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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38/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38화

래리어트 호텔은 그 명성답게 언제든 어떤 상황에도 대처 가능한 뛰어난 역량을 지닌 스태프들을 데리고 있었다.

그들은 0.1차원에 사는 지적 생명체들이 일반적인 크기의 사람을 위해 준비한 침대에서 자다 매트리스의 섬유 사이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최대한의 준비를 해 두고 있었다.

<훌륭하군요. 고전적인 디자인이지만 이용자를 극한까지 배려한 공간과 서비스입니다.>

허공에 투사된 홀로그램 메시지는 그가 단말기로 물컵에 들어가 연료를 충전 중인 비행선을 원격으로 조종해 쏘아 낸 것이었다.

그는 지금 부하와 수행원들을 데리고 스위트룸 창가에 준비된 0.1차원 거주자용 초초초초소형 스위트룸 캡슐 여러 채 안으로 들어가 쉬고 있었다.

0.1차원의 너무너무 작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 특수한 공간은 래리어트의 스위트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구현한 곳이었다.

‘곳’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기엔 저 방을 쌓아 올려 호텔을 만들어도 내 머리카락 한 올만 한 크기도 안 되지만.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여기로 정하길 잘했네요.”

<래리어트는 나노이 행성에서도 호텔과 리조트 체인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저도 가족들과 이따금 묵고 있죠.>

“그랬군요.”

역시나 거대 고급 호텔 체인.

0.1차원에도 이미 진출해 있었다니.

VVIP인 사우 박사도 자기네 차원에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확 안심감이 들었다.

은행의 예산으로 VVIP의 스위트룸 숙박비까지 내는 건 부담이었는데 래리어트 가문의 도련님인 아이작이 입행 동기라 정말 다행이다.

<룸서비스도 훌륭하군요. 나노이의 식자재를 이곳으로 들여와 직접 키우는 듯한데 성장하는 환경이 달라서인지 풍미에도 개성이 있어 재밌습니다.>

“6-2차원은 사는 종족이 워낙 다양하다 보니 이런 쪽에 특화된 서비스는 늘 존재하기 마련이죠. 더군다나 7성급이라고 불리는 래리어트 더 키키와이라면 더더욱이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처음 안 사실이었다.

비싼 방에 묵은 고객에게 특별 서비스를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저쪽 동식물 품종을 수입해서 직접 기르는 업체가 있는 듯한데, 돈만 내면 별의별 서비스를 다 누릴 수 있는 건 지구도 여기도 다르지 않나 보다.

<저와 부하들만 편안한 곳에서 사치를 누리는 게 동포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나노이의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을 텐데.>

다만, 막상 그런 호사를 누리는 것도 잠시.

홀로그램 메시지의 글꼴이 불안정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까부터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발언자의 기분을 실시간으로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역시나, 고향 별의 사람들이 걱정되고 있는 것이다.

40조 굴덴이라는 말도 안 되는 대출 액수를 부른 것도 아마 그들을 어서 구하고 싶다는 조바심 탓이겠지.

“하루 정도는 쉬셔도 괜찮습니다. 괴수로 가득 찬 우주 공간을 지나 여기까지 오셨지 않습니까.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기만 해도 좋은 해결책은 떠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박사의 기분이 좋아졌을 때를 노려 상환 계획에 관한 내 아이디어를 제안할 찬스를 노리고 있었지만 이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저들은 일반적인 크기의 몸을 지닌 인간조차도 총 없이는 죽일 수 없는 우주 괴수에게 쫓기며 이곳으로 건너왔다.

궁지에 몰린 자신들의 행성과 태양계 전체를 구하기 위해서.

그런 그들의 부탁을, 나는, 은행은 거절했다.

거절해야만 하는 부탁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40조 굴덴이라는 터무니없는 금액을 ‘예, 알겠습니다.’ 한마디하고 빌려줄 순 없는 거니까.

