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4화 (4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44화

두 시간 전.

영업이 종료된 차원신용금고 키키와이 출장소.

정규 행원들이 모인 소장실에선 두 시간 내내 긴급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직도 재밍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엘라마가 허탈하게 웃으며 서류철을 책상 위에 내던졌다.

-파사악!

사방으로 흩어지는 이면지. 그 위에는 차원신용금고 본점의 정보통들이 보내 준 기밀 정보가 적혀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강경파의 로비를 받은 정계 거물들의 방해가 지속 중. 익명으로 진행 중인 차원 관문 부근의 전파 재밍을 막을 방법은 많지 않을 것으로 추측됨.]

“경찰 새끼들까지 매수당해서 재밍이 단순한 차원 역장의 영향이라고 보도가 나오고 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지.”

“다른 차원에 사는 이들의 목숨보단 당장의 안녕과 지지율이 중요하다… 이거군요.”

지독할 정도의 님비nimby.

사실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다.

보통 정치가에게 있어 중요한 건 자신의 이득, 국익, 그리고 안보다.

물론, 세 가지 중 첫 번째만을 중요시하는 놈들이 많긴 하지만.

나노이에서 산출되는 단원자 금이 아무리 귀하다 해도, 그곳의 기술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우주 괴수가 자기들의 차원으로 진입하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0.1차원 태양계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가는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엔 나노이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던 이들조차 그들이 실질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목소리가 작아졌다.

아무리 정치가 짐승의 길로 군자의 뜻을 행하는 학문이라 하지만 이건 군자의 뜻 같은 게 아니다.

우주 괴수에 물리는 게 두려우니까.

지지율이 떨어질까 봐.

시민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폭동이 일어날까 봐 무서우니까.

그래서 놈들은 사람들의 귀를 막고 눈을 가렸다.

‘세상을 지키기 위해서’ 같은 같잖은 핑계를 대고, 폭탄을 터뜨려 우주 괴수를 날려 버리기 위해.

그들은 이 모든 과정에서 사라지게 될 수많은 목숨을 고귀한 희생이라고 추켜세울 생각이다.

원한 적 없는 죽음을 향해 몰아세우려는 주제에.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군요.”

인간이라면 당연히 갖고 있는 마음가짐.

본인의 것을 소중히 여기는 거야 어쩔 수 없다 치자.

하지만 폭탄을 터뜨려 우주 괴수와 함께 0.1차원을 멸망시키겠다는 미친 발상은 대체 어느 자식의 머리에서 나온 걸까.

그건 군자의 뜻이 아니다. 집정자로서 내려야 할 결단도 아니다.

겁쟁이.

그것도 지독할 정도로 비열한 놈들이 할 법한 결정.

하지만 고작 한 명의 은행원에 지나지 않는 나의 힘으론 이 거지 같은 상황을 뒤집을 수 없다.

우리에게서 돈을 빌려 간 고객들이 무사히 자신들의 별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데.

“…….”

어찌 됐든 끝까지 해 보는 수밖에.

돈을 빌려줬다고 모든 책임을 다한 건 아니다.

담당자로서 나는 승인된 대출금이 상환될 때까지 지켜보고 필요한 도움을 주어야만 한다.

“직면한 문제 중 가장 해결이 시급한 건 재밍이 파일럿들의 안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입니다. 이게 해결되지 않으면 콜로서스 로보틱스는 계속해서 가용 전력을 잃게 될 겁니다.”

지금 나노이 사람들이 전파 재밍에 골치를 썩고 있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앞서 말했듯이 나노이 사람들의 목소리가 다른 차원에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나노이 태양계에 사는 사람들은 절대 고귀한 희생양으로서 자신들의 삶을 끝내길 원하지 않는다.

0.1차원의 태양계인 수십 수백억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육신과 감정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한 다음 얼굴도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우주 괴수들과 동귀어진할 리가 없다.

만일 정말로 저번에 공개된 가짜 현지인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믿는 놈이 있다면 지능이 모자라거나 믿고 싶은 것만 보는 머저리겠지.

0.1차원에서 직접 건너온 사우 박사가 현지의 상황을 전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판이니 답답할 따름이다.

다만, 사실 나노이 사람들의 생생한 구조 요청이 이쪽 차원에 전해진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애초에 이쪽 생명체들이 조그마한 0.1차원에 간섭하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니까.

하지만, 전파 재밍을 중단시킴으로써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중대한 이득이 하나 있다

“전파 재밍이 이어지는 한 파일럿들은 직접 콜로서스에 탑승해야 합니다. 자원과 생산 체제만 갖춰지면 양산 가능한 콜로서스와 달리 파일럿을 잃을 경우 전력에 반영구적인 손실이 발생합니다.”

내가 읊은 건 나노이 측 군사 전문가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재생산이나 수리가 가능한 콜로서스와 달리 콜로서스 파일럿은 소수의 고급 인력이자 대체가 불가능한 ‘자산’이다.

