정도는 전부 파악하고 있을 터.

창구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는 플루토의 성이 디스파테르라는 것쯤은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말인즉, 플루토의 언니라고 자신을 소개한 이상 김지안은 동석한 상대가 차원신용금고의 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라는 사실 역시 눈치채고 있었을 거란 뜻.

과연, 자신이 발굴한 사내답게 김지안은 범상치 않았다.

그동안 서부 포독스 지점과 키키와이 출장소에서 쌓은 실적을 보고 신입 행원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인물이라는 건 진즉에 눈치채곤 있었다.

하지만 막상 만나 보니 그는 어지간한 베테랑 행원들과도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배짱이 두둑했다.

술자리를 가진 그날, 오커스는 고의로 취한 척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차례차례 던졌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자신이 잃어버린 한쪽 눈을 가진 남자를 직접 시험해 보고 싶었던 까닭이었고.

둘째, 동생인 플루토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먼저 같이 밥을 먹자고 말을 건 이성이 못마땅해서였다.

“플루토 녀석, 내가 소개하겠다는 남자는 죄다 거들떠 보지도 않더니만.”

오커스는 동생을 시집보내기 위해 몇 번이나, 차원신용금고에서 일하는 엘리트를 소개하려 했던 적이 있었지만 플루토는 그때마다 사진도 보지 않고 퇴짜를 놓았다.

‘연애 한 번 안 해 본 노처녀가 다리 놔준 남자를 내가 왜? 그렇게 좋은 남자였으면 언니가 먼저 만나야 하는 거 아니야?’

논리적인 반박을 당한 이후로 말을 꺼낼 생각도 못 했는데, 이젠 플루토 본인도 슬슬 위기감을 느낀 건지 적극적으로 짝을 찾으려 드는 모양이었다.

“가만….”

그날은 괜히 유치한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김지안은 나쁘지 않은 선택인 것 같긴 했다.

플루토와 정신 연령이 가까운 젊은 행원들, 개중에서도 최근 5년 동안 입행 1년 차에 김지안만큼 눈에 띄는 실적을 내고 있는 이는 없다.

엘라마를 비롯해 오직 실력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본점 간부들 역시 김지안에게 주목하고 있을 정도다.

그렇다고 또 오만에 빠지거나 과도할 정도로 자존감이 낮은 것도 아니다.

사적인 자리라고는 해도 행장인 자신이 던진 무례한 질문에도 서슴없이 대답하는 자신감은 덤.

게다가 인물은 또 어떠한가.

“…….”

김지안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굳어 있던 오커스의 표정이 단번에 풀어졌다.

아름답고 완전한 존재로 태어난 신들과 비할 바는 아니지만 김지안은 인간치고는 훌륭한 축에 속하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크흠.”

오커스는 얼굴을 붉히며 헛기침을 했다.

변명은 아니지만 김지안의 외모가 눈에 띄게 좋다는 건 비단 오커스만의 의견이 아니었다.

인사부의 비밀 보고서에 따르면 플랫 샤펜도라와 함께 신문에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박힌 김지안의 외모에 호감을 느끼는 본점 근무 여성 행원의 비율은 85% 이상.

행원들의 종족이 다양한 것을 고려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기였다.

이사들 역시 고객들에게 배포할 기념품 달력에 김지안의 사진을 사용하자고 발언할 정도다.

다만, 오커스는 김지안의 외모 이상으로 다른 부분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나저나, 벌써 다음 단계에 접어들었나. 생각보다 각성이 빠르군.”

김지안에게 심어진 ‘눈’은 벌써 본래 지니고 있던 힘을 조금씩 되찾고 있었다.

인간의 몸에 심어진 이상 이런 속도로 신의 눈에 걸린 봉인이 풀릴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 현상은 김지안이 신의 힘을 나눠 받는 직무권능을 갖게 된 것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오커스는 그렇게 추측했다.

“아니지, 어쩌면―”

그녀는 김지안이 33차원에서 세계수 담보 대출을 진행할 때 자신이 직접 종이에 신언神言을 적어 주었던 일을 떠올렸다.

반쯤 실험 삼아 저지른 일이었고, 다른 신들에게 알려지면 영 좋지 않은 소문이 날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오커스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고, 기대했던 대로 김지안은 신언을 발동해 바람의 정령을 대정령으로 승화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아무래도 그날 신의 힘의 편린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한 탓에 눈의 봉인이 더욱 빠르게 풀리기 시작한 게 틀림없다.

어찌 보면 김지안을 이쪽 차원으로 불러들인 가장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힌트를 얻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커스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

만에 하나 직무권능이 충분히 성장하기 전에 눈의 봉인이 더욱 풀린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과 같은 속도로 눈의 봉인이 풀리는 건 김지안에게 있어 그릇이 전부 담을 수 없는 양의 물을 붓는 것과 같다.

