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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14/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14화

내가 일하는 6-2차원은 여러 차원에서 건너온 다양한 종족들이 섞여 사는 곳이었다.

이곳에 언어의 장벽 따윈 없다.

12차원 올림포스의 발명신 헤파이토스가 만든 마법공학 위성 통신망이 차원 전체를 커버하고 있었으니까.

이러한 충실한 인프라 덕일까.

수많은 관광객과 이민자가 드넓은 6-2차원으로 몰려들었고, 그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국가인 그레이트후리텐은 다양한 종족을 품으며 그들의 문화를 흡수하게 되었다.

<지배하라 후리테니아여. 차원을 지배하라. 후리텐인은 결코 노예가 되지 않으리.>

국가의 가사만 봐도 알 수 있는 엄청난 번영을 기반으로 그레이트후리텐은 나날이 강대국의 지위를 공고히 만들어갔다.

후리텐 박물관의 전시품 중엔 3-1차원에 다녀온 탐험가들의 전리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타 차원의 문물은 빠른 속도로 대중들의 반응을 끌어냈고, 사람들은 지구의 문화 역시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라고 완전히 빨간색으로 차려입었네? 올해 크리스마스엔 뭐 갖고 싶어?’

‘우리의 울음을 억압하고 웃음을 강요하는 산타의 수급. 그리고 추악한 커플들의 뼈.’

‘…….’

‘기립하시오! 기립하시오, 당신도!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요!’

‘미, 민중 봉기잇…!’

3-1차원의 문물 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건 단연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의 절기節氣였다.

이따금 빨간 옷을 잘못된 뜻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수.

겨울 시즌에 이렇다 할 축제가 없던 6-2차원의 사람들은 종교와 종족을 넘어 다른 세상의 행사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

공중파 방송국은 <7번가의 기적 같은 피자 선물>을 비롯해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한 명작 가족 영화를 틀어주었다.

한 해를 마무리 짓는 시기.

사람들은 쌓아 둔 이야기를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플랫 샤펜도라의 가정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딸을 위해 모처럼 직접 요리를 준비한 그는 식사를 마치고 TV 앞에 앉아 있었다.

“진짜로 이게 아빠?”

“아빠 맞아.”

“와아아.”

아역 시절의 플랫을 처음 본 딸아이는 입을 헤 벌리고 감탄하고 있었다.

“아빠 잘생겨써….”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옆에 앉은 아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키득대며 카메라를 돌리는 중.

인상적인 순간이라면 무조건 영상으로 남기는 건 그녀의 직업병이었다.

문득, 오디션을 앞두고 정체를 밝혔을 때 아내가 보인 놀란 표정이 떠올라 플랫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땐 역으로 플랫이 카메라를 들고 있었지만.

아내와 딸은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보물이었다.

이 둘과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면 자신은 무엇이든 해내고 말 것이라고, 새삼스럽지만 플랫은 생각했다.

그리고 또한, 자신이 여기까지 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들에게 반드시 보답하겠다고 결심했다.

“내년 크리스마스는 더더 행복할 거야.”

“어쩌면 우리 아가 동생 생길지도 모르겠네?”

아무것도 모르는 딸아이가 동생이 생긴다는 말만 듣고 함박웃음을 짓자, 엔딩 크레딧을 지켜보던 아내가 장난스럽게 플랫의 볼에 입을 맞췄다.

스마트폰이 울린 건 영화가 끝난 다음이었다.

처음 보는 번호. 전화를 받은 건 단순한 변덕이었다.

“여보세요?”

<오랜만이다, 플랫.>

분명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

하지만 아직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만 누구신지―”

<나야. 카빌.>

“카빌죠?”

소파에 앉아 있던 플랫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놀란 딸이 작게 비명을 질렀다.

딸을 안심시킨 플랫은 2층으로 올라가 다시 통화를 재개했다.

“네가 먼저 연락해 올 줄이야.”

플랫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발신인은 그가 아역 배우로 활동하던 시절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다섯 살 연상의 친구.

오래된 전통 연극 전문 배우 가문의 종가에서 태어나 압도적인 재능으로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예명을 세습한 천재 배우, 13대 카빌죠 워치였다.

“번호는 어떻게 안 거야? 안 그래도 조만간 만나러 갈까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플랫은 오랜 친구의 연락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1월에 가족들을 데리고 카빌죠의 본가를 찾아가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는데 먼저 저쪽이 전화를 걸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떻게 된 거긴. 소식 듣고 수소문했지. 설마 가명으로 계속 독립 영화 찍고 있었을 줄이야.>

플랫은 쑥스럽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와 아내가 찍은 독립 영화는 주연 배우의 정체가 전설적인 아역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이후로 극장에 다시 걸리며 역주행을 시작하고 있었다.

