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60화
키키와이 시내.
중심가의 횡단보도.
-피식
플루토는 당황한 김지안의 얼굴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이 남자는 모를 것이다.
그가 이곳에 도착해 자신과 오커스와 마주하게 된 것이 전적으로 설계에 의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플루토는 어제부터 분신을 보내 김지안을 감시하고 미행했다.
분신을 해제하면 쌓인 피로가 본체에게 돌아오겠지만, 동시에 만든 또 다른 분신들이 수면을 취했으니 충분히 상쇄할 수 있을 것이다.
플루토의 작전은 다양한 복장을 갖춰 입은 분신을 여럿 보내 김지안에게 미행당하는 듯한 착각을 주어 이곳으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계획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제부터 그는 누군지도 모르는 여자와 함께 식사를 해야만 한다.
플루토의 곁에 서 있는 단발 미인의 정체는 그녀의 친언니이자 차원신용금고의 은행장, 오커스 디스파테르.
즉, 행원들에게 직무권능을 나눠 준 신들 중 하나이자 김지안이 속한 조직 전체를 이끄는 자.
그런 사람, 아니, 신 앞에서 김지안이 평소처럼 행동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의 장난스러운 도발을 견디지 못하고 성질을 냈다간 어떻게 될까.
“헤헤.”
아무것도 모르는 김지안과 달리 오커스는 이미 눈앞에 선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
직접 만나 보는 거야 처음이지만 그의 한쪽 눈은 본래 오커스와 그녀의 가문이 소유하고 있던 보물이니까.
‘언니가 고른 사람은 평범한 인간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알려 줄 거야.’
자신이 받아 마땅한 친언니의 관심을 독차지한 김지안 대리.
그가 나중에 자신이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사겠다고 말한 상대가 은행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신이 은행장의 동생을 하대했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집어먹을지도 모른다.
“키힛.”
김지안이 미운 건 아니었지만 여신의 마음속에 조용히 싹트기 시작한 장난기와 심술은 유쾌한 결과를 기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뭐지?”
플루토와 그녀의 언니라는 사람과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던 와중 다시 한번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모자 쓴 누군가가 등을 돌리고 군중 속으로 사라지는 게 보였다.
모자챙이 컸던 탓에 뒷모습을 눈에 새기는 데에 한계가 있었지만, 아까 본 추격자와는 체격이 다르다.
아까 따라붙던 녀석보다 키가 조금이지만 더 크다. 선드레스를 입은 여자. 힐은 신지 않았다.
피부색은 미처 확인하지 못했지만 일단 뒷모습을 눈에 새겼다.
나중에 보이면 적당히 도망치든 끌어내든 해야겠다.
“갑시다. 줄 안 서도 되는 괜찮은 가게가 있어요.”
“대리님, 나 고기가 더 좋아.”
“…….”
“죄송합니다. 동생이 또 실례를. 식사는 제가 대접하도록 하죠.”
“괜찮아요. 기왕 이렇게 플루토 씨도 만나고 그랬는데 한 끼 정도는.”
이 두 사람 덕에 미행하던 놈들이 내게 해코지를 가할 가능성이 낮아지는 건데 밥값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다.
이따 조용히 엘라마든 아이작이든 도움을 구하든가 해야겠다.
별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 * *
“하아… 나 진짜 뭐 하는 짓이지.”
김지안이 웃으며 은행장과 대화하는 광경을 쳐다보다 돌아선 밀라는 알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은행장과 행원.
밖에서 마주친다 해도 분명 업무에 관한 일일 텐데.
그런데 어째서, 가슴 한켠이 이리도 불안해지는 걸까.
“왜 행장님이 키키와이에… 그리고 옆에 저 사람은 또 누구….”
은행장 옆에 있던, 옆모습이 조금 닮은 분홍 머리 여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인사부 소속인 밀라는 어지간한 요직을 맡은 행원들의 얼굴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방금 김지안과 행장 곁에 있던 젊은 여자는 수행 비서가 아니었다.
구D의 간부 중 행장처럼 젊은 외모를 유지하는 특별한 종족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중 저렇게 생긴 사람은 없었다.
김지안의 사생활에 관해 자신이 간섭할 이유는 없지만 우연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마주치고 만 탓에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조금이지만 외관이 닮았어. 행장님의 가족? 그렇다면 대체 왜 지안 오빠랑 같이 있던 거지. 설마….”
