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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9화

마침 델 몬테 지점장은 차장의 보고를 받고 있던지라 우리는 지점장실 앞에서 잠시 대기해야만 했다.

“그러니까,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이 영 좋지 않은 일을 꾸미고 있다는 거지?”

그사이 프레드 선배는 조심스럽게 내가 무엇을 봤는지 확인하려 했다.

“네. 확실해요.”

“으으음….”

내가 각성한 직무권능인 여신판단女神判斷은 내 눈에만 보이는 여신상이 든 저울로 상대의 잠재력 등을 판단하는 능력이다.

접시 위에 올라가 있는 건 각각 왼쪽이 부정적인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검은 공, 오른쪽이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 주는 흰 공이다.

흰 공이 검은 공보다 무거우면 저울 눈금은 우측을 가리키고, 그 기울기가 클수록 대상이 가까운 장래에 돈을 벌 수 있는 잠재력은 높다.

다만, 이번 일은 평소처럼 쉽게 생각할 수 없는 케이스였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저울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지만 하얀 공이 검은 기운에 의해 완전히 침식되어 있었다.

흰 공의 침식은 대상의 심각한 도덕적 타락을 의미한다.

탈법에 가까운 수단을 쓰는 등 미적지근한 수준의 모럴 해저드를 범하는 정도가 아니라 법을 어기는 것도 불사할 거라는 뜻.

물론 저울이 보여 주는 건 어디까지나 가능성과 잠재력에 지나지 않는다.

돈을 벌 잠재력을 지닌 고객이 사고를 당하거나 자신의 나태함으로 인해 포텐셜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원리로 내부 고발자 등의 존재로 인해 회사가 심각한 불법 행위를 저지르지 못하고 브레이크가 걸리는 경우도 당연히 있으리라.

…따위의 말을 하고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이 이미 15억을 대출받고 만기 연장과 추가적인 융자를 요청한 상대가 차원신용금고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15억 갚지 않은 상태로 50억 굴덴을 더 빌려달라니. 심지어 돈 빌린 다음 무슨 일을 벌일지도 알 수 없고.”

“이건 시한폭탄이에요. 추가로 대출을 승인해선 안 되고 빌려준 15억도 당장 회수해야 해요.”

“놈들이 이미 탈세라도 하고 있다면 국세청이 딱지 붙이고 탈탈 털어가는 동안 우린 손가락 빨고 있어야 해.”

“절대 그렇게 되게 두지 않을 겁니다.”

나는 차원신용금고의 행원으로서 내가 본 것을 묵과할 수 없다.

차장이 나온 것을 확인한 우린 시선을 곧바로 문을 열고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 * *

“그렇군요… 김지안 계장의 직무권능으로 거기까지 확인이 가능했을 줄이야.”

“예. 그렇습니다.”

“확실히 유용한 능력입니다.”

다행히도, 걱정과 달리 델 몬테 지점장은 트집 잡는 일 없이 내 말을 믿어 주었다.

“직무권능은 승진할수록 강해집니다. 대리 진급이 기다려지는군요.”

“감사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대뜸 칭찬부터 들을 줄은 몰랐다.

고객을 의심했다고 혼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으니까.

“은행은 범죄에 휘말려선 안 됩니다. 아무리 예대마진이 중요하다고 해서 고객님의 소중한 자산을 양심 없는 작자들에게 빌려줄 순 없죠. 프레드 대리.”

“예. 지점장님.”

“직무권능을 발동하세요.”

“…여기서 말씀이신가요.”

“네. 저는 김지안 계장의 말을 믿지만 직접 행동에 나서려면 강한 확신이 필요합니다.”

“…….”

“그들이 범죄를 획책하고 있다면 장부에 흔적이 남아 있을 터. 프레드 대리의 능력으로 확인하면 답이 나오겠죠.”

“으음….”

프레드는 밋밋한 코를 손으로 가리고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저러는 걸까.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엄청 싫은 표정이네요. 어떤 직무권능이길래….”

“프레드 대리의 직무권능은 본점 인사부에게 특별 관리 지정을 받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에게 알려지면 곤란한 힘이다 보니 저를 포함한 몇 명 외엔 상세를 알지 못하죠.”

“……?!”

처음 듣는 얘기였다.

고객의 잠재력을 보는 내 직무권능도 그런 까다로운 취급을 당하진 않았는데 대체 어떤 능력이길래 저런 얘기가 나오는 걸까.

“게다가 유용함 이상의 위험을 내포한 힘인지라 직속 상사의 허락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진짜예요, 선배?”

