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3화
불파사 비슈티의 대응은 빨랐다.
김지안이 정문 앞에 나타난 수수께끼의 남성의 존재와 그가 어깨에 짊어진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기도 전에.
노련한 군인이었던 비슈티는 살기를 감지하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걸 말한 거였나….’
본점의 네스먼토 이사가 말했던 ‘위기’.
김지안의 목숨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아진 상황.
굳이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네스먼토 이사가 직접 움직였다.
목적은, 저번에 얘기했던 것처럼 오커스 디스파테르 행장이 지닌 ‘추심’의 권능에 대비하기 위해서.
구E는 오랫동안 원수로 여겨오던 우주 괴수가 멸종됨으로써 구D에게 신세를 지고 말았다.
이로써 행장은 이사회에서 중요 안건을 가결할 때 권능을 사용해 강제로 구E의 찬성표를 끌어올 수 있게 되었다.
이를 막기 위한 방법은 오로지 하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장에게 진 빚을 갚는 것뿐.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비슈티는 네스먼토 이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 아해가 위험할 때 자네가 구해 주는 건 어떤가. 이 정도면 행장도 납득할 것 같은데.’
‘준장께선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오. 정례 이사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다른 방법을 찾아보는 게―’
‘아니. 분명 일어날 거야. 골치 아픈 일이.’
그의 계획은 김지안을 위기에 처하게 만든 다음 비슈티가 구하게 만드는 것일 터.
그렇다면, 부하인 비슈티에게라도 타이밍을 먼저 알려 주는 것이 도리일 텐데.
‘노인네 심술에 어울려 주는 것도 쉽지 않소.’
전장에서 수없이 죽을 위기를 넘긴 군인의 집중력은 많은 것을 가능케 한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 비슈티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이사와 대화했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네스먼토 이사는 말했다. 차원신용금고와 거래하고 싶어 하는 고객에게 출장소를 찾아가도록 조언했다고.
아마도 김지안의 창구에서 상담을 받는 저 남녀가 바로 그가 말한 고객일 것이다.
정문 앞에 선 놈은 그들을 노리는 암살자.
모든 게 미리 짜인 각본과도 같다.
적은 방아쇠를 당겼고, 대전차 로켓이 창구에 앉은 두 고객을 향해 똑바로 날아오는 중이었다.
타깃 외의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장소에서 폭발물을 사용한다는 건 최소한의 상도덕도 지니지 않았다는 뜻.
목표를 처리하는 겸 목격자까지 전부 지워 버릴 생각.
증인이 없으면 암살이라고 생각하는 최악의 부류.
다만, 틀림없는 삼류다.
저런 놈의 손에 김지안이 당해 봤자 딱히 손해 볼 건 없다.
다만, 네스먼토 이사의 소개로 찾아온 고객이 죽고 출장소가 폭발하게 두는 건, 구E의 실세라고 불리는 자신의 커리어에 큼지막한 오점을 남기는 것과 진배없다.
심지어, 김지안을 구하라는 건 네스먼토 이사가 직접 지시한 사항.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하는 수 없군.’
출장소는 세 파벌이 지닌 모든 노하우가 집약된 전략 점포.
당연한 얘기지만 25차원에서 몇 번씩 독재자의 군대의 테러에서 점포를 보호해 온 구E는 이런 상황에 대한 대비 역시 마쳐 두고 있었다.
-파팟!
비슈티의 손이 허공에서 X자를 그렸다.
“제2종 봉인 술식 해제. 탐식검 마엘슈트랑 소환.”
-지이잉
다음 순간 정수기 앞에 서서 컵에 물을 받고 있던 경비원의 등에 푸른 마법진이 생겨났다.
출장소의 유일한 경비원. 그가 70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중요 점포인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며 어지간한 행원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대부분의 행원들이 잊었거나 모르고 있는 그의 예전 신분.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것.
-고오오!!
느리게 흐르던 시간이 완벽하게 정지했다.
경비원의 등에 생긴 마법진이 바닥을 알 수 없는 새까만 구멍으로 변하더니 그 안에서 비슈티의 털과 같은 순백의 단검이 튀어나왔다.