봉인이 풀린 눈을 되찾는다는 초기의 목표는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릇인 김지안이 망가지는 건 오커스가 원하는 결말이 아니었다.

“함부로 신언을 남용해선 안 되겠군….”

만에 하나 엘라마나 김지안이 자신에게 도움을 구한다면, 그땐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어야만 한다.

“…….”

대의를 위해선 행원 중 한두 사람은 희생시킬 각오도 되어 있었지만, 그 대상이 유능한 신입 행원이자 친동생의 남자가 될 수도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무서운 일이군.”

벌써 이렇게 물러지면 안 되는데.

오커스는 그렇게 중얼대며 푹신한 전용기 좌석 등받이에 몸을 눕혔다.

극단적인 방법을 취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김지안이 기대한 만큼 성장해 주기를 바라는 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전부.

행장은 짧은 휴가를 되새기며 잠에 들었다.

* * *

차원신용금고의 행원 전용 휴게 시설과 리조트가 위치한 달러달러섬.

은행의 사유지인지라 제한된 인원 외엔 출입이 불가능한 지역.

하지만 행원들은 방심하는 일 없이 이곳에서 보호 중인 고객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해 감시에 나서고 있었다.

“CCTV 확인을 완료했소.”

비슈티 과장이 경비원을 통해 회수한 영상에는 확실히 복면을 쓴 남자의 뒷모습이 비쳐 있었다.

“상당한 단련을 거친 놈이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소. 쉽게 포기하지 않겠지.”

비슈티는 다른 행원들에게 영상을 공유한 다음 한동안 확대한 사진을 노려보았다.

화질이 그리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적에 관해 최대한 많은 정보를 손에 넣으려 하는 모양이었다.

김지안이 데려온 콜로서스 역시 시각 데이터를 인풋한 다음 암살자의 체격 등을 자동으로 분석해 홀로그램 모델로 만들어 허공에 투사하고 있었다.

시설의 경비 책임자는 물론 서버와 하우스메이드, 그리고 접수창구의 직원까지 모두에게 현재까지 밝혀진 암살자의 정보가 배부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은 황금연휴를 맞이해 달러달러섬으로 바캉스를 나온 본점과 지점의 행원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리조트에서 일하는 이들은 전원 비상용 호출기를 소지하고 있다.

암살자와 비슷한 체격의 인물이 보이기만 해도 곧바로 세이프하우스에서 지휘 중인 비슈티에게 연락이 갈 것이다.

무엇보다, 굳이 사람의 눈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비슈티가 리조트 곳곳에 추가로 감시 장비를 설치했다.

물 샐 틈 없는 보안.

이를 유지하는 동안에도 김지안과 다른 행원들은 본점 개인여신부에 연락해 대출 심사를 계속해서 진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 *

“그러니까, 지금은 마음 놓고 푹 쉬셔도 됩니다.”

김지안의 설명을 들은 아디젠 부부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가족이 고용한 암살자에게 목숨이 노려진다는 건 분명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들을 다른 은행원들도 묵고 있는 이 리조트에 데려온 데엔 리스크가 따른다곤 생각하고 있다.

은행 출장소를 아예 터뜨리려 했던 놈들이다. 만일 이 부부가 여기 있는 걸 알게 된다면 리조트를 폭발물로 날려 버릴지도 모르지.

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나도 최대한 노력하곤 있긴 하다만.

<전 방향 투시 레이더 기동 중. 거수자의 바이탈 사인 확인 불가.>

콜로서스 마크 2 레플리카는 현재 무인도 상공에서 360도 사방을 감시하는 중이었다.

콜로서스는 애초부터 우주 괴수와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로봇이다.

당연히 반경 수 킬로미터 있는 생명체의 생체 신호를 감지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다.

콜로서스가 감지한 생체 반응은 전부 지도가 되어 내가 착용한 콘택트렌즈에 표시되고 있었다.

이 렌즈는 마크 2가 기체 내부에 존재하는 초소형 생산 설비에서 제작된 물건이었다.

콜로서스 마크 2에는 사용자인 나의 편의를 위해 몇 가지 기능이 추가되어 있었다.

개중 하나가 바로 주위의 환경에서 필요한 재료를 수집해 주변 기기나 기타 액세서리를 생산하는 것이었다.

나노보다 작은 피코 단위의 부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금술이 추구하던 궁극의 물질이자 마크 2의 동력원인 단원자 금의 힘으로 작동하는 초소형 공장.

이 렌즈 역시 나노이의 기술이 도입된 물건으로 몇 시간을 차고 있든 눈이 피로해지지 않는다.

메인 기능은 콜로서스가 보유한 데이터를 공유받는 것.

그런 연고로 지금 내 시야에는 반투명한 지도가 표시되고 있었다.

