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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200)

잠재력을 보는 은행원 008화

“완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아아…!”

취기가 올라온 밀라는 웃는 얼굴로 헤롱대며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 녀석 술만 들어가면 나한테 앵기려 들어서 문제다.

“혼자 돌아갈 수 있겠어?”

“어어… 초큼 무릴지도?”

“…….”

“오빠가 데려다줄래요?”

밀라는 큼지막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귀찮은데….”

나 돌아가서 영화 봐야 한다고.

“아이 진짜 이 오빠는!”

녀석은 내 소매를 붙잡더니 대로변으로 걸어가 택시를 불러 세웠다.

“에잇!”

날 강제로 뒷좌석으로 끌어들이고는 출발.

“기사님 퀸 누투리어스 스트리트로 가 주세욧!”

“뭔 놈의 힘이….”

어째서인지 시선을 외면하는 다크엘프.

밀라는 등을 돌린 자세 그대로 5분도 지나지 않아 작게 코를 골며 잠에 들었다.

내 옷을 붙잡은 손은 그대로.

“…….”

밀폐된 공간. 가까운 거리.

그제야 깨달았다.

“…샴푸, 좋은 거 쓰네.”

내일 브랜드 물어봐야겠다.

나도 사야지.

* * *

본점 근무자 사택 앞에서 밀라를 깨워 내려준 다음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밥값이 꽤 나왔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밀라가 준 정보가 상당히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출장소인가….”

옷을 갈아입고 영화를 틀었지만 머릿속에 아까 들은 이야기가 자꾸 맴돌아 집중할 수 없었다.

-삑

나는 TV를 끄고 밀라가 준 정보를 복기하기로 했다.

당연한 얘기지만 출장소가 뭔지는 알고 있었다.

출장소는 작은 규모의 점포를 가리키는 단어인데 지점의 차이는 비단 규모만이 아니었다.

지점장을 맡는 게 부장급인 것과 달리 출장소장은 부부장이나 차장급이 담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출장소에서 근무하는 인원의 숫자는 4~5명 정도.

평범한 지점처럼 시가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지만 시, 군, 구청 혹은 대기업과 공기업 본사나 공장, 병원 등에 자리 잡은 출장소도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지점보다 규모가 작은 만큼 출장소에서 일해 봤자 대형 지점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실적을 쌓는 것이 느려 승진에 불리하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출장소에서 일할 경우의 이야기.

공중파 방송국, 카지노, 국회 공항 등에 위치한 출장소는 흔히 특수영업점이라 불리며 출세 코스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곳에는 임원 승진을 앞둔 본부장급이 지점장을 맡게 되어 있으며 배치되는 행원 역시 전부 초특급 에이스다.

시청이나 국회 등 큼지막한 지점이 들어갈 수 없는 장소에 작은 출장소가 배치되는 경우 역시 마찬가지.

특수영업점은 탁월한 업무 능력은 물론 높은 분들을 상대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 접대 스킬을 지닌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선택받은 일자리다.

그런데, 개중에서도 이번에 신설되는 출장소는 상당히 유독 특별한 포지션으로 분류되는 모양이었다.

“특수영업점인 데에다 혁신 점포라….”

신설되는 출장소는 새로운 기술이 시범적으로 도입되는 점포이기도 했다.

듣자 하니 차원신용금고가 진출하지 않은 3-1차원의 지구에 있던 나를 본점으로 불러오는 데엔 상당한 노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내가 지나간 회전문에는 차원신용금고가 투자한 회사가 개발해 특허를 신청한 마도공학 차원 도약 기술이 사용되었다나 뭐라나.

그땐 아직 개발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이후 지속적인 개량을 거쳐 기술을 완성한 모양이었다.

밀라가 말하길, 이사회는 이 기술을 이용해 현지에 점포를 내지 않고도 여러 차원의 고객을 유치해 올 생각인 듯했다.