참멸검 마엘슈트랑.
우수한 마법사들이 만들어 낸 다중 결계로 보호받고 있던 25차원의 독재자의 목숨을 결계째로 집어삼킨 파멸의 검.
먼 옛날 현자들이 탐식의 악마를 죽이고 그 뿔로 만든 이 칼에 담긴 권능은 닿은 것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공간과 함께 먹어 치운다.
제대로 봉인하지 않으면 단검을 중심으로 반경 수십 미터의 공간 속을 흐르는 시간이 반영구적으로 정지하는 귀물.
비슈티는 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축복 덕에 일시적으로 단검의 저주에 저항할 수 있었다.
이는 그를 유일하게 목숨을 걸지 않고, 탐식검 마엘슈트랑을 사용할 수 있는 행원으로 만들어 주었다.
이를 활용해, 비슈티는 수 초 동안 홀로 정지된 시간 속을 움직일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몸에 부담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카득
아직 2초도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신의 피부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지기 시작했다.
충분히 단련을 쌓지 않았더라면 축복을 이어받았다 하더라도 꼼짝없이 단검의 힘에 먹혀 죽음을 맞이했을 터.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한 건 사실이다.
남은 건 단검으로 날아오는 로켓을 공간과 함께 이 세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뿐.
비슈티는 극심한 통증을 견뎌내며 앞으로 달려갔다.
폭발물을 처리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자신 정도는 있었다.
만일 못 본 척 넘어간다면 꼴 보기 싫은 구C와 구D의 에이스들을 한 번에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사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김지안을 구한다면 구D와의 관계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
딱히, 녀석이 유용한 인재라서 구하는 건 아니다.
군인도 아닌 녀석이 모래 해변에서 헤매는 일 없이 텐트를 조립했을 땐 조금 신기하다고 느낀 건 사실이지만 딱 그게 끝이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자신과 소속된 파벌을 위한 행동.
개인적인 감정 따윈 없다.
그렇게 자위하며, 비슈티는 홀 중앙을 가로지르는 로켓을 향해 단검을 있는 힘껏 내리쳤다.
“……?!”
아니, 내리치려 했다.
-서걱
비슈티가 단검을 휘두른 순간.
그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로켓을 벤 한 줄기 섬광.
공기 중을 가로지른 금빛 궤적이 시작된 곳은 김지안의 창구였다.
거기서부터 길게 이어진 선은 정확히 로켓의 뇌관이 심어진 부분을 절단하고 있었다.
그 끝에 보이는 건, 금빛 아우라를 두른 손바닥만 한 로봇, 콜로서스.
저게 왜 은행에 있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비슈티보다 먼저 폭발물을 처리해 김지안을 위기에서 구해 낸 건 사실이었다.
‘어떻게 움직인 거지.’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정지된 시간 속에서 콜로서스가 비슈티가 그런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추측 가능한 원인은 한 가지.
아마도 나노이의 보물인 단원자 금이 지닌 신비로운 힘과 연관이 있는 것이리라.
다만, 크라우드 펀딩과 홈쇼핑을 통해 판매된 콜로서스는 단원자 금을 동력원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즉, 저 기체가 일반적인 콜로서스가 아닌 나노이 사람들이 김지안을 위해 따로 준비한 선물이라는 뜻이다.
“…운이 좋은 놈이었군.”
위기는 지나갔다.
비록, 원했던 것처럼 직접 자신의 손으로 김지안을 죽음에서 구한 건 아니었긴 했지만.
-카앙!
비슈티가 탐식검 마엘슈트랑을 역소환하자 단검이 경비원의 몸속으로 되돌아갔다.
다시 정상적으로 흐르기 시작한 시간.
-댕그렁
놀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던 김지안은 반으로 잘린 로켓이 바닥을 구르고 있는 것을 보고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대체….”
다음 순간 김지안과 다른 은행원, 그리고 홀에 있던 고객 모두가 황금색 광채를 내뿜는 콜로서스의 존재를 발견했다.
-부릉!