프레드는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쓸 만하긴 한데 ‘리스크’가 커서 어지간하면 사용하기 싫어.”

“대체 어떤 리스크가….”

“지안 씨 저번에 3-1차원에서 이상한 훈련 받았다고 그랬지? 그, 눈물 콧물 다 짜내는 거.”

“화생방 훈련이요?”

“그거 비슷하다고 보면 돼. 지안 씨가 고객의 단기적인 잠재력을 보는 것처럼 나는―”

프레드는 배지를 건드려 직무권능을 발동하고 재무제표와 회계 장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비장한 얼굴로 서류에 코를 가져다 대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분식 회계가 발하는 악취를 맡을 수 있거허으응.”

-꿈틀

1초도 지나지 않아 의자에서 굴러떨어진 프레드는 흰자를 까뒤집고 경련을 일으켰다.

“선배? 프레드 선배?”

움찔대는 메기 수염.

어깨를 흔들어 봤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죽은 거 아니죠?”

“악취가 심해서 기절했을 뿐입니다.”

분식 회계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직무권능.

과연, 유용하지만 상응의 리스크가 동반된다는 프레드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아무리 사용하는 데 따로 대가가 필요 없다고 해도 이런 능력을 상시 발동하고 다녔다간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라겠지.

“그나저나 이로써 확실해졌군요. 에이펙즈가 구린 일을 꾸미고 있는 건.”

나는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놈들이 재무제표나 장부를 조작한 건 단순히 실적을 포장해 추가로 대출을 받기 위해서였다.

대출받은 돈을 앞으로 어디에 어떻게 써먹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어느 쪽이든 부정한 수단으로 돈을 벌려 한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지만.

“어떻게 하실 생각인가요.”

“당연히 50억 굴덴의 추가 대출을 거절하고 과거 대출한 15억을 회수해야죠.”

“당장 거부 의사 밝히고 돈 받아올까요?”

“그건 명분이 없어서 어려워 보이는군요. 저흰 아진 명확한 회계 부정의 증거를 잡아내지 못했잖아요.”

한동안 금속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던 델 몬테 지점장의 유리 안구에 불빛이 들어왔다.

“일단은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이 무엇을 꾸미는지 직접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가시려고요?”

“설마요.”

“그럼 오늘 영업 마치고….”

“프레드 대리가 일어나면 바로 출발할 겁니다. 준비하세요.”

내 첫 외근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 * *

나는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경리부 직원을 먼저 회사로 돌려보냈다.

기념품을 준비해 전달할 겸 회사로 찾아가겠다는 게 우리가 생각해 낸 구실이었다.

“굳이 직접 오실 필요까진….”

“대표님께도 인사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정 그러시다면.”

영 꺼림칙해 하는 표정. 아무래도 무언가 수상하다.

“김지안 계장, 기념품은?”

“달력 챙겨 뒀습니다.”

이쪽 차원은 지구와 몇 달 정도 시차가 있어 아직 11월이다. 아무래도 기념품은 달력으로 고르는 게 제일 무난하겠지.

“화보 달력인가요?”

“예.”

차원신용금고는 마케팅의 일환으로 행내에서 외모가 뛰어난 행원들의 사진을 넣은 달력을 매년 제작해 고객에게 선물하고 있었다.

은행원의 화보 달력, 한국에서 상상도 못 할 물건이긴 하다.

다만, 몸짱 소방관 달력 같은 것도 불티나게 팔리지 않나.

같은 원리로 자기 관리 잘하는 사람은 은행에도 많으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물론 업종의 특성상 노출도가 높은 의상을 착용하는 건 금지되어 있긴 하다.

은행은 보수적인 이미지로 먹고사는 장사니까.

“준비한 건 A타입인가요?”

“잠시만요.”

나는 서둘러 달력을 확인했다.

여성 행원과 남성 행원이 단정한 근무복을 입은 사진이 보였다.

“A타입입니다.”

두 성별의 행원 모두가 찍혀 있는 가장 무난한 초이스.

이거면 괜찮겠지.

“거기에 추가로 후달라야 세트도 가져가죠.”

“네?”

그거 비싼데.

“후달라야 세트요?”

후달라야 세트는 12차원 올림포스와 더불어 높은 산이 많기로 유명한 23차원의 특산품을 사용한 입욕 세트였다.

후달라야의 핑크색 소금이 원재료인데 차원신용금고가 고객에게 증정하는 기념품 중에서도 특히나 유명해 인터넷에서 중고 거래 사이트에 올라오는 일도 있었다.