요약하면 6-2차원에 둔 점포로 다른 차원의 고객들이 자유롭게 건너와 은행 서비스를 이용하게 만들겠다는 얘기.

그 계획의 선봉이자 실험장이 될 예정인 점포가 바로 새로 개설될 차원신용금고 최초의 다차원 출장소다.

이사회는 본점과 지점을 통틀어 최고의 실력을 가진 행원을 선발해 이곳에 투입할 예정이라고 한다.

‘사수가 혁신 점포 얘기는 절대 어디 가서 떠들지 말라고 그랬어요. 다른 동기들한테도 얘기한 적 없고요. 지안 오빠한테만 처음으로 말한 거예요.’

밀라는 자신이 본 서류가 바로 다차원 출장소에서 일하게 될 행원들의 후보를 적은 명단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내 이름이 포함되어 있다는 건 직무권능에 관한 이야기가 이미 윗선에 보고되었다는 거겠지.

“누가 이런 고마운 짓을 벌였으려나….”

행장이 날 직접 꽂았을 가능성은 없다.

아무리 내가 은행장의 낙하산이라 해도 만난 적도 없는 은행장이 내 직무권능을 알고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

만일 그가 내 능력도 모르고 압력을 가해 혁신 점포에 배치될 행원의 후보에 꽂아 넣으려 했다면 내부 반발 때문에 무산되었을 터.

그러니까 명단에 내 이름이 올라간 건 실적보단 직무권능이 높게 평가된 결과일 것이다.

“…흠.”

폴로미 대리가 찾아온 건 후보인 나의 능력에 관해 구체적인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겠지.

승진에 도움이 될 거 같아 딱히 감추고 다니지 않았으니 이번 일이 생기기 전에 내 직무권능이 어떤 건지 본점에 보고한 사람이 있었을 거다.

“밀라랑 아이작, 과타노차에 이로울….”

오늘 만난 폴로미 대리 외에 내 능력에 관해 아는 사람의 숫자는 몇 없었다.

각성 직후 톡방에서 정보를 공유한 특채 동기 넷과 프레드 대리, 병가 중인 과장, 출장 간 부지점장, 델 몬테 지점장까지 총 여덟.

동기들이나 프레드 대리는 친하니까 나를 밀어주거나 당겨 주려 해도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인사부에 누굴 추천할 만큼의 입지를 지닌 사람은 그중에 없다.

본점의 높으신 분들에게 내가 어떤 직무권능을 지니고 있는지 보고한 건 아마도 과장, 부지점장, 델 몬테 지점장의 셋 중 하나.

“의외네.”

사실 그들과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눈 적은 없어서 누가 날 도와준 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건 저번에 취재진이 몰려온 날 있던 델 몬테 지점장인가.

“가만… 파벌이 세 개 있다고 그랬나.”

문득, 프레드 선배가 담배 피우다 알려 준 차원신용금고의 세력 구도에 관한 이야기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내 직무권능에 관해 윗선에 보고한 게 행장의 파벌에 속한 사람이라면 납득이 간다.

행장의 낙하산이라고 소문이 난 나라면 밀어줄 만하다고 판단한 걸까.

아직 수습 기간도 끝나지 않은 신입 행원이 한 건 해냈으니 직무권능의 유용함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고 바로 인사부에 추천을 넣은 거겠지.

출장소에서 일하는 행원의 숫자는 많아 봤자 넷에서 다섯이 끝.

혁신 점포의 실적에 숟가락을 얹기 위해 각 파벌은 분명 자신들의 입김이 닿는 자를 꽂아 넣으려 할 터.

하지만 각 파벌이 한 명씩 심복을 심는다면 자리가 애매하게 남는다.

한 파벌이 추가로 베테랑 행원을 집어넣으면 균형이 무너지니 아직 입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신입 행원을 넣어 불만을 잠재운 걸지도 모르겠다.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려는 부분도 없진 않으려나.”

어쨌든 신설되는 출장소는 고속 승진의 지름길.

