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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17/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7화

“출근 첫날부터 잡담인가, 김지안 대리.”

“죄송합니다.”

아이작을 놀리던 내게 선배 행원 셋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회의실에 모인 선배 행원들의 모습을 살폈다.

생긴 것부터가 타인을 압도하는 비주얼. 한눈에 그들의 비범함을 알아볼 수 있었다.

구D의 실세이자 다차원 출장소를 지휘하는 슬리크 엘라마, 빡빡이. 14차원 출생 인간 미중년.

불파사 비슈티 과장은 진중하고 말수가 적은 실눈의 미노타우로스로 털이 희고 보송보송했다.

근육질의 몸에 포머드로 머리를 깔끔하게 넘기는 건 구E 출신의 관습.

면접 때 본 인사부 드워프가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구C의 에이스가 바로 내 맞은편에서 우주복 위에 정장을 껴입고 있는 엑톨프 라즈마 과장.

투명한 유리 헬멧을 쓰고 있는데 안에 든 비정형의 안개가 본체인 모양이다.

확실히 가장 이질적인 파벌로 알려진 초차원넵튠은행 출신다운 모습이었다.

어쨌든 내가 느낀 저들의 첫인상은 심플했다.

무서운 사람들.

비주얼도 비주얼이지만 발하는 기세가 무시무시하다고 해야 하나. 아무리 생각해도 악당 셋이 모여 있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은행원보단 마피아 간부에 가까운 아우라를 풍기는 것만 봐도 저들이 각 파벌의 에이스가 되기까지 어떤 지옥을 헤쳐왔는지 짐작이 갔다.

“내일 아침에 기어들어 올 정‧재계 인사와 본점 간부의 명단이다. 5분 내로 외워라.”

그런 생각을 한 것도 잠시.

엘라마 차장의 말을 듣자마자 나와 아이작은 현판식에 참석자 명단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암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30초도 지나지 않아 유리 어항 같은 투명한 헬멧을 뒤집어쓴 라즈마 과장이 점잖게 손을 드는 게 아닌가.

비슈티 과장이 큼지막한 소머리를 치켜든 것과 정확히 같은 타이밍이었다.

“전부 외웠습니다.”

“암기 완료, 라고 해 두겠소.”

웃으며 명단을 찢는 비슈티와 라즈마.

이면지로 쓸 수 있는 종이를 일부러 저런 퍼포먼스까지 해 대면서 낭비하다니, 벌써 기 싸움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한 놈은 소 대가리에 다른 놈은 대가리가 없어서 걱정했는데 괜한 생각이었나 보군.”

엘라마는 노골적으로 깔보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정치적 올바름이 부족한 듯하오. 털이 없어서인지 종족 감수성도 흘러내리나 보오.”

“우설이 실하군. 숯으로 지지면 세 공기는 거뜬하겠어.”

“생자生者와 일하는 건 이래서 싫습니다. 다들 혈기를 억누르지 못하거든요.”

“너도 뚝배기 박살 나기 전에 닥쳐, 유리 어항.”

“생긴 것과 달리 ‘모’난 성격이시군요.”

“날 잘 아는 모양이라 다행이야.”

“본점의 유명인사셨지 않소.”

“그럼 내가 뭣 때문에 유명한지도 들었겠네?”

대화가 본격적인 말싸움으로 변질되는 데엔 채 5초도 걸리지 않았다.

송곳니를 드러내고 웃는 엘라마, 실눈을 가늘게 뜬 비슈티, 아예 얼굴조차 없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라즈마.

지켜보는 나로선 날카로운 살기가 피부를 찌르는 기분이다.

과장 둘이 저렇게 차장한테 개길 수 있는 건 저런 짓을 해도 실적만 내면 엘라마가 불이익을 주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어서겠지.

공과 사를 과할 정도로 구분하는 사람이라는 평은 사실인가보다.

