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8화. 마지막 전투 >
황제가 찾으러 간 거 아니었어? 근데 왜 베리얼이 저걸······.
생각해보면 이상하긴 했다.
마왕의 신체와 관련된 이벤트도 그렇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키메라도 그렇고, 게임에서 겪어본 적이 없는 일들이었다.
“베리얼, 이 키메라들도 당신이 만든 거였군요.”
내 말에 여전히 허공에서 지켜보던 베리얼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맞습니다.”
전혀 예상도 못했던 인물이 일을 꾸몄었군. 지금껏 황제가 벌인 일이라 생각해왔는데 그럼 도대체 황제는 어디 있는 거지?
“나름 계산을 하고 계획을 실행에 옮긴 건데, 당신은 매번 예측을 벗어나는군요. 설마 이 정도로 강력한 네크로맨서일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마왕은 베리얼이 가져간 겁니까?”
“마왕도 한 눈에 알아보다니 많은 걸 알고 계십니다. 역시라고 해야 할까요.”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여전히 네브로의 팔이 허공에 소환된 상태였다. 갑작스런 사태에 항복을 하고 구속되던 오러 마스터들은 이 사태가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머리를 굴리는 모습들이었다.
“황제는 어디 있습니까.”
가장 궁금했던 질문을 던졌다.
분명 황제가 샤이야에 왔던 건 확실했다. 그리고 네브로가 봉인된 장소까지 가는 걸 확인했지.
그런데 막상 네브로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건 베리얼이라니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일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여기 계시지 않습니까.”
“뭐?”
찌지직!
아공간을 뚫고 마왕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마왕은 내가 알던 것과는 조금 다른 형태였다.
진회색의 몸체, 네 개의 팔까지는 내가 알던 그대로였으나 가슴에 박힌 황제의 얼굴이 너무나 또렷했다. 그리고 그런 황제의 얼굴 옆에는 어디로 사라졌나 했던 헤이겔의 얼굴도 박혀 있었다.
“폐, 폐하?”
초인들이 떨리는 음색으로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들뿐만 아니라 황제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전부 놀란 기색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저를 대신해서 지금까지 죄악들을 모아줘서 감사합니다. 이제 원죄를 비롯해 7대 죄악 모두를 수거할 때가 왔군요.”
“정말 예상을 빗나가네.”
베리얼 카스테로가 이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게임에서는 대혼란 에피소드 이후 조용히 사라지는 캐릭터여서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았었는데······.
아공간을 뚫고 모습을 완전히 드러낸 네브로의 신체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베리얼이 키메라를 만든 걸 보면 저것도 키메라겠지.
“감히 폐하를······!”
격분한 오러 마스터 중 하나가 버렸던 검을 주워들고 갑자기 날아올랐다.
나한테 항복한 주제에 저런 충성심이 남아있었나 싶을 정도로 날렵한 동작이었는데 마왕이 들고 있던 검을 휘두르자 그대로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저건······막을 수 없습니다.”
화안금정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루이스가 떨리는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보랏빛으로 넘실거리는 마왕의 검은 절대로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오만.”]
“저게 오만?”
갑자기 나타나서 검의 정체를 말한 네브로는 강렬한 의지를 보내왔다.
[“마지막 죄악이다.”]
설마 오만이 제 발로 굴러 들어올 줄이야.
사실 내게 있어서 마왕의 신체는 그렇게까지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방금 보였던 한 수는 꽤나 인상적이었지만 결국 물량으로 짓눌러서 기회를 엿보면······.
“시작해볼까요. 우리들의 축제를.”
“오글거리는 말을 잘도 해대네.”
중2병 걸린 말과는 다르게 사방으로 마법진이 펼쳐지며 아공간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끼에에엑!
키메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방에 널린 녀석들보다 훨씬 개성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무래도 정예 키메라 같았다.
“당신의 언데드, 제 키메라. 뭐가 더 강한지 봅시다.”
괴수 대전이라도 벌이자는 건가.
“······진짜 괴수잖아.”
베리얼의 정예 키메라. 그냥 보통의 키메라보다 조금 강한 녀석들인 줄 알았는데 뭔가 달랐다.