다만 플랫은 자기 얘기보단 카빌죠가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가 더 듣고 싶었다.

“그런 너는, 그동안 뭐 하고 지냈는데.”

<나?>

사실 플랫은 가명으로 살고 있던 시기에도 몇 번인가 10대 후반의 카빌죠가 무대에 서는 걸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술에 절어 살다 아내를 만나는 등 다양한 사건을 겪다 보니 15년 가까이 카빌죠가 어떻게 지내는지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빌죠는 6-2차원의 전통 연극계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워치 가문의 후계자이자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사람이다.

두 살 때부터 이미 유망주로 점찍혔던 천재니까 지금은 당주 자리를 물려받아도―

<연기 때려치우고 취직했어.>

“뭐?”

<은행 공채 붙어서, 일한 지 벌써 10년 넘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농담이지?”

<진짜야. 이쪽이 더 적성에 맞는 거 같아서.>

-띠링

스마트폰에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카빌죠가 보낸 것으로, 사진이 한 장 첨부되어 있었다.

“차원신용금고 차장 슬리크 엘라마….”

사진 속 명함에 적힌 친구의 본명을 읽고 플랫은 말을 잃었다.

<최연소로 차장 달았어. 전부 실력으로 해냈지.>

그레이트후리텐의 전통 연극 카르부크를 계승하는 열두 가문, 그중에서도 우두머리라고 할 수 있는 워치가家.

엘라마는 워치라는 예명 뒤에 숨겨진 진짜 성이었다.

“맙소사. 그건 많이 대단한 거 같은데 축하해 줘야 하는 거야?”

<대배우께서 뭘 새삼스럽게 그 정도로 호들갑을 떨어.>

분명 축하해야 할 일이 맞지만, 이 경우엔 친구의 예전 신분 때문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플랫은 알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농담 같지가 않았다.

명함은 13대 카빌죠가 정말로 가업을 물려받는 걸 거부하고 은행원이 되었다고 말해 주고 있다.

게다가, 차원신용금고라니.

플랫이 돈을 빌린 시중 은행이 아닌가.

“…….”

어째서 카빌죠가 갑자기 연락했는지 알 것 같았다.

“혹시 오늘 전화 건 거….”

<크리스마스잖아. 소식 들은 겸 안부 인사할 겸 뭐 좀 물어보려 했다.>

“내 대출 상담받아 준 은행원이랑 상관있는 얘기야?”

<여전히 눈치가 빠르군.>

“하아….”

잠시 키득대던 카빌죠, 아니 슬리크는 다시 말을 이었다.

<대뜸 전화 걸어서 하는 게 일 얘기라서 미안하게 됐어. 오랜만에 연락 닿은 김에 수다나 떨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이 없군.>

“됐어. 옛날얘기는 직접 만나서 하자고.”

<배려심에 감사하도록 하지. 그래서, 김지안은 어떤 놈이었나?>

대뜸 놈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슬리크가 김지안 계장에게 썩 좋은 감정이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더더욱, 플랫은 그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자신을 도와주었는지 한껏 포장을 더해 설명해 주기로 했다.

<수습 기간 중인 햇병아리치곤 대단한데?>

다행히도, 자초지종을 들은 슬리크는 지안의 능력을 상당히 좋게 평가하는 듯한 반응을 내놓았다.

<갑자기 본점에서 네가 광고 모델 맡을 거라고 얘기 나와서 놀랐는데 그렇게 된 거였군.>

“지안 씨 아니었으면 거기까지 안 했을 거야. 플랫론이 뭐냐, 플랫론이.”

<부행장 그 인간이 이름 괴상하게 짓는 건 유명하지. 이번에도 숟가락 얹어 보려고 삽질한 거라고 안팎에서 욕먹고 있잖아.>

“솔직히 지안 씨가 다 한 건데 웃대가리들이 공로 채가는 거 좀 문제 있는 거 같아.”

플랫은 자신의 은인인 김지안이 은행 안에서도 승승장구하길 바라고 있었다.

실적을 내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해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옳게 된 기업이다.

아무리 은행이 폐쇄적이고 승진의 문이 비좁다 해도 인사고과에 실적이 제대로 반영돼야 하는 게 아닌가.

<은행이 다 그렇지. 책임은 부하의 것, 공로는 상사의 것. 더러워 죽겠어. 아, 그래도 너무 걱정하진 마.>

“오…?”

