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2화. 인연 >
오러 비기.
오러를 수련한 검수가 깨우치게 되는 궁극의 비기. 그 과정에서 얻은 모든 깨달음과 경험들이 녹아들어 독자적인 기술로 발현된다.
그리고 내 오러 비기는 어쩌면 나의 정체성이라고 볼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이었다.
쩌저적!
갈락슈르에 금이 가며 그 틈 사이로 오색찬란한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네브로의 과거에서 보았던 그 색깔이었다.
“친구우우.”
루나가 당황한 눈초리로 나를 응시했다. 그런 루나를 향해 한 차례 눈을 맞춰주며 앞으로 나아갔다.
“아드리아스?”
“선배!”
“아드리아스 크롬웰!”
주변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내 목표는 오로지 눈앞에 있는 이계의 문.
기형의 존재들과 싸우고 있던 이들도 이내 내 등장을 눈치 채고 낯빛이 흔들렸다.
“어째서 서있는 거냐.”
“주군! 성치 않은 몸이니 물러나십시오!”
“형님······.”
난 멈추지 않는다.
이까짓 녀석들이 내 행복을 부수게 둘 수는 없었다.
[“죽으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냐.”]
네브로가 한 소리해왔지만 무시했다.
[“어차피 오만을 사용한 시점에서 의미가 없는 소리지만 하나만 물어보자. 그걸 사용한다고 이걸 막을 수 있다고 보냐?”]
“왜 막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오히려 의문이군.
감히 저 따위 기형의 존재들이 날 어찌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오만에 완전히 먹혀버렸군.”]
“난 고작 죄악 따위한테 먹히지 않아.”
[“그걸 먹혔다고 하는 거야.”]
콰장!
갈락슈르의 진화가 끝났다.
동시에 나를 짓누르고 있던 한계도 부서졌다.
[경고! 시스템의 영역을 벗어난 힘입니다!]
오러 비기, 진화로 이루어낸 궁극의 검술.
-띠링!
[일시적으로 ???의 검술이 천재 등급에서 ?? 등급으로 진화했습니다.]
진화를 한 갈락슈르와 함께 한계를 뛰어넘은 검술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뚫어보았다.
만류귀종이라고 했던가.
오러 비기를 통해 잠시 동안 진화시킨 검술은 단순히 ‘검’이라는 영역을 벗어나 진리를 깨닫게 만들었다.
산들바람이 말을 거는 듯한 감촉이 읽혔다.
온갖 소리들이 전부 구별되고 그 진원지와 거리, 강약의 정도까지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예전에 보았던 것과는 달랐다. 세상을 이루는 기본적인 구조부터 모든 힘의 근원이라 불리는 마나까지 유기적으로 얽히는 게 들렸다.
‘이게 운명.’
모든 감각을 외부로 집중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운명을 느낄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는 것을.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두근!
들려오는 온갖 소리 속에서도 너무나도 선명한 심장 소리가 잡혔다. 내 가슴 속에서 차갑게 타오르는 하나의 태양.
그 태양을 통해 흐르는 수십, 수백 개의 맥박 치는 별자리가 올올이 얽혀들었다.
외부에서 내부로.
바깥의 세계가 온전히 나의 세상으로 가득 찼다.
“갈락슈르.”
이계의 문? 이계라고?
그럼 이제부터 나의 세상을 보여주겠다.
진화로 인해 갈락슈르의 봉인이 풀렸다. 그 안에 모여 있는 신들의 기운이 이내 주변을 진동시키고 내 손짓에 따라 공간을 가르기 시작했다.
찌이익!
허공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은하수와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신들의 기운을 모은 갈락슈르는 차원을 여는 열쇠. 그 열쇠가 드디어 문을 열었다.
---------!
형용할 수 없는 기운과 소음이 잠시 휘몰아치며 세상의 흐름에 간섭했다. 그 사이······.
뚜벅-
열린 공간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이런 게 가능하실 줄은 몰랐어요.”
걸음 소리는 여럿이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나를 보며 반갑게 미소 지었다.
“헤어질 때 미처 인사를 못 드렸는데 이렇게 뵙게 되네요. 다시 뵙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에요.”
반짝이는 붉은 머리카락과 투명한 피부.
