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57화
“와….”
상자를 연 김지안은 경악에 말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안에 들어 있던 건 익숙한 외장갑을 장착한 콜로서스.
“실물인가?”
내용물은 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전쟁 영웅 아프로 사스가 탑승했던 콜로서스 MK-2와 합체에 동원되었던 파츠들이었다.
“…시그니처 모델인가, 이거.”
레이저로 각인된 파일럿의 서명.
소유자인 김지안의 이름 역시 거기에 적혀 있었다.
“에이, 미쳤다고 진짜를 줬을까.”
김지안은 자세히 콜로서스를 살펴보았다.
“역시.”
저번 촬영 때 보았던 기체와 외관상의 차이는 없지만, 그것보다 약간 크기가 작았다.
실물과 거진 흡사하게 만든 물건, 흔히 레플리카라 불리는 것이었다.
“진짜로 마크2 온 줄 알았네….”
김지안은 안도함과 동시에 작은 실망을 느꼈다.
애초에 진짜 마크 2를 사우 박사가 선물했다면 부담스러워서 받지도 못했겠지만, 잠시라도 실물인가 싶어 놀랐던 사실이 부끄러워졌다.
새삼, 혼자 있을 때 택배를 열어서 다행이라고 느낄 따름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면 민망했을지도.
“너무 비싼 걸 받은 거 아닌가….”
김지안은 천천히 매끄러운 기체의 표면을 살펴보았다.
외부 장갑의 이음새 사이로 보이는 가동부가 광택을 발하고 있는 게 티 나지 않는 부분까지 꼼꼼하게 정밀 가공을 마친 듯했다.
잠시 살펴보기만 해도 느껴지는 고급스러움.
단순한 로봇 피규어가 아닌, 예술품이라고 불러도 좋은 비주얼.
비단 서브컬처 팬덤만이 아닌 보는 이들 모두를 감탄케 하는 디테일이 깃든 콜로서스는 문외한이 보아도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레플리카라고 해도 이번 전쟁을 통해 수많은 팬들을 거느리게 된 아프로 사스의 탑승기.
영화나 만화로 치면 주인공이 타고 다니는 로봇이다.
당연히 일반적인 양산형 기체와 비교할 수 없는 비주얼과 성능을 지니고 있으며 희소가치 또한 엄청날 터.
“귀한 걸 받아 버렸네.”
수집가들에게 팔면 상상 이상의 금액을 손에 넣을 수 있겠지만, 김지안은 어지간해선 이걸 팔 생각이 없었다.
-큐귯!
같이 쉬고 있던 정령들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가와 김지안이 바닥에 세운 콜로서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했다.
개중 몇몇은 기체의 어깨 위에 올라타거나 콕핏을 열어 안에 자그마한 몸을 욱여넣으려 시도하는 등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장난감을 갖고 노는 중이었다.
“어허, 그만. 고장 나면 어쩌려고.”
김지안은 조심스럽게 정령들을 엄지와 검지로 집어 옮겼다.
신기하게도 불의 정령을 집었는데도 전혀 뜨겁지 않았지만, 신경은 쓰지 않기로 했다.
“박사님도 참. 이런 거 안 챙겨 주셔도 되는데.”
말은 그렇게 하고 있지만 김지안의 얼굴에선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은행원이 대출을 받아 간 고객에게 선물을 받는 건 외부에서 봤을 때 썩 도덕적인 일이 아니다.
다만, 고대 엘프가 보낸 스마트폰 케이스도 그렇고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귀한 물건을 보내 버리면 돌려줄 방법도 없고 성의를 무시하기도 어려운 법.
“그래. 내가 이런 걸 바라고 대출을 승인한 게 아니니까….”
뇌물이 아니다.
김지안은 자신을 설득하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설명서 같은 것도 있으려나.”
과연, 있었다.
동봉된 사용 설명서에는 어떤 방식으로 콜로서스를 움직이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하는지, 그 외에도 어떠한 부분에 주의해 관리해야 하는지 자세히 적혀 있었다.
“흠… 프라모델 같은 것보다 확실히 복잡하긴 하네….”
아무래도 장난감이 아니라 우주 괴수와 마주치는 등 한정된 상황이라곤 해도 살상 능력을 발휘하는 물건.
특수한 합금을 사용하고 있는지라 녹이 스는 일은 없겠지만, 주기적으로 관리해 줄 필요가 있는 모양이었다.
“어라.”
그런데, 안에 든 걸 전부 꺼냈다고 생각했던 상자를 치우던 도중 달그락대는 소리가 났다.