밖에서 요란한 배기음이 들려 왔고, 비슈티는 그것이 암살자가 차를 타고 도망치며 발한 소리임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 * *
“곤란해졌군.”
2층 회의실.
상석에 앉은 엘라마가 관자놀이를 짚고 중얼거렸다.
폭발물 발견을 이유로 고객들을 대피시키고 경찰을 부른 지 어언 한 시간이 지났다.
콜로서스의 활약으로 불발된 로켓은 폭발물 처리반이 회수했지만, 추가적인 테러 시도가 있는지 확인한다는 이유로 경찰들이 출장소 안을 모조리 뒤졌다.
덕분에 도저히 영업이라곤 생각할 수 없게 된 상황.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은 건 정말로 다행이었지만, 백주대낮에 은행이 테러를 당한다는 건 고객들에게 불안감을 심어 주기 충분한 사건이다.
그만큼 엘라마를 비롯한 행원들은 영 안색이 좋지 않았다.
요즘 미행당하던 게 신경 쓰여서 콜로서스를 가방에 담아 오길 잘했지, 아니면 꼼짝없이 직장이 무덤이 될 뻔했다.
엘프들 정령술 대결에 휘말린 거랑 괴물 모기한테 물려 죽을 뻔한 게 엊그제 같은데, 이번엔 폭발물이 날아왔다.
은행원이면 무릇 안전한 철밥통의 대명사 같은 건데 어째서 나는 이리도 매번 생명의 위기를 겪어야만 하는 걸까.
‘문제는 이번 암살 시도가 과연 나랑 다른 행원들을 타깃으로 잡은 건지, 인데.’
이 상황에서 우리에게 원한을 품을 만한 놈이라면 잡혀간 오미나이 의원 정도밖에 없다.
다만, 아무리 그 자식이 인성에 문제가 있어도 나 개인도 아니고, 은행 출장소를 통째로 날려 버리려 하진 않았을 거다.
왜냐하면 당에서 제적당했다고 해도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출장소가 테러를 당하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건 자기 자신, 더욱 나아가 몸담고 있던 당이라는 사실 정도는 예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곳 출장소는 다른 지점보다 많은 이들의 이권이 엮인 ‘특별한 점포’니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다.
또한, 한 번 더 당의 얼굴에 똥칠했다간 출소 이후의 삶까지 파탄 날 게 뻔하다.
은행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일반 시민까지 공격할 이유가 없다는 거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역시나 하나뿐.
“솔직히 말씀해 주시죠.”
나는 옆에 앉아 있던 신혼부부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아까 은행 공격한 놈, 두 분을 노리고 온 게 아닌가요?”
“…….”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교환하고 있었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눈치.
역시, 아까 정문 앞에서 화기를 발사한 남자는 내가 아닌, 이 둘을 죽이려 한 게 틀림없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우리가 이 둘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혼란을 틈타 금고에 숨겼던 데엔 이유가 있었다.
우리가 경험한 바로, 일반적인 범죄자가 상대가 아닐 경우 키키와이의 경찰은 생각보다 무능하다.
특히나 건물에 대고 아예 RPG-7 같은 걸 쏴 버리는, 법을 법으로 여기지 않는 미친놈들이 상대라면.
25차원에서 몇 번씩이나 은행을 상대로 한 공격을 경험해 본 비슈티가 있는 이곳이 훨씬 안전할 거라고, 최소한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곳에 갇혀 있을 수도 없는 상황.
경찰은 아까부터 긴급 대피를 요청하고 있다.
여길 나가기 전까지 암살자의 배후와 기타 등등,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필요한 정보를 캐내야만 한다.
은행원의 업무라고 정의된 것 이상의 무언가를 굳이 해내려는 건 아니다.
단지, 은행을 찾아온 고객이 죽게 내버려 두는 게 싫을 뿐이다.
그리고 감히 내 직장에 폭발물을 쏴 재낀 놈들의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말해 주십시오. 두 분의 목숨을 노릴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행복한 결혼 생활을 방해할 만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지.”
이번 사건, 아니, 대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사시키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