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6화
신년을 맞이한 6-2차원.
1월 초에 배포된 인사발령 공시에는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안 씨, 대리 진급 축하해!”
서부 포독스 지점의 행원 전용 식당.
점심 식사를 마치자마자 프레드 선배가 음료수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평소 챙겨 주던 커피가 아닌 기간 한정 프리미엄 제품. 1,000굴덴 더 비싼 거였다.
“우리 지점에서 조기 승진자 나온 거 처음 봐요.”
“계장이 남들보다 먼저 대리 다는 일 자체가 처음이지 않나?”
“엄청 대단한 거잖아요 그럼.”
주위를 둘러보니 지점 동료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은 행원들과 텔러를 가리지 않고 고깔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멀리서 이쪽을 보고 웃는 델 몬테 지점장이 보였다.
파티 굿즈를 준비해 나눠 준 건 저 사람이었나.
승진 공시 오늘 나온다고 신경 많이 써 준 모양이다.
“감사합니다.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
“아이 대리님도. 겸손이 과하면 안 된다잖아.”
“진짜 축하해요. 근데 사진 한 장 같이 찍어도 돼요?”
고작 한 달이긴 하지만 동기들보다 먼저 수습 기간을 마치고 대리가 된 나를 서부 포독스 지점의 식구들은 자기 일처럼 축하해 주었다.
“대리님 혹시 여소 필요해요? 저 아는 언니 지금 솔로인데―”
“죄송해요, 아직 제 몸 간수하기도 힘들어서….”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던 텔러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한 장 보여 줬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미인. 하지만 나는 점잖게 사양했다.
아무리 예뻐도 키가 2미터를 넘고 평균 체온이 4℃의 얼음 거인 혼혈은 물리적으로 부담스럽다.
[과타노차: 원시 고대 생물 주제에 조기 승진을….]
[밀라: 폴로미 언니가 계속 서류 숨기고 있어서 뭔가 했는데 오빠 혼자 승진해서 그런 거였네요? 알려 주지 그랬어요ㅠㅠ]
[밀라 님께서 축하 선물을 보냈습니다!]
[승진 축하 3종 세트]
[배송지를 입력해 주세요.]
[밀라: 그래도 승진 축하해요! 지안 오빠 짱짱맨!!]
담배 피울 겸 옥상으로 올라가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니 동기 톡방에 축하 메시지가 가득했다.
[이로울: 지안 형제님을 위해 기도한 보람이 있었군요. 앞으로의 활약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다만, 경전에 기록되길 오만은 패망의 선봉이라고 하였습니다. 혹여나 형제님이 타락하면 감사부의 칼인 제가 눈물을 머금고 직접 징계―]
이로울이 보낸 장문의 메시지는 읽지 않고 그대로 스킵했다.
문면에서 어디 집사님 느낌이 많이 나는데 천사들은 다 이런 성격인가.
왠지 감사부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로 이로울이 더 맛이 간 것 같다.
다음에 한 번 직접 불러내서 확인해 보든가 해야지.
[아이작: 무슨 수를 쓴 건진 모르겠지만 이번엔 네가 앞서간 걸 인정하마. 다만, 이제부턴 그리 쉽지 않을 거다.]
아이작은 어째서인지 내게 경쟁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이 녀석도 지점 근무였던 거로 기억하는데 요즘 통 얼굴을 보지 못해서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부유층 출신 엘리트를 놀릴 기회가 자주 오는 건 아니니까 가볍게 도발해 볼까.
[김지안: 한 달 먼저 대리 단 거 갖고 뭘 그래ㅋㅋㅋ앞으로 더 잘나갈 텐데ㅋㅋㅋ]
[아이작: 네가? ㅎ]
뜻밖에도 도발은 통하지 않았다.
아이작이 가소롭다는 듯 비웃는 걸 보니 뭔가 내게 숨기고 있는 듯하다.
딱히 그게 뭔지 흥미는 없지만.
“후우.”
뱉어낸 담배 연기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서부 포독스 지점은 언덕 위에 있어 옥상에서 포독스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내일이 되면 나는 이곳을 떠나 다른 도시로 향해야 한다.
숙소 역시 출장소의 사택으로 옮겨야 하고.
“…….”
수도권에 자리 잡은 여러 도시 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를 지닌 포독스는 활기로 가득한 곳이다.
린딘에 의존하는 위성 도시가 아닌 유일한 자립 도시.
다섯 달 동안 이곳에서 일을 배울 수 있던 건 내게 큰 축복이었다.
물론 여기서 마주친 수많은 고객의 얼굴을 전부 기억할 순 없다.
하지만 그들을 상대하며 배운 업무 노하우는 앞으로도 내 은행원 인생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성공하면 다시 올게.”