지잉--
날개가 강하게 반응하며 저 키메라들에게 초월자와 관련된 무언가가 섞였음을 알려오고 있었다.
‘아주 제대로 준비했군.’
마왕의 키메라와 온갖 초월자의 부속물로 만든 키메라들까지.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처벅!
“오셨군요.”
베리얼이 반갑게 맞이하는 이들이 있었다.
여유로운 걸음으로 다가오는 그들에게서도 초월자의 냄새가 풍기는 걸 보면······.
“화신까지 불러 모은 건가.”
“제 노력을 알아봐주시는 겁니까?”
속을 알 수 없는 베리얼의 표정이 오늘따라 유독 도드라졌다. 이건 초인 31명이 적이었을 때보다 훨씬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제 죄악까지 제 손에 들어오면 진정한 신의 시대가 열릴 겁니다. 부디 저세상에서 지켜봐주십시오.”
-끼에에엑!
베리얼의 말이 끝마쳐지며 전투가 다시 시작됐다.
**
콰각!
퍼억! 서걱!
“크흡!”
끝난 줄 알았던 전투는 다시 아비규환이 되었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복잡하게 얽히고설키는 싸움이 되어 숨조차 가팔랐다.
“죽어, 좀!”
왜 전투를 겪을수록 사람이 거칠어지는가 의문이었던 적이 있었는데 루이스는 이번 기회에 그 이유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도저히 욕지거리를 내뱉지 않으면 기운 빠지는 몸을 지탱조차 못할 것만 같았다.
우웅!
“후우.”
적절히 들어온 루나의 강령 마법이 루이스를 감돌았다. 어느새 마나도 간당간당해 화안금정이 꺼진지 오래였지만 그럼에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루나를 비롯한 디에네와 루시아 등의 워록들 덕분이었다.
‘선배님은······.’
강령 마법으로 잠시 숨통이 트인 루이스는 시선을 돌려 아드리아스 쪽을 확인했다. 그는 어느새 전멸한 키메라 언데드들의 시신을 실컷 터트리며 적들을 상대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봐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어디서 저런 자들이 나타난 거지?”
베리얼 전 마법학부장의 등장과 황제의 얼굴이 박힌 키메라,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인물들까지.
특히 갑자기 나타난 사람들의 경우 한명, 한명이 오러 마스터보다 강한 무력을 선보이고 있었다.
‘오러 비기는 사용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종류의 생물 같았다. 그런 자들이 무려 다섯이었는데 얼결에 싸움에 휘말린 제국의 오러 마스터들 중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크으.”
분했다.
자신은 여기서 키메라들이나 상대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분했다. 그러나 분한 마음에 섣불리 움직이지는 않았다.
“각자에게 맞는 역할이 있다고 하셨지.”
비록 그 역할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드리아스의 말은 너무도 정론이었다.
우와아앙---!
퍼어엉-----!
마법을 난사하는 루시아가 보였다. 그리고 디에네도 여기저기서 고군분투하며 마법을 쏟아냈다.
퍼억!
엘프들도 몸을 사리지 않고 전투에 임했지만 아드리아스가 화신이라 불렀던 인간은 너무도 강했다.
“기껏 세상에 나왔는데 시시하구나.”
압도적인 무력은 숫자를 초월했다.
온몸에 불이 붙은 그 화신은 웃으며 엘프와 언데드를 짓이겼다.
기가 막힌 사실은 저런 존재가 4명이나 더 있다는 거고, 그 4명은 현재 아드리아스와 데슈른, 그리고 이자벨이 막고 있었다.
첫 한 수를 보고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네 개의 팔이 달린 키메라는 아드리아스의 정예 언데드들이 맡고 있었지만 그것도 아슬아슬해보였다.
‘이길 수 있는 건가.’
결국은 지는 것이 아닌가.
루이스의 직감이 끝을 고하고 있었다.
카앙!
“흡.”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키메라가 이빨을 들이밀었다. 새로 등장한 녀석들도 하나, 하나가 강력하기 그지 없었기에 안심할 수가 없었다.
“정신 차려.”
그때 오관을 강림한 루나가 루이스의 곁에 내려서며 키메라를 베었다.
푸확!