괴수의 약점을 알았다고 해도 쉬운 액수가 아니다.

차관단을 형성해도 빌려줄 수 있을까 말까 한 액수인데,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행성 일부를 담보로 잡아도 빌려주겠다는 사람은 적겠지.

하지만, 단순히 거절하고 돌려보내는 것과 한 걸음 더 나아가 저들을 도울 다른 방법을 찾는 데엔 거대한 차이가 있다.

한 명의 은행원으로서, 나는 고객인 저들의 수요에 응해야 할 응당한 의무가 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 줄 방법을 찾아야만 한다.

도우려는 진심이 있다면, 그리고 창의력이 있다면, 분명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이 있을 것이다.

괴수 퇴치를 위해 필요한 현실적인 금액을 도출해내 매끄럽게 대출을 진행하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린 이미 괴수의 약점을 찾는다는 가장 어려운 단계를 클리어했으니까.

남은 건, 그놈의 로봇… 에 관한 건데.

그럼, 이쯤에서 슬슬 이야기를 꺼내 볼까.

숙소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더 늦기 전에 말해 보는 게 좋겠지.

“박사님. 이건 제가 정말 오래 고민하고 말씀드리는 이야기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40조의 대출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루어질 것 같지 않습니다.”

<…역시 그렇습니까. 바로 융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다시 한번 확언해 버리시니 마음이 아프군요.>

“…….”

나 역시 말하면서 썩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이건 전부 밟아야 하는 스텝, 필요한 과정이다.

“기존의 상환 계획은 0.1차원에서만 나는 희소 귀금속 광산의 채굴권을 담보로 잡거나 지분을 약속하시는 거였죠?”

<네. 그렇습니다. 신비의 단원자 금이 산출되는 곳은 오직 0.1차원뿐입니다. 단원자 금의 수요는 해가 지날수록 폭증을 거듭하고 있고요.>

이건 나도 호텔로 오면서 조사를 마친 사항이었다.

신비의 금속 모노아토믹 골드Mono Atomic gold.

통칭 나노이 금.

신, 마법, 정령술, 언데드 등 지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갖은 신비로 가득 찬 이쪽 세상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희소 금속.

원자 하나가 낱개로 따로 존재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 특수한 황금은 지구에선 같은 이름을 가진 가짜 의약품으로 판매되며 수많은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하지만 이쪽 세상에서 단원자 금은 명명백백히 실존하는 물건이고, 모든 이들이 탐내는 환상의 금속이었다.

비유하자면 현대의 성배 혹은 현자의 돌.

그 용도는 공중 부양부터 우주 유영, 생명체의 수명을 결정하는 텔로미어Telomere를 강화해 노화를 막는 등 의학부터 미래 기술까지 무궁무진하다.

재작년 7월 유전 공학과 연금술의 권위자이자 독신 귀족 집단인 유니콘 클럽의 최고령 회원이 대량의 단원자 금으로 모니터 속 여자친구를 실제로 연성하는 데에 성공한 사실이 알려지며 큰 화제를 불렀을 정도로.

물론, 그의 늙은 심장은 행복감을 이기지 못하고 연성 직후 심정지를 일으켰다.

레스트 인 피스.

<객관적으로 판단해도 광맥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40조 굴덴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 의견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은행은 보수적인 조직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죠.>

“차원신용금고는 언제 멸망할지 모르는 행성의 자원에 기대감을 품고 거대한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을 겁니다.”

<…혁신을 추구하는 나노이와는 정반대의 가치를 좇고 있군요. 안타깝습니다.>

글자에 나타난 사우 박사의 감정은 상당히 복잡해 보였다.

글꼴의 진폭만으로 모든 걸 추측할 순 없지만, 어째서일까.

평소보다 또렷하게 상대가 어떤 감정을 품고 있는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강한 확신을 품어도 괜찮은 걸까.

-찌릿

어째 눈이 따끔거리는 게 신경 쓰인다.