구석으로 손을 뻗어 보니 반듯한 봉투가 하나 들어 있었다.
“이건….”
안에 들어 있던 건 나노이 연방의 인장이 뚜렷하게 새겨진 실링 왁스가 찍힌 편지였다.
“사우 박사님도 세심하시지. 0.1차원 규격도 아니고 내가 읽기 쉬운 크기로 편지까지 쓰시고―”
-우웅!
다음 순간, 편지를 펼치자마자 허공에 쏘아지는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
김지안이 받은 건 평범한 편지가 아니었다.
<서프라이즈! 놀랐죠?>
녹음되어 있던 목소리가 편지지를 진동시키며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바빠서 잠시 연락 못 드렸지만, 저는 도움을 받고서도 아무 성의를 보이지 않는 염치없는 여자가 아니랍니다.>
안경을 벗고 평상복 차림을 한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은 다소곳이 다리를 모으고 의자에 앉은 채 김지안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총기 어린 두 눈에는 천진난만한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어서인지 한결 편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20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태양계를 대표해 업무에 찌들어 살던 천재 공학자.
그런 그녀의 마음속에 숨어 살던 작은 아이가 문득 고개를 내민 것처럼 보이는 광경이었다.
<지안 씨, 로봇 얘기할 때 엄청 좋아하는 게 눈에 보이더라고요. 뭐랄까, 소년 같다고 해야 하나?>
거기까지 말하던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이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큼큼. 이런 말을 하려 한 건 아닌데. 쨌든, 전 지안 씨한테 멋진 선물을 드리고 싶었어요… 아, 으아아. 저뿐만이 아니에요! 이건 그, 나노이를 대표해서 드리는 거라고 해야 하나….>
평소의 차분하고 지적인 모습과는 조금 다른 사우 박사의 언행에 김지안은 적잖게 당황했지만 마저 차분히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감사의 마음을 담아 보내는 거니까 부담 갖지 말아 주세요. 아, 그리고 제가 개인적으로 보내는 선물도 들어 있을지도…! 그, 그럼 편안한 한 주 되시길!>
다만, 딱히 그 후에 중요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저 평소보다 배는 신이 난 얼굴로 사우 박사가 웃으며 짤막한 인사를 건넸을 뿐.
하지만 그녀가 전한 감사의 메시지를 들은 김지안은 마냥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이번 사태를 해결하는 데에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한 건 사실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모르고 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은행원은 그저 필요할 때 돈을 빌려주는 존재.
당사자들 외에는 누구도 이번 사건의 배후에서 그들이 암약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플랫 샤펜도라의 대출 신청을 접수한 후, 카메라 앞에 서게 된 건 어디까지나 몇 가지 우연이 겹친 결과.
김지안 역시 이를 딱히 특별하게 여긴 적이 없었고 0.1차원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공로를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대출을 받아 간 사우 박사의 메시지는 어째서 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걸까.
“조금 쑥스러울지도.”
숙연해진 얼굴로 편지와 기체를 번갈아 보는 김지안.
정령들은 얼굴을 들어 빤히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기이잉!
그때였다.
수줍게 손을 흔들던 사우 박사의 홀로그램이 사라진 지 수 초도 지나지 않아 콜로서스가 들어 있던 상자의 하단부가 서랍처럼 튀어나왔다.
“뭐지.”
평범한 골판지 상자라고 생각했던 물건에 비밀 서랍이 달려 있단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김지안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서랍에 든 건, 콜로서스의 모습으로 정교하게 조각된 손가락만 한 초콜릿.
“와… 이거 아까워서 어떻게 먹냐.”
김지안은 모르고 있었다.
때는 4월 31일.
3-1차원의 지구의 몇몇 국가에서 호감을 품은 이성에게 초콜릿을 주며 기념하는 발렌타인 데이인 것을.
이쪽 차원에서도 날짜만 다를 뿐,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 * *
-치이이이!
활주로를 비상하는 항공기의 엔진음이 울려 퍼지는 키키와이 차원 공항.
황금연휴를 일주일 앞둔 주말 오전.
인사부의 막내, 미모의 다크엘프 밀라 레브리에 대리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쓰고 화창한 햇빛이 쏟아지는 터미널 1층을 걷고 있었다.
“얇게 입고 안 왔으면 큰일 날 뻔했네.”
린딘의 봄 날씨와 확연하게 비교되는 키키와이의 기후.
아무리 밀라의 성격이 덜렁대기 쉽다지만, 이곳 키키와이가 열대 지방이라는 사실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후우.”