옥상을 부는 바람에게, 다섯 달 동안 날 키워 준 이 도시에게 약속을 건넸다.
다시 이곳을 찾을 땐 더 높은 직급을 달고, 모두의 존경을 받는 뱅커가 되어 있어야 한다.
치열한 경쟁과 격무가 기다리는 출장소로 향하는 건. 더욱 강하고 단단해진 다음 돌아오기 위해서니까.
* * *
그날 밤, 델 몬테 지점장에게 호출당한 나는 포독스시 변두리의 음식점으로 향했다.
지점장보다 먼저 도착해 이름을 대자 직원은 가장 안쪽에 있는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동양풍의 인테리어. 좌식 의자와 테이블은 모두 고급 목재가 사용된 물건. 열린 창문 너머에는 고즈넉한 정원이 보인다.
드라마에선 으레 이런 고급 음식점에서 중요한 이야기나 거래가 오가던 거로 기억하는데 막상 당사자가 되고 나니 기분이 무척이나 묘했다.
-드르륵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미닫이문이 열리며 신발을 벗은 지점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고개 드세요. 뭘 새삼스럽게.”
아주 약간이지만 넥타이 매듭을 아래로 잡아당겨 느슨하게 만든 지점장이 곧바로 술병을 집었다.
태엽장이답게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일관하고 있었지만 다섯 달 동안 같이 일한 나는 지금 그가 상당히 기분이 좋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잔을 들어 술을 받은 나는 지점장의 잔에도 똑같이 술을 부었다.
“내일 오전에 송별회를 할 예정이긴 하지만 김지안 대리와는 따로 한 번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습니다.”
지점장은 천천히 한 명의 뱅커로서 내가 알아야만 하는 것들에 관해 말해 주었다.
승진 코스의 최전방이라고 할 수 있는 신설 점포에서도 통용되는 나만의 무기가 무엇인지.
또한, 어떤 유형의 행원과 고객을 조심해야 하는지.
가장 인상이 깊었던 건 차원신용금고에 존재하는 세 개의 파벌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다차원 출장소는 세 파벌에 속한 행원들이 실적을 겨루는 각축장이 될 겁니다. 이 은행에 세 개의 파벌이 있는 건 알고 있죠?”
“예.”
차원신용금고는 경제 대공황 시절 생존을 위해 은행 간의 인수 합병이 잦던 시절 세 개의 은행이 합쳐져 탄생한 거대 은행이었다.
합병 전에 연봉도, 관행도, 심지어는 사용하던 전산 시스템도 달랐던 은행원들이 출신에 따라 파벌을 만드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디스파테르신용금고, 초차원넵튠은행, 에라스무스요정은행의 세 곳이었던가요.”
“정확합니다.”
각 파벌은 출신 은행의 머리글자를 따 구D(舊D), 구C, 구E로 불리고 있다는 얘기까진 연수원 시절 친척이 본점에서 일하는 동기에게 들어봤다.
초차원넵튠은행이 왜 그대로 구C인지는 모르겠지만.
“구C와 구E는 오커스 행장으로 대표되는 구D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중입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오커스 행장님께선 세력 다툼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서 말입니다. 출장소에 각 파벌의 행원이 고르게 배치되는 이유, 짐작이 갑니까?”
대량의 실적을 기대할 수 있는 신설 점포는 잘 구워진 큼지막한 스테이크와도 같다.
이를 독차지하지 않고 모든 파벌의 은행원을 배치하는 건 싸움을 싫어하는 은행장의 성향에 의한 결정.
그렇다면―
“파벌 간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시도인가요.”
내가 말하자 지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린’ 중립을 지킬 생각입니다. 파벌 간의 갈등을 없애는 게 행장님의 목표다 보니.”
지점장이 ‘우리’, 라는 단어로 정의한 무리에 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그가 속한 은행장의 파벌을 가리키는 단어.
그렇다면, 지점장이 보기에 나는 과연 어떤 위치에 서 있을까.
“저는 세 파벌 사이에서 유일하게 눈치 보지 않고 움직일 수 있는 포지션이겠군요.”
은행장이 꽂아 준 놈이라고 뒤에서 말이 돌긴 하지만 나는 사실 어느 파벌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다.
좋게 말하면 조커, 나쁘게 말하면 깍두기… 라고 해야 하나.
“구C와 구E의 인간은 다르게 생각하겠지만요. 이미 행장님이 심은 낙하산이라고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당사자인 저로선 상당히 당혹스러운 소문이네요. 행장님과 만난 적도 없는데.”
만나긴커녕 얼굴도 모른다. 홈페이지에도 사진이 안 나오는 양반인데 내가 어떻게 알아.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해 내면 움직이기 상당히 편해지겠죠.”