저번에 세계수 담보 대출을 맡았을 때 겪은 일과 뭔가 관계가 있는 걸지도.

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일단은 눈앞의 상대를 설득하는 데에 집중해야만 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감각이 나를 인도하고 있으니, 일단은 이 실마리를 따라가는 수밖에.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다른 곳을 찾아갈 걸 그랬습니다. 주거래 은행이라고 해서 선뜻 빌려줄 거라곤 생각도 안 했지만.>

착시인지는, 아니면 단순히 내 뇌가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건진 몰라도 글자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색깔에서 읽어 낸 정보가, 직접 내 뇌에 꽂히기 시작했다.

강한 좌절감.

그리고 자신의 자존심이 도전당했다고 생각하는지 약간의 분노 역시도 엿보인다.

필적 분석 같은 게 아니다.

마치 다른 사람이 그린 그림을 가까이에서 바라보며 표현된 의도 하나하나를 짚어 가는 것만 같은 감각.

그림을 그리는 데엔 큰 소질이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무언가를 보고 판단하는 데엔 일가견이 있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내 눈을, 믿는다.

“글쎄요. 저는 꼭 새롭고 도전적인 것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고개를 저어 사우 박사의 의견을 부정했다.

글자에 드러난 상대의 감정이 요동치고 있었지만 멈출 생각은 없었다.

나는 설득할 수 있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대출이라곤 받아 본 적이 없던 박사의 목표를 책상과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현실로 데려올 수 있다.

그가,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주기만 한다면.

“은행이 보수적인 건 당연합니다. 저희가 빌려드리는 돈은 역시나 다른 고객님께서 저흴 신뢰하고 맡기신 소중한 자금이니까요.”

<…저희는, 소중하지 않다는 말씀입니까.>

“그럴 리가요.”

호흡을 가다듬고 전 신경을 세 치 혀에 집중했다.

“저희가 보수적으로 자금을 지키고 모든 리스크를 검토하기에, 고객님들은 새로운 무언가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도 0.1차원을 구하겠다는 박사님의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대출을 성사시키기 위해, 저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최선엔, 현실적인 상환 계획을 함께 고민하는 것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절대 사우 박사가 세운 계획의 골자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약점을 발견한 우주 괴수를 죽이기 위해 어째서 멋들어진 로봇 군단이 필요한지, 묻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저들의 별을 구할 자금을 은행이 대줄 수 있도록 흐름을 만들고, 상환이 무사히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다.

큰 골자만 보면 긴급 대출을 필요로 하는 자영업자나 공장을 돕는 것과 그리 다르지 않은 업무.

규모가 달라도 평소 내가 해온 일과 다르지 않다.

지금 눈여겨봐야 하는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충분한 기술력을 가진 이들이 분수를 넘는 과도한 액수의 대출을 요구했으니 금액 부분에서 타협안을 만드는 것.

둘째, 그 기술력을 여신 심사역과 이사회에게 어필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전 직장인 서부 포독스 지점에서 비슷한 느낌으로 대출을 신청하는 고객을 몇 번인가 본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오랜 연구 끝에 무지막지하게 맛있는 치킨을 튀길 수 있게 되었지만, 쓸데없이 고가의 튀김 기계를 구매하려고 대출을 신청했던 사장님의 얼굴.

결과부터 말하면, 그 치킨집 사장님은 대출을 받아 대박을 냈다.

“제가 간단한 과학 상식을 사용해 40조 굴덴까진 아니더라도, 큰 규모의 대출을 끌어오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나는 만년필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뚜껑을 책상 위에 둔 다음 그 위에 펜을 얹어 완성.

“작은 힘으로 무거운 것을 움직이는 방법, 아시죠?”

아르키메데스는 말했다.

적당한 받침점과 기나긴 지레가 있으면 지구도 들어 올릴 수 있다고.

“기초 중의 기초잖아요.”

그렇다면 이따위 현실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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