“이 안에서 제일 사이 좋은 게 우리 둘인 거, 웃기지 않냐?”

“…….”

아이작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리도 달지 못한 녀석이 이곳에 왔다는 건 나만큼은 아니어도 다른 지점에서 상당한 실적을 올렸다는 뜻.

녀석 역시 나와 비슷한 임무를 짊어지고 출장소에 왔을 거다.

단순히 실적을 내는 것만이 아니라 어서 성장해 파벌 싸움의 완충재가 되라는, 그런 어려운 부탁을 받았겠지.

뭐, 그건 좀 입지가 생겼을 때의 이야기. 지금의 우린 아직 들러리에 취급을 받기도 버겁다.

그나저나, 델 몬테 지점장이 자기네 파벌인 구D는 온건파라고 그랬는데 엘라마 출장소장을 보는 한 그의 말은 잘못된 것 같다.

아니면 이 인간이 구D 간부들조차 통제할 수 없는 별종이거나.

어느 쪽이든 엘라마가 다른 파벌의 에이스들과 사이좋게 지내 줄 거란 기대는 버리는 게 좋겠다.

파벌 싸움이고 나발이고 일단은 휘말리지 말고 내 일 열심히 하는 데에나 집중해야겠다.

“에효.”

출장소 오지 말 걸 그랬나.

벌써부터 평화로운 서부 포독스 지점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 * *

살벌한 분위기의 업무 미팅이 끝난 건 저녁 7시를 넘어선 즈음이었다.

나와 아이작은 현판식 순서와 의전 순서 등의 주의사항, 그 외에도 케이터링 업체가 사전에 전달한 메뉴 같은 자잘한 정보를 전부 머리에 때려 박은 다음에야 회의실을 나올 수 있었다.

‘네놈들은 날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셈이냐. 10분 내로 외우지 못하면 사이좋게 드럼통에 들어가 키키와이의 밤바다를 구경하게 해 주지.’

…같은 소리를 엘라마 소장이 지껄이며 회의실 구석을 가리키길래 정말로 녹슨 드럼통이 있어서 뇌의 잠재력을 끌어낸 건 비밀이다.

“겨우 빠져나왔네.”

우린 5성 호텔 체인 래리어트 호텔에서 식사를 마치고 이용객 전용 비치에서 느긋하게 칵테일을 즐기는 중이었다. 물론 아이작이 사줬다.

키키와이는 내가 살던 지구로 치면 하와이와도 같은 장소.

해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지만 캠프 파이어가 설치된 비치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흥겨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었다.

아름다운 남쪽 섬에서 일하게 된 건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상사가 저런 사람들이니, 앞으로 어떤 고생을 할지 걱정될 따름이었다.

“1금융권 은행에 부조리가 많다곤 들어 봤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아이작은 그렇게 말하며 쓰고 있던 안대의 위치를 고쳤다.

녀석은 지금 야자나무 사이에 걸린 해먹에 누워 있었는데 그 모습은 내 눈에 해방감에 몸서리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연수원 시절부터 느낀 거지만 참 자기 시간 칼같이 관리하는 녀석이다. 퇴근하고 밥 먹자마자 해먹에 누워 휴식 시간 확보하는 걸 보니.

나도 그렇지만 녀석도 신입 행원 아낄 줄 아는 따뜻한 분위기의 지점에서 일하다 온 모양이다.

게다가 이 녀석은 태생부터 어마어마한 금수저니까 한국 군대 부조리를 겪어 본 나와는 역치 자체가 다르겠지.

“나 살던 곳도 비슷해. 구직 활동하는 내내 시중 은행들 쓸데없이 군기 잡는다고 소문 들리더라.”

다만, 아이작이 탈주하면 내가 X되니까 적당히 입을 털어 둬야겠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비슷하다는 건가.”

“뭐, 그렇지. 다들 돈 다루는 일이라는 핑계로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압력 가하는 게 아닐까 싶어.”