밀라의 해마는 본점에서 주워들은 한 가지 소문을 기억해 냈다.
김지안이 행장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
그가 특채로 뽑힌 데엔 행장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소문 말이다.
“사적인 관계… 그렇다면.”
행장이 설마 김지안과 자신의 가족 사이에 다리를 놓아 준 걸지도 모른다.
“근거는 없지만….”
밀라는 여자의 직감이라는 것에 꽤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는 몇 번이나 직무권능의 도움 없이도 행내 불륜 커플을 찾아내곤 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흐르는 묘한 공기를 감지해내는 건 나름 특기라고 자부하고 있을 정도였으니까.
“수상해….”
최근 들어 밀라가 선배들에게 배우기 시작한 각종 기술 중엔 입술의 움직임을 읽는 독순술도 있었다.
왜 은행원이 그런 기술을 익혀야 하는지는 처음엔 의문이었지만, 여러 민감한 내용을 다루는 인사부의 특징상 행내에 도는 소문 등을 캐치하는 데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김지안의 경우 위성 통신이 중계하는 마법이 자동으로 3-1차원의 언어를 이쪽 세상의 말로 통역해 준다.
고로,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걸 봐도 무슨 말을 하는진 알 수 없다.
하지만 범차원 세계에 속한 차원 태생의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해도 무슨 얘길 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이번엔 아쉽게도 채 몇 초도 관찰하지 못한 탓에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밥 먹으러 가는 거 같은데. 오빠가 사는 거 같고….”
밀라는 저 셋 중에서 제일 지위가 높은 행장이 밥을 사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민했다.
아무래도, 김지안이 스스럼 없이 밥을 사 주고 접대할 정도로 세 사람은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 상황.
“으으… 설마 벌써부터 행장님이랑 사적으로 만나고 다닐 줄이야. 지안 오빠 야망이 너무 큰 거 아니야?”
어째서일까, 밀라는 묘한 배신감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왜 나한테는 안 말해 준 거야… 진짜. 동기 중에선 제일 친한 줄 알았는데….”
밀라는 지금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보이는 모든 것이 눈에 거슬리는 기분이었다.
“역시, 남자들이 약았어. 행장의 가족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 행내 권력의 중심부로 파고들 생각이겠지? 아… 짜증 나. 아무리 결혼이 현실이라곤 해도 사랑 하나 보고 상대를 정하는 로맨티스트가 한 명쯤 있어도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김지안이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언젠가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걸.
“…하아. 오빠가 좀 연애 면에선 순박할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밀라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딱히 김지안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품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업무를 진행함에 있어 은행원으로서 고객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라면, 높은 이상을 품고 있는 그라면.
이성과의 관계 역시 남들보다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할 거라는, 그런 막연한 환상을 품고 말았다.
“따, 딱히 내 남자만 아니면 상관없는 거잖아. 그냥 실망했을 뿐이야.”
그런 소리를 하면서도 밀라의 시선은 어느샌가 기동한 스마트폰의 지도 앱에 고정되어 있었다.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상점가로 전진.
기껏 아름다운 열대 섬으로 여행을 왔는데 그냥 들른 김에 잠깐 만날 입행 동기 탓에 기분을 망치긴 싫었다.
그래도, 의리라는 게 있지.
“아아 짜증 나!! 초콜릿까진 내가 주고 간다!”
빠른 걸음으로 이동한 밀라가 도착한 곳은 100년 전의 고풍스러운 식민지 양식 건물이 줄지어 선 거리였다.
하지만 겉보기만 오래된 건물일 뿐, 입점해 있는 건 갖은 유명 브랜드의 가게였다.
의류, 생활용품, 기타 등등.
그리고 주위를 살피던 밀라는 마침내 거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가게를 발견했다.
<메종 데 레오니아브>
<바이나우스>
그레이트 후리텐의 초콜릿 업계를 지배하는 두 명품 브랜드.
오랜 역사만큼이나 드라마틱한 경쟁 구도와 그 속에서 태어난 과격한 언사로 유명한 두 브랜드의 이야기는 꽤나 유명했고, 밀라 역시 이를 들은 적이 있었다.