하지만 그 걱정은 이어진 슬리크의 설명에 의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렸다.

<김지안 그 녀석, 앞으로 내가 데리고 일할 거야.>

“네가 직접?”

<그래.>

직접 데리고 일한다는 말은 단순히 선배 행원으로서 끌어 준다는 것 이상을 뜻한다.

슬리크가 몸담고 있던 카르부크 업계는 여전히 전통을 중시하며 소수의 도제를 스승이 데리고 가르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사실을 알고 있던 플랫은 슬리크가 김지안을 어떤 식으로 다룰 생각인지 곧바로 눈치챘다.

아무래도 슬리크는 흔히 카르부크에서 말하는 직계 제자와 같이 취급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본점에선 실세로 꼽히고 있다. 원하는 행원이 있다면 한 놈 정도는 신설되는 점포로 데려갈 수 있겠지.>

슬리크는 즐겁다는 듯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신설되는 출장소, 승진으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될 거야. 출장소장은 내가 맡을 거고.>

“그렇다면….”

<김지안 계장, 인사부 추천 명단 중에서도 상위권의 실적을 내고 있는데 데려가지 않을 이유는 없어.>

“지안 씨를 잘 부탁할게.”

<부탁받지 않아도 한번 데려가면 끝까지 책임지는 주의라서.>

슬리크의 이야기를 들은 플랫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분명 김지안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나머진 만나서 천천히 얘기하는 거로. 종종 연락하자고.>

과거 그랬던 것처럼 할 말만 마치고 쿨하게 전화를 끊은 친우.

슬리크가 어쩌다 가문을 뛰쳐나와 은행원이 되었는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번에도 플랫은 인연이 지닌 강한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지안 씨가 일터 옮기면 한 번 찾아가야겠네. 카빌죠… 아니, 슬리크 얼굴도 오랜만에 볼 겸.”

은인의 미래는 전보다 훨씬 탄탄해졌다.

안심한 플랫은 1층으로 내려가 딸아이와 아내를 두 팔로 번쩍 들어 올리고 그녀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다음은 아빠 조금 더 컸을 때 찍은 영화 볼까?”

“쬬아아!!”

김지안의 선의가 만들어 준 샤펜도라가의 행복한 크리스마스이브는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플랫은 자신이 입은 은혜를 절대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나른한 오후.

연말이어서인지 은행을 찾는 손님은 적었다.

병가를 받아 쉬고 있던 과장님이 복귀한지라 프레드 선배와 나는 원래 업무로 돌아가 묵묵히 창구에 앉아 전산 작업을 해야 했다.

대출 상담을 맡는 4번 창구엔 다시 프레드 선배가. 나는 수신 업무를 맡는 3번 창구에.

나란히 앉아 이것저것 데이터를 입력하다 보니 갖은 잡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연말에 인센티브는 얼마 나올까. 쌓아 둔 휴가는 내년에 쓸 수 있을까. 이 직장에서 일하면서 느낀 좋은 점은 무엇인가, 같은 것들 말이다.

업무와 하나도 상관없는 얘기긴 한데 내가 태어난 지구가 아닌 다른 차원에서 일하면서 좋은 점이 뭐가 있는지 꼽아 보자면, 일단 크리스마스가 빨리 온다는 게 있겠지.

‘빨리 온다’는 말에는 조금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오늘은 2022년 12월 28일 수요일.

저번 주말은 크리스마스였던지라, 나는 적당한 레스토랑에서 특채 동기들과 모여 파티를 벌였다.

맛있는 걸 먹고 준비해 온 선물을 교환한 우린 밤새 떠들썩하게 놀다 아침에 헤어졌다.

저번에 불참했던 아이작도 이번엔 참석했는데 녀석은 선물이라고 자기 아버지의 회사 주식을 세 주씩 나눠 주었다.

밀라가 준 귀염뽀짝한 수면 양말보다 그쪽이 마음에 드는 티를 노골적으로 내 버린 탓에 한동안 톡을 읽씹당하긴 했지만, 어쨌든 즐거웠다.

“왜 그래. 연말이라 싱숭생숭해졌어?”

주말의 추억을 곱씹고 있던 내게 옆자리의 프레드 선배가 말을 걸었다.

“네, 좀 그런 거 같아요.”

“하긴. 지안 씨 온 지도 벌써 다섯 달이나 지났지. 뭐, 멍 때리는 것도 좋은 거야. 슬슬 업무 익숙해졌다는 증거니까.”