은행의 부조리야 워낙 다양하지만 취준생 시절 현직자들에게 들은 썰에 따르면 상사의 등산이나 낚시에 따라가는 게 제일 많은 듯하다.

아니면 단합을 도모한다는 이유로 행군이나 뮤지컬을 시킨다든지.

어디였더라, 시중 은행 중 한 곳은 아예 행원들에게 기마 자세로 업무랑 상관없는 안창호 선생의 글을 외우게 시키는 곳도 있다고 했다.

그에 비하면 현판식 참석자들 인적사항 외우는 정도야 뭐, 새 발의 피라고 할 수 있겠지.

어디까지나 엘라마가 정말로 우릴 드럼통에 담아 바다에 빠뜨리지 않는 한 그렇다는 거지만.

사실 아직도 VIP 차량 번호는 대체 왜 외우라는 건지 모르겠다. 출장소 코딱지만 해서 주차할 자리도 얼마 없는데.

“고속 승진 코스라고 들었는데 까딱했다간 스트레스로 실려 가겠어.”

내가 말하자 아이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하긴, 금수저로 편하게 자랐을 텐데 자기 집안 따윈 개의치 않고 드럼통에 넣어 바다에 던지겠다고 협박하는 사람은 처음 봤겠지.

“뭐, 어쩌겠어. 당분간은 눈치 보고 다니는 수밖에.”

“…파벌 싸움 얘긴가.”

“너도 들었어?”

내가 묻자 아이작은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들었지. 꽤 거친 놈들이 모일 거라고 그러더군.”

“직접 겪어 보니 소감이 어때?”

“유치하다.”

뜸 들이지 않고 대답하고는, 다시 덧붙였다.

“…그리고 지긋지긋하군.”

유치하다는 건 나도 공감.

지긋지긋하다는 건 이 녀석의 배경 때문일 거다. 연수 출발하는 날에도 길이 20m짜리 리무진 타고 온 걸 보면 부잣집 도련님일 텐데.

나는 녀석이 다들 아는 유명한 재벌가 자식이 아닐까 추측 중이다. 재벌가 태생이라면 계파 싸움 같은 것도 많이 봤을 테지.

“…파벌 싸움 말고 다른 얘긴 못 들었어?”

아이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들은 건 엘라마 소장에 관한 이야기다.”

“오.”

이건 내가 모르는 내용이다.

아이작은 칵테일 잔을 집어 목을 축이고 말을 이었다.

“엘라마 슬리크가 바로 13대 카빌죠 워치다. 지금이야 최연소로 차장을 단 구D 파벌 실세로 알려져 있지만.”

“13대 카빌죠 워치?!”

“그래.”

“그게 누군데.”

“…교양이 없군.”

교양이고 나발이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카빌죠 워치는 사람 이름이라고 쳐도 13대가 뭘 의미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뭐냐, 이름 앞에 붙은 13대는 왕가에서 누구누구 몇 세 같은 호칭 사용하는 거랑 비슷한 거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워치는 카르부크를 계승하는 가문 중에서도 우두머리 격이니까.”

“카르부크….”

들어 본 적 있는 명칭이다.

카르부크는 남자만이 무대에 설 수 있는 그레이트후리텐의 전통 예능.

진한 화장, 과장된 가발, 아름다운 전통의상에 독특한 음악과 안무가 곁들여진 연극이다.

티켓이 비싼 데에다 업무가 바빠 직접 무대를 보러 간 적은 없었지만 카르부크 배우들은 인간문화재로 취급받는다고 들었다.

근데 하필이면―

“저 인격 파탄자가?”

“400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워치가의 당주이자 13대 카빌죠의 예명을 물려받은 천재라고 하더군.”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그동안 품어온 의문이 해소되는 기분도 들었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플랫 샤펜도라는 대배우의 아우라가 느껴지는 남자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우월한 마스크를 지니고 있었는데 슬리크 엘라마의 외모는 그와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왜 저 얼굴 갖고 은행원이 된 건가 싶었는데 500년 동안 계속해서 뛰어난 유전자를 수집해 온 명망 높은 배우 가문 태생이라고 들으니 절로 납득이 갔다.