인간이 아니었지만 인간보다 아름답고, 인간이 아니었지만 그 무엇보다 인간과 같은 존재.
이모탈.
‘가······넷.’
탑에서 함께 했던 동료이자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그녀가 익숙한 얼굴을 곁에 데리고 등장했다.
“와아, 여기가 은인께서 머무시는 차원이군요. 초대가 왔을 때는 저희 둘 다 놀랐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전 은인께서 감정을 되찾게 도와주신 뮤줄라라고 합니다.”
붉은 가넷과 반대되는 파란 머리카락을 지닌 그녀의 연인.
뮤줄라가 함께하고 있었다.
우우웅----
그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열린 차원의 입구에서 인물들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다.
“부름을 받고 왔소!”
“여기가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차원인가?”
탑에서 만났던 인연들이 하나둘씩 걸어 나오고 있었다. 모두 내 부름을 받고 도와주기 위해 달려온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많이 컸구나, 제자야.”
특유의 나른한 표정을 지은 ‘그’가 걸어 나왔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만은 홀로 걸어왔는데 그럼에도 주변을 압도하는 기운이 짙게 깔렸다.
걸음걸음마다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으나 그건 말 그대로 착각일 뿐. 실제로는 평범한 청년처럼 보이는 게 기운을 완전히 갈무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궁일영.”
“스승님이라 부르는 건 바라지도 않지만 너무 싸가지가 없군.”
몇 년의 세월동안 훨씬 강해진 남궁일영이 이전에는 없던 여유를 미소에 지어보였다.
“도와주러 왔다.”
그 한마디뿐이었지만 오만이 순간 깨질 뻔했다.
주르륵-
멈췄던 피가 다시 귀와 코에서 흘렀다.
이상을 눈치 챈 사람들이 나를 걱정하기도 전에 기형의 존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것들 때문에 우리를 불렀군.”
남궁일영이 나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직하게 읊조렸다.
“쉬고 있거라.”
믿음직한 말과 함께 막시민이나 다른 동료들이 처절하게 버티고 있는 현장으로 단숨에 이동했다.
“우리도 돕겠다!”
“우어어!”
나에게 도움을 받았던 탑의 여행자들이 이내 뒤따라가고 이내 가넷만이 내 곁에 남았다.
화아악!
가넷 특유의 빛무리가 펼쳐지며 내 몸을 감쌌다. 순식간에 치유되는 몸을 느끼며 억지로 버티고 있던 몸에 힘을 조금 뺐다.
강력한 기술과 힘에는 대가를 필요로 하는 법.
아무리 갈락슈르가 있고 천재급 재능을 뛰어넘은 검술이 있다지만 차원을 연결하는 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능력이었다.
콰직! 쿵!
난리가 난 전장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걸 본 것은 나만이 아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당신은 정말로 믿을 수가 없군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죽은 줄 알았던 베리얼이 목만 기어와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아마 오리지널 마법인 회로 마법으로 신체를 개조해서 살아있는 모양인데 굳이 도망가도 되는 걸 나한테까지 온 걸 보면 확실히 미친놈이긴 했다.
“물량으로 내게 대적할 상대는 없다.”
그런 베리얼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놀라운 능력입니다. 하지만 과연 저들로 이계의 문을 막을 수 있을까요?”
베리얼의 말대로 탑에서의 인연들을 불러왔지만 기형의 존재들은 반쯤 초월의 경계에 드리운 자들.
그나마 막시만과 남궁일영은 무리 없이 싸우고 있었지만 나머지는 아니었다.
“물량이라고 해놓고 정작 저 괴물들보다 숫자도 적어질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행동하실지 다음 행보가 궁금해지는군요.”
“베리얼, 넌 정말 호기심에 미쳤구나.”
아마 지금도 나를 괴롭히려면 충분히 괴롭힐 수가 남아있을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제지가 없는 걸 보면 정말로 내가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 나갈지 그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 이제 어찌하실 거지요?”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연결되어있는 차원은 아직도 닫히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이미 베리얼의 질문에 대한 답은 했다.
물량으로 나를 이길 자는 없다고.
우우웅--
찢어진 공간에서 다시 소음이 들려오더니 누군가를 뱉어내기 시작했다.
“허! 이게 뭐야!”