비행선을 타고 이쪽으로 건너온 콜로서스 파일럿은 모두 오랜 훈련 끝에 능숙하게 콜로서스를 조종할 수 있게 된 이들뿐이다.

그들을 육성하는 데 나노이가 들인 시간과 노고, 그리고 자금은 콜로서스와 비할 바가 아니다.

파일럿 없이 콜로서스를 움직이는 방법은 전적으로 AI에 의지하는 것뿐인데 AI는 전장에서 절대 숙달된 파일럿만큼의 퍼포먼스를 낼 수 없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콜로서스의 인공 신경망과 공명한 파일럿의 두뇌가 고성능 전투용 AI를 아득히 뛰어넘는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일 그런 파일럿이, 매번 전투마다 직접 콜로서스에 탔다가 우주 괴수에게 당해 부상을 입거나 사망한다면?

생긴 것만 봐도 알 것 같지만 모기를 닮은 우주 괴수의 번식력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놈들이 우화해 성체가 되는 속도와 새로운 파일럿이 배출되는 속도를 비교하는 건 불가능하다.

만일 계획대로 파일럿을 계속 전투에 투입한다 해도 그건 군인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 멸망을 뒤로 미루는 소모전이 될 뿐, 절대로 괴수들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전파 재밍을 막을 수만 있다면.

파일럿들은 괴수들이 떠도는 우주 공간이 아닌 안전한 장소에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콜로서스가 파괴된다 해도 그들은 새로 투입된 다음 기체를 움직여 적들과 맞설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말할지도 모른다.

이런 건 군인과 기술자에게 맡겨야 한다고.

은행원이 낄 자리가 아니라고.

하지만 예정된 손실에서 고객의 자산을 지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의 일이다.

“그래. 통신을 방해하는 놈들만 없다면 나노이가 이번 전쟁에서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르지. 크라우드 펀딩이 성공할 거란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피곤한 얼굴의 엘라마가 자신의 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말했다.

“전쟁은 내 전문 분야가 아니긴 해도 때려 박을 수 있는 자금이 많으면 세상의 모든 분야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지지.”

“정상급 디자이너들이 3-1차원에서 이미 한 번 상업성이 검증된 로봇들을 참조해 외부 장갑을 설계했다. 그리고 나노이의 안타까운 상황에 사람들은 공감하고 있어.”

“지갑을 여는 데에 필요한 명분과 욕망,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상황이다. 콜로서스를 대량 생산할 자금은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거다. 그러니까 남은 건―”

파일럿을 죽지 않게 만들면 돼.

그렇게 말하는 엘라마의 눈은 차분했다.

동정심이나 공감이 아닌 은행가의 차가운 탐욕이 그의 눈동자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전쟁은 기회다. 상대가 같은 지성체가 아니고 정복할 수 있는 땅이 없더라도 그 과정에서 반드시 돈은 움직이지.

이겨 봤자 얻을 게 없던 불모한 싸움이 김지안의 아이디어 하나로 만민이 참가할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로 변했다. 결과, 이사회도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게 되었고.”

이사회.

그 단어를 강조하며 엘라마는 라즈마와 비슈티 과장을 차례대로 노려보았다.

“김지안 대리가 우주 괴수에 물린 이야기가 퍼진 건 구C의 지시인가? 아니면 구D?”

“…….”

“……”

둘은 아무 말이 없었다.

“양쪽 전부였나 보군. 도와주진 못할망정 이런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견제나 하고 있다니. 윗대가리들이 어지간히 무능한 모양이야.”

내가 우주 괴수에게 물린 게 내부에서 새어 나간 정보라는 건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확인하니 뒤통수가 더 아려지는 기분이었다.

“과장님 두 분이 근속 1년도 안 된 대리 괴롭히는 꼴 보니 기가 막히네요. 사표 제출하겠습니다. 못 살겠네요. 유서엔 직장 내 괴롭힘 가해자로 두 분 이름 적어 두는 거로 하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비슈티와 라즈마 과장이 일제히 시선을 이쪽으로 돌렸다.

둘은 감히 대리 나부랭이가 타 파벌의 에이스인 자신들에게 협박을 날릴 거라곤 예상치 못한 듯 노골적으로 당황하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뒤돌아 소장실을 나서려 했는데 옆에서 가만히 사태를 관망하고만 있던 아이작이 날 붙잡았다.

“김지안! 그만해!”

“이거 놔! 나 레고 삼키러 갈 거야!”

아니, 이 새끼는 왜 장난을 다큐로 받아들이는 건데. 옘병.

“바이바이, 대리님.”

참고로 내가 아이작과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플루토 씨는 해맑은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디 농담 같지도 않은 소리 늘어놓고 있어.”

보다 못한 엘라마가 한 손으로 내 정장 목덜미를 잡은 채 질질 끌어 의자에 앉혔다.

마른 체구인데 생각보다 힘이 세다, 이 인간.