이유야 어떻든 비집고 들어가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내가 승진을 바라는 건 연봉이 올라가는 것 이상으로 더 큰 권한을 손에 넣기 위해서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나와 같은 비참한 경험을 겪지 않게 하겠다는 목표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나는 더욱 많은 자금을 그들에게 융통해 줄 수 있겠지.

“마냥 들떠 있을 순 없겠네.”

결과적으로 내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상황이 흘러가곤 있지만 후보에 포함되었다고 안심하긴 아직 이르다.

윗사람들이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인재가 나만 있는 건 아닐 테니까.

특채 동기인 아이작 외에도 공채로 뽑힌 다른 행원들 중엔 실력 좋은 신인들이 존재할 것이다.

게다가 그들에겐 내겐 없는 혈연, 학연, 지연이 있다.

그러니까 치열한 경쟁을 뚫고 출장소로 가기 위해선 더 많은 실적을 쌓아야만 한다.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이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내가 원한다고 실적을 물어올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적극적으로 외근을 나가 기업인들과 골프 치면서 영업하는 건 차장이나 부지점장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계장 나부랭이인 내가 할 수 있는 건 운 좋게 병가 중인 과장님 대신 대출 창구를 찾는 고객을 응대하는 거 말곤 없다.

그거랑 열심히 금융 상품을 팔거나 신용 카드 가입을 권유해 더욱 많은 수수료 수익을 은행에게 안겨 주는 게 한계겠지.

“뮤지스 파트너즈 끌어온 게 잘 반영되면 좋을 텐데.”

폴로미의 보고서를 보고 본점의 높으신 분들이 내 능력을 높게 평가해 줬으면 좋겠다.

석 달 내에 추가로 굵직한 실적을 올릴 수 있으면 선정될 확률이 올라가겠지만, 과연 그게 가능하려나?

이건 운이 따라 주지 않으면 불가능하니까 고민해 봤자 소용이 없다.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자야겠다.”

그런 의미에서도 오늘은 이만 눈을 붙여야겠다.

내일도 출근해서 일해야 하니까.

* * *

다음 날.

나는 손님이 없는 틈을 타 기지개를 켜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돌아본 오늘 하루는 더없이 평화로웠다.

대출을 받으러 온 고객은 개인이 셋. 법인이 둘.

저울이 무난하게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어서 서류만 꼼꼼하게 확인한 다음 신청서를 작성해 프레드 선배에게 제출했다.

다만, 수신 업무는 평소보다 조금 바빴다.

포독스시에 있는 CG 제작 전문 업체 몇 곳의 직원들이 점심시간에 몰려와 계좌를 개설했기 때문이었다.

“오늘 무슨 날인가.”

프레드 선배는 신기하다는 듯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물론 나는 곧바로 그들의 회사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했기에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뮤지스 파트너즈 자회사 직원분들인가 봐요.”

“아하….”

모회사의 주거래 은행이 바뀌었으니 자회사들도 따라오는 거려나.

뮤지스 파트너즈 본사가 있는 곳은 연수원이 있는 12차원 올림포스산인지라 사건의 여파를 6-2차원에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맞다. 본점 동기한테 들었는데 이번에 예체능 종사자 전용 저금리 대출 상품 출시한대. 이름이 뭐였더라, 플랫론이었나?”

“와. 플랫 씨 허락은 받았대요?”

“아무래도 그랬겠지? 1금융권 시중 은행인데.”

햇●론 같은 이름 지은 거 어느 새끼냐. 사막에다가 던져 버릴라.

“이름 부행장님이 직접 지었다더라고. 플랫 샤펜도라가 직접 광고 모델도 맡을 거 같던데.”

“어느 새끼가 아니라 어느 분이었구나.”

“방금 뭐라고 했어?”

“아뇨. 딱히.”

판사님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다 지안 씨가 플랫 샤펜도라를 내치지 않아서 가능했던 일이야.”

“그런 얘길 들으면 좀 쑥스럽네요.”