“그렇게 잘나가던 사람이 어쩌다 은행원이….”

“그야 알 수 없지. 스무 살에 가문을 벗어나 입행한 그의 각오를 은행장이 높이 샀다고만 들었다.”

스무 살인가. 나 8년 전에 뭐 하고 있었더라.

인품은 모르겠지만 경력 하나는 굉장한 사람이다.

제일 큰 가문의 당주라면 업계의 정점 같은 위치일 텐데 스스로 물러나 다른 길을 택하다니.

대체 무슨 일을 겪었길래 그런 결정을 내린 걸까. 나로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남자는 타고난 배우다, 무슨 속셈을 품고 있을지 알 수 없으니 거리를 두라는 게 내 상사가 남긴 조언이었다.”

“흠….”

이유야 달랐지만 지점장 역시 슬리크와 적당히 거리를 두라고 했었지.

출장소장의 출신까지 고려한 조언이었던 걸까.

“…어쨌든, 이곳에는 어느 파벌 출신이든 죄다 괴물 같은 놈들만 모여 있는 모양이야.”

확실히 구C랑 구E가 보낸 과장들도 비주얼부터 뭔가 압도적이긴 하지.

“글쎄다. 내 생각엔 너도 꽤나 이질적인 멤버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왜.”

어디가 이상한지 너 혼자만 모르고 있구나.

그나저나 델 몬테 지점장에게 구C랑 구E가 어떤 놈들인지 얘길 듣긴 했는데 나중에 길게 시간 나면 알려 줘야겠다.

오늘은 이미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패스.

“모르면 됐어. 일단은 저 괴물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방법이나 찾아보자고. 늦었으니까 이만 간다.”

오래 있진 못했지만 내가 모르던 정보를 얻었으니 유의미한 대화였다.

“출세 코스 들어와 놓고 떨어져 나가면 안 되잖아. 동기끼리 돕고 살아야지.”

“동기끼리, 인가.”

출장소에서 내가 가장 의지할 수 있는 건 특채 동기인 이 녀석뿐.

가끔 재수 없게 굴긴 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수밖에.

“…숙소까지 차를 내주마.”

재수 없단 말은 취소.

택시비 굳었다. 개꿀.

“태워 주려고?”

“아니.”

“무슨 소리야. 방금 차 내준다면서. 숙소 돌아가는 길에 내려준다는 말 아니었어?”

“숙소?”

아이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이작 도련님.”

그러다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장 차림의 노인이 다가와 말을 걸고 나서야 무언가 떠올린 듯 손가락을 튕겼다.

“말하는 걸 깜빡하고 있었군.”

“뭔데.”

“어제 꼭대기 층으로 짐을 전부 옮겼다.”

“꼭대기 층?”

“그래.”

“혹시 이 호텔―”

“우리 가문 소유다.”

“…….”

어쩐지 이 녀석 성씨랑 호텔 체인 이름이 같더라.

“안색이 좋지 않군. 의사가 필요한가?”

“아닙니다.”

“갑자기 왜 존댓말을….”

“빨리 집에 보내줘.”

“세바스찬. 차를 대기시켜라.”

“예, 도련님.”

나는 그날 래리어트 호텔의 리무진을 타고 사택으로 돌아갔다.

이걸 평소 타고 다니는 아이작, 부럽다.

“더러운 부르주아 같으니라고… 훌쩍.”

차내에 설치된 미니바에서 제일 비싼 술을 꺼내 퍼마신 나는 귀가 후 새벽 2시까지 토해야만 했우에에즈보락퀅푹크어엉.

이젠 하다 하다 술도 사람 차별하네, 시발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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