델 몬테 지점장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그는 내가 출장소에서 벌어질 치열한 파벌 정치에 말려들게 두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슬리크 엘라마와는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지점장은 나를 어떻게든 자신이 속한 파벌로 끌어들이려 하지 않고 사람 대 사람으로서 생존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고 있었다.
“그만큼 다른 파벌의 행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라는 뜻이군요.”
“곡예에 가까운 일인 건 알고 있습니다만, 김지안 대리라면 해낼 거라고 믿습니다.”
어려운 주문이다.
실무에 투입된 지 고작 다섯 달이 지난 신입 행원한테 할 소리는 절대 아니다.
다만, 어째서 내가 이 자리에 불려 나왔는지, 지점장을 비롯한 구D의 인간이 내게 뭘 기대하는지는 얼추 알 것 같다.
혁신 점포 4호 다차원 출장소는 달리 말하면 파벌 전쟁의 새로운 전선.
지점장은 내가 그곳에서 세 세력의 융화를 실현할 완충재가 되는 걸 바라는 게 아닐까.
지금 당장 그런 일을 해낼 역량이 내게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을 텐데.
“잘 생각해보니 갓 대리 직함을 단 사람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었군요.”
갓 대리로 승진한 사람에게 할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내 입지가 상승한 다음 정식으로 일을 맡길 생각이라는 뜻이겠지.
“이건, 김지안 대리의 활약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준비한 작은 선물입니다.”
지점장은 테이블 밑에 감춰 두었던 작은 비단 주머니를 꺼내 내게 건넸다.
“출장소에서 위험한 상황에 부닥치게 되면 열어 보세요.”
그렇게 말하는 델 몬테 지점장의 얼굴은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었지만 동시에 거스를 수 없는 위엄 역시 깃들어 있었다.
“승진, 축하합니다. 앞으로도 많은 활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다음 날 오전.
짧지만 융숭한 송별회를 마친 나는 반차 쓴 프레드 선배의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했다.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선배.”
“고마우면 포독스나 린딘 들를 때 연락해, 술 살 테니까.”
“그땐 제가 사야죠.”
“하긴, 아직 승진턱 안 쐈지?”
“대리 나부랭이가 무슨 승진턱이에요. 그냥 고기 먹으면 됐지.”
“됐고, 도착하면 톡해. 부사수 탄 비행기 추락하지 않았는진 확인해야 하니까.”
“가서 연락할게요.”
“그래. 몸조심하고.”
작별 인사를 마치고 비행기에 탑승.
목적지는 아열대에 위치한 그레이트후리텐의 해외 영토인 키키와이섬이었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곧 착륙하겠습니다―]
4시간의 비행을 마치고 도착한 키키와이섬은 오후의 햇빛이 찬란하게 내리쬐는 휴양지였다.
사시사철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푸른 바다와 모래사장.
가로수는 죄다 야자수가 아니면 망고나무나 파인애플 나무다.
렌터카에 짐을 싣고 해안가를 질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사택에 도착했다.
하지만 쉴 시간은 없다.
난 짐을 내린 다음 빠르게 샤워만 마친 다음 곧바로 여름용 정장으로 갈아입고 출장소로 향했다.
5시부터 한 시간가량 내일 있을 현판식을 준비하는 사전 미팅이 진행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늦으면 안 되는데.”
택시를 타고 출장소에 도착한 건 4시 54분.
일단 지각은 면했다.
나는 직원용 통로를 질주, 회의실로 직행했지만.
“실례하겠습니다.”
이미 안에선 슬리크와 내가 모르는 행원 두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들이 바로 구C와 구E 파벌이 보낸 에이스인가.
“본점에선 30분 전 출근이 기본이다, 김지안 대리.”
“주의하겠습니다.”
슬리크의 지적에 곧바로 고개를 숙이고 자리에 앉았다.
“자, 여기.”
처음 보는 귀여운 인상의 단발머리 텔러가 현판식 참가 예정 인원의 목록을 나눠 주었다. 왜 초면부터 반말인진 모르겠지만.
-턱
그런데 자료에 이어 내 자리에 물병과 컵을 놓은 건, 몹시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
눈을 마주치니, 확실히 내가 잘 아는 그 사람이 맞았다.
금속테 안경 너머로 보이는 찢어진 동공.
엘리트의 기운을 전신에서 발하는 이족 보행 도마뱀.
“이야, 이게 누구야. 아이작 ‘계장님’ 아니신가.”
2021년 하반기 특채, 통칭 낙하산 5인방 중 가장 부유한 리자드맨 아이작.
“…망할.”
사장님 여기 깍두기 하나 더 추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