직접 써 본 적은 없지만 신입 행원 연수 때 모 지점의 과장이 이걸 몰래 떼어다 팔았다가 잘렸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다.

후달라야 세트를 선호하는 건 주로 젊은 여성 고객.

인기도 높고 비싸게 팔리는 물건인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돈 떼어먹을 거 같은 사람한테 주기엔 아까운 선물인데.

“재고 얼마 없는데 굳이 가져가야 할까요?”

“몇 년 전부터 에이펙즈 엔지니어링 대표가 후달라야 핑크솔트 입욕 세트를 챙겨 달라 하더군요. 가족분 선물해야 한다고.”

“정말로 가족한테 주는 거라면야. 바로 두 개 더 가져오겠습니다.”

“하나면 충분합니다. 오래전에 이혼했다고 들었거든요.”

가뜩이나 건설 회사 대표라는 직함에 편견이 있던 데에다 직무권능으로 회사가 불법적인 수단을 사용해 큰돈을 벌 거라는 사실까지 확인한 참이어서 그런 걸까.

어떤 악인도 자식에겐 상냥한 아버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어우, 머리야.”

“선배 정신이 들어요?”

후달라야 핑크솔트 입욕 세트까지 챙긴 즈음 프레드 선배가 정신을 차렸다.

그걸 확인한 지점장은 합금으로 만들어진 손바닥을 열어 안에서 하얀 알약을 하나 꺼냈다.

“두통약입니다.”

“감사합니다….”

프레드는 냉수를 한 잔 가져와 약을 삼켰다.

“왜 두통약이 손에서 나오는 거죠….”

“부하를 챙기는 것도 지점장의 일이니까요.”

기계 종족인데 묘하게 따뜻하다, 이 사람.

머리통 모양만 보면 영락없이 사일런트 힐의 삼각두인데.

“준비됐으면 출발합시다.”

우린 짐을 챙기고 곧바로 차원신용금고 서부 포독스 지점을 나섰다.

지점장의 차는 꽤나 값이 나가는 고급 세단이었다.

본부장급이 아니라 아직 수행기사는 없지만 차와 시계만 봐도 그의 연봉이 얼마나 될지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저 쓰러져 있는 동안 어디까지 얘기가 진행되었는지만 좀 알 수 있을까요.”

“김지안 계장이 설명해 줄 겁니다.”

내가 대략적인 이야기를 마치자 프레드 선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액셀을 밟았다.

“그렇게 되었군요. 근데 정확히 누가 범법을 저지르려 하는지 찾아낼 수 있을까요?”

“그건 제가 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나는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사무실에 있는 전원에게 제 직무권능을 사용하면 될 것 같아요. 직원들 이름이야 어떻게든 알아볼 수 있을 테니.”

“훌륭합니다.”

“지안 씨 머리 좋은데?”

“그렇게 놀랄 일인가요….”

“아니. 새삼스럽지만 대단한 직무권능이다 싶어서.”

하긴, 내가 생각해도 이 힘은 대출 심사라든지 그런 분야에선 가히 치트키 수준의 성능을 발휘한다.

이번에도 분명 빌려준 돈을 돌려받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다.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의 대출 만기가 연말이었던가요.”

“예.”

“만기를 연장하지 않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지만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에겐 최대한 늦게 통보하도록 합시다.”

“만일 그 전에 저쪽이 묘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구실을 찾아서 만기 이전에 원금과 이자를 전액 회수해야겠죠.”

백미러에 비춘 지점장의 얼굴은 태엽장이 특유의 차갑고 기계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들이 무슨 범죄를 저지르든 차원신용금고가 엮이게 둘 순 없습니다.”

* * *

30분 후, 우린 건설 회사 사무실이 입주한 건물에 도착했다.

“갑시다.”

차를 세우고 달력이 든 봉투를 챙겨 8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직진. 조용한 복도를 지나 도착한 입구.

-딩동

어떻게 된 건지 평일 오후인데 인터폰을 눌러도 반응이 없었다.

“뭐지.”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잡아당기자 저항 없이 열리는 유리문.

“안녕하세요, 차원신용금고에서 왔습니… 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나도, 선배도, 지점장도 얼어붙고 말았다.

“…….”

“…….”

“왜 아무도 없는 거죠.”

우릴 기다리고 있던 건.

직원, 서류, 컴퓨터, 팩스, 전화기, 정수기 등.

일반적인 회사를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요소라곤 무엇 하나 남지 않은.

“…그걸 알아보는 게 저희 일이겠죠.”

텅 빈 사무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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