처음 타는 비행기.
이국의 공기와 섞인 바다 향기.
그리고 바람을 힘껏 들이마셨다.
밀라가 이 시기에 큰맘 먹고 휴가를 쓸 수 있던 건 그녀를 아끼는 다른 인사과 행원들의 배려.
그리고 저축을 생활화하던 사람이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과 7성급 호텔 더 래리어트 키키와이의 객실을 예약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패키지 싸서 다행이다….”
밀라는 자신이 타고 온 비행기의 쾌적한 좌석을 떠올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은행원이 비교적 높은 월급을 받는 직종이라고 해도 첫 휴가 때 정상적인 가격을 지불하고 키키와이 3박 4일 여행을(심지어 7성급 호텔에 묵고 비즈니스 클래스 항공권을 왕복으로 결제하면) 가는 건 부담스러운 법이다.
하지만 김지안을 비롯한 여러 은행원과 그들의 주변 인물의 활약으로 인해 키키와이 한정판 호화 여행 패키지는 고작 정가의 10%.
덕분에 밀라는 큰맘 먹고 카드를 긁을 수 있었다.
물론, 나노이의 구원과 추가적인 혜택을 위해 콜로서스를 결제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딱히 로봇에 흥미가 없어 어린 사촌 동생에게 선물하긴 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돈은 값진 일에 사용되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밀라는 만족하는 중이었다.
다만, 공항을 나와 택시를 잡으러 가는 그녀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맞다… 보냉팩.”
가방 안에 담아 둔 내용물이 이 섬의 기온에 녹게 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떠올린 밀라의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갔다.
“…안 녹았으려나. 이 정도 날씨면 녹았겠지…?”
택시에 타기 전 캐리어를 열어 안을 확인한 밀라의 입에서 긴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힝, 어떡해….”
밤을 새워 가면서 직접 만든 초콜릿은 녹아 문드러져 원형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번 주는 여성이 친밀한 남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성 팔란티니의 절기.
일부러 김지안에게 주려고 만든 건 아니었다.
그냥, 이번 일로 너무 수고가 많았을 것 같아서.
한 세상을 구하기 위해 김지안이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는 걸, 자신만은 알고 있다고.
단 거라도 먹으면서 같이 이런저런 얘길 하자고.
여행 온 김에 차라도 한잔 마시자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눈앞에 나타나, 놀래켜 주고 싶었는데.
만나고 싶었는데.
“흐아앙.”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밀라는 택시에 올라탔다.
“기사님! 그랜드 래리어트 키키와이로 가 주세욧! 최대한 빨리요….”
“네, 금방 모시겠습니… 손님 무슨 일 있으세요?”
-도리도리
“…….”
숨 막히는 정적.
기사는 말없이 차를 몰기 시작했다.
밀라가 부탁한 대로 빠르게, 그리고 조용하게.
“그래, 나는 사회인이라고. 돈으로 해결하면 돼.”
밀라는 계획을 변경했다.
체크인을 마치면 곧바로 쇼핑하러 출발할 것이다.
검색해 보니 후리텐의 고급 초콜릿 메이커 중에서도 정점을 다투는 두 브랜드의 매장이 키키와이 시내에 위치한 모양이었다.
열대 기후에 정성스럽게 준비한 초콜릿이 녹아내렸다면, 돈을 써서 성의를 보이면 된다.
“까짓거 초코가 비싸 봤자 얼마나 하겠어! 다 사 버릴 거야!!”
정신병자를 보듯 백미러 너머로 자신을 주시하는 택시 기사를 무시하고 밀라는 소리쳤다.
취업 1년 차 은행 대리의 연봉과 신용 카드가 있다면, 고급 초콜릿 따위는 결코 두려워할 상대가 아니었다.
-뚜루루루루
용기를 쥐어짠 밀라는 잠시 심호흡을 한 다음 김지안에게 전화를 걸었고, 이내 통화가 시작되었다.
“어! 지안 오빠! 저예요! 밀라! 네? 내일 퇴근 후에 시간 돼요? 아, 휴가구나! 완전 잘됐네요! 갑자기 왜 그러냐고요? 후후. 왤 거 같아요?”
하지만 밀라는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 아닌데? 저 린딘인데 지금? 왜냐니 갑자기, 그야… 으음… 그냥 오랜만에 잘 지내는지 궁금해서―”
그녀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연인과 가족, 친구에게 줄 초콜릿을 구하기 위해 가게 앞에 기나긴 행렬을 이어 갈 거란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