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3화. 구원(救援) >
새하얀 공간이 느껴졌다.
난 눈을 감고 있는데 왜 이걸 느낄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제쳐두고 뭔가가 다가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시스템, 아니 라플라스의 악마였다.
난 분명 지옥의 대왕들을 소환하고 잠시 쉬고 있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계약이 이행되었습니다.]
[프로젝트 : 샛별이 완료되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갑자기 계약이 끝났다고 알려오는 건 뭔데.
뭐, 죄악을 전부 모으는 일이 계약의 조건이었으니 그건 그렇다 치고 프로젝트는 또 뭐야.
“아, 아.”
점차 감각이 뜨였다.
눈을 뜨자 생각했던 대로 새하얀 공간이 나를 반겨주었다.
“악마, 내 말이 전해지는 건가?”
어쩌면······.
아마 지금이라면 내 말이 시스템에게 전해지지 않을까.
확신에 가까운 직감이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Player,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자. 말씀하십시오.]
상당히 거창한 호칭이 붙었다.
그보다 말이 통한다는 걸 알았으니 물어봐야지.
“여긴 어디지.”
[계약의 공간입니다.]
아, 그런가.
잊고 있었는데 이 녀석과 처음 계약을 맺을 때도 이런 공간이었던 것 같았다.
“계약이 이행되었다면 약속했던 건······.”
[그 또한 바로 이행되었습니다.]
나는 의식을 집중해서 네브로의 존재를 확인했다. 여기가 시스템이 말한 계약의 공간이라 느껴지지 않는 건지 아니면 계약이 이루어졌기에 떠난 건지 확인이 되지 않았다.
“확인하고 싶어.”
[전임 계약자의 경우 동의만 받아내면 이곳으로 불러낼 수 있습니다.]
일리아스를 만날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 모든 게 이 악마 녀석이 만들어낸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그조차도 확인해보고 싶었다.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극히 시스템스러운 말을 한 악마는 잠시 침묵했다.
-띠링!
[상대가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순간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소녀가 내 옆에 나타났다. 아무 전조도 없이 나타나서 나와 그녀가 둘 다 당황하고 있을 때, 악마가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남은 시간 : 2분 31초]
일리아스가 이 공간에 있을 수 있는 시간인가?
“당신이 천사님?”
일리아스가 말을 걸어왔다. 루나와 너무도 닮은 외모라 살짝 이질감이 느껴졌지만 이내 반응했다.
“맞아.”
“일리아스가 생각했던 모습이랑은 조금 다르네.”
궁금한 게 있었다.
하지만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기색을 읽었는지 일리아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246번.”
“······.”
“결국 일리아스보다 천사님이 먼저 해결해버렸어.”
무려 246번의 회귀.
내가 겪었던 게 51번째였으니 그 뒤로 무려 200번의 가까운 회귀를 더 진행했다는 이야기였다.
“늦어서 미안하다.”
“무슨 소리야. 결국 이렇게 일리아스랑 네브로를 구해줘 놓고.”
“네브로는 괜찮은 건가?”
시간선이 꼬여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일을 해결했지만 그렇다면 나와 지금껏 함께했던 원죄는 어떻게 되는 걸까.
“응, 무사해.”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로?”
“일리아스가 굳이 거짓말을 왜 해. 거짓말이었으면 애초에 계약을 연장했을 거야.”
일리아스의 눈이 순간 스산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눈빛을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무려 241번이라는 회귀를 거친 만큼 그녀도 결코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음을······.
“일리아스는 절대 네브로를 포기하지 못하니까.”
살짝 무섭게 까지 느껴지는 그 집착에 멀쩡할 거라 생각했던 일리아스가 사실 어딘가 망가진 건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도 잠시 원래의 눈으로 돌아온 일리아스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시간이 얼마 없네. 정말로 고마웠어, 천사님.”
내미는 손을 잡았다. 혹시나 했지만 확실한 온기가 느껴졌다.
“우리를 구원해줘서······정말 고마워.”
[남은 시간 : 0초]
마치 나타났을 때와 같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일리아스가 사라졌다. 그러나 손에 남은 온기만큼은 방금 있었던 일이 절대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간이 다됐습니다.]
“네브로도 멀쩡한 거야?”
[Player, 멸망을 주시하는 관찰자는 Player,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자의 도움으로 원래 세계선에 돌아갔습니다.]
“이게 꿈이 아니었으면 좋겠네.”
나는 잠시 볼을 꼬집다가 이내 악마가 처음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까 프로젝트 샛별 뭐라고 했던 것 같은데 프로젝트는 뭐지?”
[탄생 신화입니다.]
“탄생 신화?”
뜬금없는 말에 의아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니까 샛별의 탄생 신화라는 이야기인가?
[규격 외의 존재들은 모두가 각각의 탄생 신화를 가지고 태어납니다. Player께서 알고 계시는 초월자, 그들 중에서도 특별한 몇몇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이해가 안 가는데. 처음에 프로젝트가 완료되었다고 하는 건 누군가의 탄생 신화가 만들어졌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아무리 들어도 저 프로젝트 샛별이라는 탄생 신화는······.
“샛별은 날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칠대죄악을 모두 모은 운명의 계승자가 바로 Player,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자이십니다.]
결국 난 초월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인가.
하긴 오러 비기를 느낀 순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잠시 스치긴 했었다. 감히 인간으로서 낼 수 없는 초월적인 힘.
한편으로는 왜 그만한 재능과 검술 실력을 가지고도 지금껏 오러 비기를 익히지 못했는지 이해가 되는 능력이었지.
너무나 강대한 오러 비기였기에 그런 능력을 지니고도 익힐 수가 없었던 거다.
[궁금한 건 다 풀리셨습니까?]
궁금한 거?