섬 안에서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물론 바닷속을 헤엄치는 어군들까지.

근처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움직임이 축약된 데이터로 지도에 표시되고 있었다.

뽈뽈대며 움직이는 자그마한 마커들.

나와 아디젠 부부, 그리고 다른 행원들의 생체 반응까지 콜로서스의 레이더가 확인한 모든 지성체의 정보도 정확히 표시되고 있다.

상세를 확인하고 싶다 생각하면 언제든 내 뇌파에 반응해 지도가 움직였다.

언제든지 ON/OFF가 가능한 편리한 기능. 게다가 신기하게도 지성체의 경우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마커의 색깔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저번에 사우 박사와 홀로그램 메시지로 대화할 때 메시지의 글꼴과 색깔을 보고 속내와 감정을 느낄 수 있던 것처럼 말이다.

“신기하네. 이것도 렌즈의 기능인가.”

나노이의 과학 기술에 감탄하고 있던 그때, 렌즈에 콜로서스의 AI가 보낸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콜로서스의 레이더에 해당 기능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

나는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사람의 감정을 파악하는 거, 어쩌면 내 직무권능의 연장선에 자리 잡은 능력일지도 모르겠다.

…한데 만일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또 문제가 생긴다.

“묘하네.”

승진 등의 이유로 직무권능이 강해질 경우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의 머리엔 진화한 능력의 사용법이 자동으로 인풋된다.

그런데, 이번엔 새로운 눈의 능력이 개방되었는데도 나는 이를 자각하지 못했다.

즉, 이 감정을 보는 힘은 직무권능이 아닌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착각… 은 아닌 것 같고.”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다 보니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긴 한데, 솔직히 잘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저번에 경험했던 바에 따르면 지금 내 눈에 보이는 정보는 헛것이 아닐 테고, 그렇다면 유효하게 활용하는 수밖에.

“흠.”

지도 속, 달러달러섬을 향해 헤엄쳐 오는 돌고래의 무리가 기쁨의 신호를 발하는 게 보였다.

보아하니 후리텐의 법으로 지성체라고 규정된 생명체가 아니어도 어느 정도 IQ를 가진 생물이라면 내 눈으로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 확인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나 자신이 이 힘을 쓰는 데에 익숙해지진 않은 듯 밀라가 하는 것처럼 맨눈으로 얼굴만 보고 섬세하게 감정을 읽는 건 불가능했다.

아직은 데이터나 글자, 기호 등에서 감정 변화를 읽어내는 게 한계.

그렇다 해도, 암살자가 품은 살의 정도는 이 지도를 보고 있으면 확인할 수 있겠지.

* * *

김지안은 새로운 능력으로 고객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도 충분히 ‘미지’에 대처할 만큼 이쪽 세상에 관한 지식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김지안이 알지 못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로, 암살자인 요하네가 자신의 모습을 돌고래와 유사하게 변신시킨 채 섬을 향해 전속력으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로, 요하네는 아디젠과 미놀리 부부를 죽일 생각이 전혀 없으므로 김지안이 생각한 것처럼 살기를 품고 있지 않았다.

이런 연고로 요하네는 그 누구에게도 발각되는 일 없이 달러달러섬의 모래사장에서 다시금 사람의 모습으로 변해 잠입할 수 있었다.

슈노켈과 고글을 끼고 바다에서 걸어 나오는 그의 모습은 누가 봐도 갓 해수욕을 마치고 숙소로 걸어가는 투숙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겁주는 김에 숙박객들 죄다 놀라게 해 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직원으로 변신한 요하네는 가가멜이 준 약병의 내용물을 아낌없이 준비 중인 해산물 뷔페 음식에 흩뿌리기 시작했다.

어차피 그 누구도 죽일 생각이 없었기에 그는 가가멜이 언급한 양보다 훨씬 적은 양의 독을, 장난삼아 투입했다.

이로써 숙박객들은 두드러기와 발진, 그리고 기타 증세에 이틀은 족히 시달리게 될 것이다.

가가멜에게 들은 설명대로라면 죽을 일은 없지만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질 터.

“신혼여행 방해해서 미안하게 됐수다.”

결혼하자마자 건강 상태에 빨간 불이 들어온 신혼부부는 미친 듯이 싸울 테고, 결과적으로 둘의 관계는 의뢰인들이 원하는 이혼이라는 결말을 향해 치닫게 될 가능성이 높아질 터.

“적어도 먹는 동안은 행복하길 바랄게.”

요하네는 적당한 얼굴로 변신해 일찍부터 다이닝 홀에 자리를 잡았다.

어차피 어지간한 독은 그의 몸에 해를 끼치지 못한다.

요하네는 두 타깃이 음식을 먹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팝콘을 주문해야겠군. 메뉴에 있다면.”

여전히 오랜 친구인 가가멜이 자신을 속였을 거라곤,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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