“자랑하고 다녀도 돼. 진짜로.”

새삼스럽지만 자신이 어떤 일에 종사하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은행은 고객이 맡긴 소중한 돈을 대출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빌려준다.

고비를 맞이한 자, 꿈을 좇는 자, 더욱 큰 기회를 잡으려는 자.

그들에게 손을 내밈으로써 세상이 조금 더 좋은 곳으로 변하도록 돕는 것이 은행과 은행원의 사회적 책임이다.

본점 여신심사부 근무자, 품의서에 사인하는 지점 행원, 그리고 대출 창구에 앉은 나는 이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겨야만 한다.

“알려 줘서 고마워요, 선배.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 팍팍 들어요.”

“그래. 미래의 대부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아 보자고!”

“그렇게 말하면 제가 악당 같은데요?”

“내가 보기엔 지안 씨 자질 있어.”

프레드 선배는 실없는 농담을 던진 다음 자리로 돌아갔다.

그가 알려 준 정보는 예상했던 이상으로 내 의욕 증진에 도움이 되었다.

다음엔 누구에게 돈을 빌려줄까.

이 직무권능이 있다면 돈을 빌려주는 여신 업무에 한해 최고의 은행원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나는 10분도 지나지 않아 마냥 돈을 빌려주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B-001번 고객님. 4번 창구에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만면에 미소를 띠고 나타난 말끔한 복장의 트롤 사내.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에서 왔습니다. 대출 만기를 연장하는 데 더해 추가적인 대출을 신청하고 싶습니다.”

보아하니 내가 서부 포독스 지점에 오기 전 다른 행원이 담당했던 대출 안건인 듯하다.

전산을 확인해 보니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은 이전에 차원신용금고에서 15억 굴덴을 대출받은 기록이 있었다.

공공사업에 의존하는 중견 지역 건설 회사.

서부 포독스 지점과 거래한 지는 꽤 오래됐다.

“직접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불러 주시면 저희가 사무실로 출장 갔을 텐데.”

“아닙니다. 바쁘실 텐데 저희가 와야죠.”

여신 업무는 출장이 일상이라고 들어서 외근 나가는 걸 기대했지만 아직 경험은 없다.

다음에 프레드 선배한테 부탁하면 데려가 주려나.

“네. 서류 확인 끝났습니다.”

가져온 재무제표와 회계 장부를 보는 한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이제 신청서를 작성하면서 법인을 대상으로 직무권능을 발동하면―

-파아앗

성룡처럼 코가 큰 트롤의 머리 위에 나타난 저울은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문제는, 오른쪽 접시 위의 하얀 공이 곰팡이가 핀 것처럼 기분 나쁜 검은색 기운에 침식당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

“제 얼굴에 뭔가 묻어 있나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잠시 필요한 서류 챙겨오겠습니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프레드 선배를 향해 수신호를 보냈다.

긴급 상황이 발생했음을 나타내는 사인.

“무슨 일이야, 지안 씨.”

“일단은 지점장실로 같이 와 주시죠.”

잊고 있었다.

여신 업무는 돈을 빌려주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회수할 방법이 없다면 대출을 승인해선 안 된다.

대출한 돈은 반드시 회수해야 하며 그게 어렵다면 채권을 팔아서 손실을 보전해야 한다.

우리가 대출하는 건 은행을 믿고 고객들이 맡긴 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기준으로 봤을 때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은 돈을 빌려주어선 안 되는 상대였다.

“무슨 일이야. 직무권능으로 뭘 봤길래 그래.”

“저울이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어요.”

“그거 좋은 거 아니었어?”

“예외도 있어요.”

에이펙즈 엔지니어링은 분명 조만간 큰돈을 벌 잠재력을 지닌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저울의 접시 위에 놓인 변색된 구슬은 내게 알려 주고 있었다.

“저 회사, 범죄를 저지를 생각이에요.”

놈들이 돈벌이에 사용할 수법이 더러운 것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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