이왕 이렇게 된 거 질문 거리를 조금 더 고민해보았다.
“묵시록의 네 기수에 대해 궁금한 게 남아있어. 그 녀석들의 정체가 뭐지?”
단순히 보스 몬스터라고 생각했지만 적기사와 청기사를 보니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분명 죽음의 청기사가 계약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았었는데 어쩌면 라플라스의 악마와 관련된 건 아닐까하는 확신이었다.
[탄생 신화를 위한 사이드 스토리였습니다.]
“네가 꾸민 일이냐?”
[그렇습니다. 타차원의 존재들 중 시스템과 계약을 맺은 이들을 불러왔습니다. 목표는 갈락슈르 대륙의 멸망. 성공하면 각자 계약에 따른 보상이 있었습니다.]
악질도 이런 악질이 따로 없었다.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위해서 희생양을 모집했다는 소리잖아.
[전쟁의 적기사의 경우 경로 상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더욱 풍성해졌으니 긍정적인 변수로······.]
“난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들을수록 라플라스의 악마의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감정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놀아나고 있는 거겠지.
결국 이 모든 게 초월자 하나를 만들기 위한 이야기였다는 걸 인정하기 싫었다. 그 주인공이 나라는 사실도 싫었고.
내가 말을 막자 악마는 곧바로 화제를 돌렸다.
[새로운 세상에서, 규격 외의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건 안 된다. 내가 어떻게 일군 행복인데.
나는 의지를 일으켜 세우며 상대의 말을 부정했다.
“난 아드리아스 크롬웰.”
또박또박, 확실하게.
결코 승낙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맹렬히 휘몰아쳤다.
“새로운 세상도, 새로운 이름도 필요 없다.”
[Player께서 거절해도 시스템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나는 저항을 해보려고 했지만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검도, 마나도, 언데드도 없는 상황이었다.
우웅!
내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필사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계약! 새로운 계약을 맺겠다!”
[Player]
라플라스의 악마는 기계와 같이 대답했다.
[시스템이 여태껏 맺은 모든 계약은 Player, 가장 어두운 곳에서 빛나는 자를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프로젝트 : 샛별이 완성된 지금은 효력이 없습니다.]
“나 하나 때문에 이 지랄을 했다고, 이 개새꺄?”
이토록 무력감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나는 발버둥을 쳤지만 상황이 변하는 것은 없었다. 라플라스의 악마도 내 감정이나 상태를 따지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이럴 거면 궁금한 걸 왜 물어보라고 한 거야!”
[시스템의 의무입니다.]
이대로 허무하게 다른 세상으로 간다고?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아닌 다른 인물로?
기껏 이렇게까지 했는데 난······.
-삐빅!
그때 알 수 없는 소리가 전해져왔다.
정체를 알 수 없었기에 나는 순전히 내가 다른 곳으로 이동되는 소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삐빅! 경고!
다시 한 번 들려오는 소리.
곧이어 공간이 점차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오류]
[Player, 멸망을 주시하는 관찰자가 침입했습니다.]
라플라스의 악마가 보내는 메시지를 보면서도 사태가 파악이 되지 않는 가운데······.
[“내가 왔다.”]
시커먼 미소를 흘리는 알 수 없는 형체가 공간의 부서진 틈을 비집고 나타났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의지를 듣는 순간 단숨에 누군지 눈치 챌 수 있었다.
“네브로?”
네브로······네브로!
무사했구나하는 안도감이 전신을 물들였다. 그리고 네브로는 그런 나를 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다시 웃었다.
[“넌, 여전히 바보처럼 착하군. 날 걱정할 때냐?”]
“네가 할 말이냐? 그리고 언제 독심술까지 익힌 거냐.”
그나저나 어떻게 된 일이지? 이런 농담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경고]
[시스템 오류]
라플라스의 악마가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같은 말만 반복해왔다. 그 사이 네브로의 기운이 나를 붙잡았다.
[“네가 날 도왔으니 이제는 내가 널 도울 차례야.”]
“그게 뭔 소리야.”
[“돌아가고 싶지 않아? 소중한 사람들 곁으로.”]
네브로가 이곳에 온 이유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내용은 나를 격한 감정에 빠트렸다.
“날 돌려보내줄 수 있다고?”
[“아니. 나 혼자서는 못해.”]
이건 또 뭔 말이야. 지금 장난칠 때가 아닌데.
나도 이제는 초월에 눈을 떴다고 생각하지만 라플라스의 악마는 초월 그 이상의 존재였다.
애초에 이곳을 비집고 들어온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지만 네브로는 뭘 어떻게 하려고 여기에 혼자서······.
[“나 혼자서는 못하지만 여럿이면 가능하겠지.”]
네브로의 말이 끝나는 순간 갈라진 공간의 틈새에서 여러 기운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의 말대로 그는 혼자서 온 게 아니었다.
[오류, 오류, 오류, 오류······.]
라플라스의 악마가 같은 단어를 반복할 때마다 사방이 메시지창으로 어지러워졌다.
[Player, 모든 것을 내려다보시는 지배자······.
Player, 영겁과 찰나의 사이에 선 자······.
Player, 죄를 사한 자······.
Player, 그루터기에 세월을 새기는 자······.
Player, 썩은 희망을 속삭이는 자······.
Player, 기억 끝에서 망각하는 자······.
Player, 제 꼬리를 물고 있는 자······. Player, 궁극의 지혜를 추구하는 자······.
Player, 빛을 추모하는 자······.
Player, 순간의 죽음을 품은 자······. ]
메시지가 사방을 감싸며 주위를 현란하게 물들였다.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호칭이 눈부시게 다가왔다.
[“이제 알겠냐? 널 구하러 왔다는 걸.”]
네브로의 웃음소리가 선명해졌다.
< 413화. 구원(救援)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