“에헤이. 제가 언제 멍 때렸다고 그래요. 업무 시간 동안은 계속 빡집중 하고 있다니까요.”

“눈 풀려 있는 거 다 봤어. 숙취가 좀 심한가 보네.”

프레드 선배는 조용히 내 책상 위에 숙취 해소 음료를 올려다 놓았다.

“고마워요 선배.”

“지안 씨 챙기는 거 나밖에 없지?”

“아유 그럼요.”

캔 뚜껑을 따고 내용물을 원샷. 속이 조금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벌써 실무에 투입된 지 5개월이 지났다.

그리고 내가 지금 있는 6-2차원과 지구 사이에 존재하는 시차 역시 5개월. 지구는 현재 7월이다.

즉, 다섯 달 뒤에 유급 휴가를 써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시 한번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는 뜻이다.

“개이득….”

1년에 크리스마스를 두 번 보낼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을 거다.

나는 3-1차원 출신이라 언제든 여행 허가를 받아 지구로 돌아갈 수 있으니 몇 안 되는 예외라고 할 수 있겠지.

“슬 된장찌개 마렵네.”

생각해 보니 한국을 떠난 지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슬슬 고향의 공기가 그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인정.

다만 아직 수습 기간이 한 달 남아 있는 지금 휴가를 쓰는 건 아무래도 어렵겠지.

2월 초까지만 버티면 대리 달 수 있으니까 유급 휴가는 다음에 쓰든가 해야겠다.

“있잖아, 지안 씨. 사실 나 연말에 노천탕 있는 리조트로 바캉스 가려고 휴가 쌓아 놨었거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손님이 없는 틈을 타 프레드 선배가 우울한 표정으로 다시 말을 걸었다.

“근데, 저번에 라라비아 출장 가고 그러느라 휴가 신청하는 거 까먹었지 뭐야.”

“헐….”

1년 동안 쌓아 둔 휴가를 쓰지 못하고 해를 넘기다니. 그건 너무 불쌍하잖아.

“다 그 대머리 페르시 탓이네요.”

“내 말이. 그 자식만큼은 감방 보냈어야 했는데.”

고양이 귀가 달린 기름진 대머리 사장, 펠룩스 토니토의 느끼한 미소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차피 전 부인이 민사로 조질 예정이긴 한데 저번에 협박하는 김에 머리통 한 대 세게 후리고 올 걸 그랬나.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선배. 대머리 자식들이 나쁜 짓 하는 거 하루 이틀인가요.”

“하긴. 뉴스에서 횡령이나 배임했다고 보도되는 놈들 보면 전부 머리 매끈하게 벗겨져 있더라고―”

-콰앙!

프레드 선배가 거기까지 말한 순간, 누군가가 은행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왔다.

매끈한 대머리와 그 아래에 보이는 잘생긴 이목구비. 스리피스 슈트를 입은 미중년은 나와 프레드 선배를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대머리의 욕은 거기까지다, 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빛.

“아….”

아는 얼굴이다.

면접관들 중 유일하게 섞여 있던 다른 차원의 인간.

내게 짜증 나는 질문만 골라 던져 대던 성격 완전 더러운 남자.

저 인간이 왜 서부 포독스 지점에…?

“에에에에엘라마 차장님?!”

프레드 선배는 자리에서 번쩍 일어나 90도 폴더 인사를 박는 것도 모자라 벙 쪄 있던 나를 강제로 일으켜 세워 인사시켰다.

“비효율적이다. 가만히 앉아 있도록.”

엘라마 차장이라고 불린 사내는 카리스마 넘치는 목소리로 그렇게 한마디 던지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점장실로 직행했다.

우린 그가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아는 사람이에요?”

“슬리크 엘라마 차장. 본점 기업여신부 실세야. 최연소로 차장 단 엘리트인데 행장님 라인에서 가장 실력이 좋다고 평가되는 분이지.”

프레드 선배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런 사람이 날 면접 봤던 건가.

면접관은 시간 남는 지점장들이 자주 맡는다고 들었는데 제일 바쁜 부서인 기업 여신부 차장 같은 분이 왜….

“좋지 않은 예감이 드네요.”

“뭐지. 내부 감사인가?”

그때였다.

-콰앙!

지점장실 문이 부서질 기세로 열리더니 안에서 차갑게 굳은 표정의 델 몬테 지점장이 엘라마 차장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김지안 계장, 잠시 이쪽으로.”

“…저요?”

“3초 드리겠습니다.”

“…….”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진 모르겠는데 혹시 나 X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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