“소장님도 추가할 겁니다. 각오하십시오.”

진정된 척 엘라마와 시선을 교환한 다음 과장들의 안색을 살폈다. 물론 라즈마에겐 안색이라고 부를 만한 게 없었지만.

“이사회는 이미 크라우드 펀딩에 기업 후원자로 참가하겠다고 만장일치로 결정했다.”

두 과장은 확인을 위해 30초가량 스마트폰을 만지작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구D가 또 다른 실적을 내는 걸 견제하려 한 각 간부가 내린 지시는 그들의 위에 군림하는 동 파벌의 이사회 멤버에 의해 취소되었다.

은행에서 통용되는 법칙 중 가장 유명한 것을 꼽자면 부하의 공로가 상사의 것이 되고, 상사의 책임이 부하의 것이 되는 것이 있으리라.

“너희에게 방해 공작을 지시한 간부는 지금쯤 꼬리를 내리고 있을 거다. 어쩌면 조만간 좌천될지도 모르겠군.”

이번 일을 누가 지시했는진 알 수 없지만 그 책임을 지는 건 아마 직접 비슈티와 라즈마에게 지령을 내린 이들이 될 거란 건 뻔했다.

두 과장이 덤터기를 쓰지 않을 거라고 내가 확신한 이유는 간단하다.

저들은 구C와 구E 출신의 실무진 중 최고의 역량을 지닌 대체가 불가능한 인재이자 다차원 출장소에 심어 둔 각 파벌의 얼굴.

시킨 일을 했을 뿐이니 파벌의 우두머리에게 문책을 당하는 일은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의 방탄유리가 모든 공격을 막아 낼 정도로 단단한 건 아니다.

만일 구D 측에서 두 사람의 행동이 은행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징계를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탄탄한 커리어를 쌓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고 올라가는 둘은 인사부에 보관된 자신들의 서류에 그 어떠한 오점도 남기고 싶지 않을 터.

엘라마와 나는 굳이 사전에 협의할 필요 없이 직감적으로 이 점을 노리고 둘을 협박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무언가 큰 오해가 있는 모양이오. 나는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았소. 기자에게 김지안 대리가 물렸다고 제보한 적 없고.”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한 번 죽은 목숨이지만 누명은 여전히 달갑지 않군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발뺌하는 과장들을 보고 엘라마는 쓰게 웃었다.

“그래. 네놈들이 증거 같은 걸 남겨 둘 정도로 허접했다면 내가 애초에 뽑지도 않았을 거야.”

-짝

그러고는 예고 없이 손뼉을 강하게 쳐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음침한 짓거리를 한 건 마음에 들진 않아도 네놈들을 고른 건 나다. 지금은 다차원 출장소의 모든 역량을 모아 이번 사태에서 이득을 취해야만 한다. 네놈들을 문책하는 건, 이번 사태가 해결된 다음으로 미뤄도 되겠지.”

과장들은 제각기 딴청을 피우는 척 엘라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럼 나는 겁 없는 햇병아리 1년 차 대리답게 굴어 볼까?

“혹시 못 알아들으실까 봐 소장님 말씀을 풀이해 드리겠습니다.”

최대한 얄미운 얼굴로.

호랑이 권세를 빌어 깝죽거려 주도록 하자.

“순순히 협조하시면 별일 없이 넘어갈 수 있을 거랍니다.”

X되기 싫으면 눈치껏 기어라 이 말이야.

“전문가인 네가 이번 사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지는군. 불파사 비슈티. 오랫동안 전장에 있던 너라면 이 전파 재밍, 어떻게 대응할지 판단이 서겠지.”

자신을 지목해 쐐기를 박은 엘라마의 질문.

전직 군인, 현 은행원인 불파사 비슈티는 천천히 실눈을 뜨고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닌 문제인데, 과하게 골치를 썩고 계신 듯하오. 뭐, 출장소의 실적을 위해서라면 슬슬 내가 나서는 것도 나쁘지 않겠소.”

말을 마친 비슈티는 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 내게 던졌다.

“허어….”

적혀 있던 건, 전파 재밍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이고 유일한 방법이었다.

“언제 이런 걸….”

“젊은 군인의 목숨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두는 건 에라스무스요정은행의 정신에 어긋나오. 먼저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이로서 책임을 다하려 할 뿐이니 착각하진 마시오.”

그렇게 말한 비슈티의 얼굴엔 옅은 미소가 보이고 있었다.

“군복을 벗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전쟁을 치르고 있소. 총에서 돈으로, 쥐고 있는 무기가 변했을 뿐.”

미노타우로스는 군복을 벗은 다음에도 변하지 않았다.

아프로 중위와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오랜 시간 동안 군에 몸을 담고 수많은 사선을 넘어왔기 때문에.

“통신을 차단하는 것 말곤 할 줄 모르는 아마추어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알려 주겠소. 잘 보고 배우길 바라오.”

권총에 소음기를 장착하는 그의 눈에선 차가운 살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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