레오니아브와 바이나우스는 모두 대대로 두 가문이 지배하는 가족 경영 회사였고, 두 가문은 서로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치를 떠는 라이벌이자 앙숙.
편집증에 가까운 경쟁심 탓에 둘은 무조건 가까운 위치에 가게를 열어 상대를 견제해 왔다고 알려졌는데 역시나 이곳 키키와이에서도 그 영역 다툼은 진행되고 있는 중인 듯했다.
하나의 거리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두 브랜드의 직영점.
경쟁이 격렬한 만큼 두 브랜드의 초콜릿은 끊임없이 진화해 왔다.
결과, 그들이 제작한 수제 초콜릿은 모든 차원의 고객들을 매료시키고 있었다.
아기자기한 외관과 다양한 향을 갖춰 초콜릿의 한계를 뛰어넘은 메종 데 레오니아브.
적은 숫자의 감미료만을 사용하지만 최고의 제작 공정을 거쳐 초콜릿 본연의 풍미를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데에 정평이 있는 바이나우스.
두 방향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수제 초콜릿의 명문가.
두 브랜드의 직영점 사이에 선 밀라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거리를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두 가게는 짧은 계단 위로 보이는 장엄한 입구와 간판으로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각자 화려함과 풍부함으로 대표되는 수제 초콜릿의 양대 산맥.
한동안 어느 쪽을 골라야 할까 고민하던 밀라는 가게 앞에 생겨난 구매자 대기열의 길이가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으아아. 어떡하지. 못 고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두 가지 전부 선물하고 싶었다.
선택 장애에 빠진 밀라는 잠시 후 레오니아브의 대기열 제일 끝에 섰다.
하지만 여전히 고르지 않은 쪽에 미련이 남았던 밀라는 기어코 줄이 줄어들어 자신의 차례가 다가온 다음에도 길 건너편의 바이나우스의 직영점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 가지 묘한 점을 발견했다.
“…어?”
두 가게를 번갈아 보다 깨달았다.
갖은 색의 초콜릿이 진열된 레오니아브의 유리창 앞에 선 여자가 하나.
다크엘프의 시력은 일반적인 인간보다 훨씬 뛰어나다.
1km 너머에 보이는 나무막대에 새겨진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밀라의 눈은 명찰에 새겨진 직함의 이름을 놓치지 않았다.
밀라가 먼저 본 건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성 점장.
점장의 시선은 길 건너편 가게 유리창에 고정되어 있었다.
“…….”
저도 모르게 호기심에 같은 방향을 쳐다본 밀라의 눈에, 이번엔 또 다른 누군가가 비췄다.
바이나우스의 투명한 진열장 너머,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가 한 명.
다른 모든 직원들이 분주하게 업무를 보는 와중에도 두 사람만은 가만히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이 엄청 안 좋나 보네.”
그러다 잠시, 궁금해졌다.
경쟁 업체 오너끼리 사이가 나쁜 게, 종업원들의 관계에도 이렇게나 큰 영향을 끼치는 걸까.
“하긴, 우리도 합병 전엔 저랬겠지.”
차원신용금고의 전신인 세 은행은 합병 전에도 지금도 그리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하니 이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하면 되는 걸까.
계기는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흠.”
대리가 되면서 진화한 직무권능의 힘.
타인의 감정을 읽는 밀라의 능력은 더욱 강화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행원 배지를 착용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본점의 은행원 외의 누군가에게 직무 권능을 사용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것은 그저 작은 변덕의 결과.
-지잉
밀라는 두 가게의 점장에게 권능을 사용했다.
두 사람의 사이를 잇는 화살표.
그 색깔은 혐오나 경쟁심을 나타내는 검정이나 노란색이 아니었다.
“…왜?”
두 사람의 사이를 잇는 화살표의 색깔은 선명하고 진한 분홍색.
가장 강렬한, 사랑의 색깔이었고.
<미놀리 레오니아브>
<아디젠 바이나우스>
두 사람의 명찰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초콜릿 명문가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헐. 저건 또 뭐야…?”
밀라가 목격한 두 사람이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다차원 출장소를 찾아가 김지안에게 신혼부부 디딤돌 대출을 신청하는 건 이틀 후의 일이었다.
이때까지 밀라도, 그 누구도, 출장소가 또다시 큼지막한 사건에 휘말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