“말도 안 되는군.”
하나같이 강대한 기운을 가진 자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비록 내가 초월자를 직접 불러내지는 못해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초월자가 되다 못한 괴물들을 상대할 때는?
마찬가지로 초월자가 되지 못한 존재들이 상대하면 되는 법.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대가 우리를 부른 건가?”
물방울 모양의 문신이 눈 밑에 있는 파란 머리의 여인이 나를 보며 물었다. 동시에 튀어나온 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지옥의 대왕들.
그들이 이곳에 현현했다.
**
“할머니?”
마법진을 살피던 루나의 두 눈이 커지며 냅다 뛰어갔다.
“할머니!”
“루나.”
강림으로 밖에 마주치지 못했던 오관의 실체가 직접 나타났다. 그리고 마법진을 연구하던 다른 이들도 그 모습을 자연스레 바라봤다.
“도대체 저런 자들을 어디서······.”
모른이 놀라는 사이에 지옥의 대왕들도 오랜만에 느끼는 지옥 바깥의 공기를 만끽했다.
“이런 능력이 있다면 진즉에 불러주지 그랬어!”
도산지옥의 대왕인 진광이 허공을 유영하며 소리쳤다. 동시에 송제는 그답지 않게 감격에 겨운 얼굴로 흙바닥을 만져보고 있었다.
“얼음이 아니라니······.”
“해줘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런 그들을 향해 아드리아스가 오만하게 말했다.
“앞으로 남은 8분, 약 반각동안 저 문을 닫아야한다.”
오만의 남은 시간을 체크한 아드리아스의 말에 대왕들이 서로의 얼굴을 둘러보다가 이내 말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그래야 다시 바깥 공기를 마실 수 있겠지.”
“야, 아드리아스! 너 내 법당 세워준다고 했었는데 세웠어? 아무것도 안 느껴지는 거보니까 안 세운 거 같은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아드리아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오관이 먼저 움직였다.
“저들을 박멸하면 되는 것이냐.”
검은 안대로 눈이 가려진 오관이 루나에게로부터 공포검을 다시 돌려받았다.
“별 것 아니군.”
마치 초월자가 되지 못한 존재 중에서도 격의 차이가 있다는 듯 오관이 순식간에 기형의 존재 하나를 베어냈다. 그녀가 움직이자 흙을 매만지던 송제도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을 다시 불러만 준다면 얼마든 도와주지.”
우우웅!
송제의 강시들이 세상에 등장했다.
허공이 시커멓게 칠해지며 그 안에서 수백, 수천은 되어 보이는 언데드가 튀어나왔다.
“가거라! 열 놈으로 안 되면 백으로, 백 놈으로 안 되면 천으로 짓뭉개라!”
이내 얼음장과 같은 기세를 내뿜으며 송제마저 출전하자 진광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법당 꼭 세워주는 거다! 다시 불러주는 건 당연한 거고!”
이내 그의 몸에서 검들이 끝없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 작은 몸의 어디서 그렇게 많은 검이 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곧 검들은 하나의 태풀이 되었다.
“할머니, 멋있어! 친구, 최고야!”
열심히 응원하던 루나가 이내 마법진으로 달려가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모두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드리아스가 만들어낸 기적과 같은 일에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키우며 일에 열중했다.
“후우.”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기에.
아드리아스도 내색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은 가넷의 치유만으로는 부족했다. 이미 4중첩으로 사용한 죄악에 이어서 오만까지 사용한 그의 몸은 아무리 후유증이 줄어들어도 한계가 존재했다.
“이게 당신이 만든 결과입니까.”
여전히 숨어있던 베리얼이 모두가 정신없는 틈을 타 아드리아스에게 말을 걸었다.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강대하기 그지없는 존재들이군요. 그런데 그런 기술을 사용하고 당신은 멀쩡한 겁니까?”
“말 상대는 이제 하나로 충분하다.”
퍼억!
오만이 베리얼의 머리를 찍었다. 곧이어 죄악의 힘으로 베리얼의 영혼이 산산조각 나는 게 느껴졌다.
[“······고생했다.”]
“조금 쉬고 있으마. 무슨 일이 있으면 불러라.”
베리얼까지 처리한 아드리아스는 선 채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 412화. 인연(因緣)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