“마음을 놓기에는 이르다. 우리에겐 아직 전력이 남아있으니.”
“전력이 남아있다고요?”
여기서 뭐가 더 나온다는 말인가?
엘프와 데슈른만 해도 예상치 못한 지원군이었는데······.
“마침 왔군.”
“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오관의 말대로 흑의를 둘러 입은 무리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저들은······.”
음침한 기운과 후드가 달린 흑의.
누가 보아도 흑마법사들이었다.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구나!”
그리고 선두에는 살렘 예디디아가 활짝 웃으며 양팔을 벌렸다.
“내 사악한 뱀은 어디 있냐! 응? 베리얼?”
그러나 지원군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스스슥!
스으으-
은밀한 기척을 드러내며 사방에서 혈향을 흘리는 무리들.
“늦지 않았네.”
“당신은?”
루이스가 긴장한 기색으로 등장한 인물들을 보았다. 선홍빛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지닌 정체불명의 인물들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었다.
“귀엽네. 걱정하지 마. 도와주러 온 거니까.”
이제는 뱀파이어 퀸이 된 안젤라 루시펠이 자신의 권속들을 데리고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뱀파이어!”
“으음······.”
엘프들의 표정이 살짝 굳었지만 차마 거부할 수가 없는 지원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밀리고 있는 상황에서 강력한 뱀파이어들의 지원은 마른 땅의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도대체 선배님은······.”
루이스는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었다.
라스틸리아의 엘프들을 불러온 것만으로 모자라 뱀파이어와 흑마법사들까지 데려오다니······.
“우리가 끝이 아니야.”
안젤라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의 말대로 곧이어 사방에서 뭔가가 몰려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인간을 돕자!”
“주겨어어어! 주겨!”
대수림에 사는 환인족이 메르쿠르의 인솔 하에 등장하고,
“저희도 도착했습니다.”
벤자민이 씬과 사막 부족을 데리고 나타났다.
사방에서 병력들이 몰려오는 가운데 화룡정점을 찍은 건 에반이었다.
우우우웅---!
수백 개가 넘는 빛의 검이 어두워지는 하늘을 밝게 빛냈다.
“주군, 저희가 왔습니다!”
그 화려한 등장에 모두의 시선이 쏠릴 정도였다.
“허허, 아주 난장이구먼.”
“늦지 않아 다행이네요.”
모른과 노아가 말하며 이내 살렘 쪽으로 합류했다.
그 모든 모습을 허공에서 지켜보던 베리얼은 슬쩍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언제나 제 예상을 벗어나는군요. 아름다운 광경입니다.”
“베리얼! 드디어 널 죽일 때가 왔구나!”
그런 베리얼을 향해 살렘이 활짝 미소를 짓자 베리얼은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과 저의 인연도 여기까지인 모양입니다. 제가 친히 저승길로 보내드리죠.”
그때까지 구경만 하고 있던 베리얼이 마력을 드러냈다. 사악한 뱀을 오관에게서 다시 되찾은 살렘도 마력을 사방으로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콰앙!
둘의 격돌을 신호로 병력들이 몰아쳤다.
“은인을 도와라!”
“황제를 죽여! 수인들의 원한을 갚아라!”
“맛있는 거 많다! 주겨어어어!”
각자가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몰려들었다. 그러자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질량에 눌려버린 키메라들은 순식간에 찢겨나가기 시작했다.
“하등한 것들이 발버둥 치는군.”
“우린 불사의 몸. 너흰 우리를 죽일 수 없다.”
화신들이 비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아드리아스를 보며 말했다.
“그쪽에게 딱히 원한은 없지만 계약으로 묶여있는 거라 어쩔 수가 없군. 그대만 죽이면 우리를 구속하는 계약도 사라지거든.”
“원망하지 마라.”
화신들의 말에 아드리아스는 한숨을 내쉬며 코웃음을 쳤다.
“죽는지 안 죽는지 한 번 보자고.”
근질거리는 몸에서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고양감이 솟구쳤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덕분에 실마리를 찾았다.”
“뭐?”
아드리아스의 두서없는 말에 화신들이 의아함을 드러낼 때 갈락슈르가 천천히 떨리기 시작했다.
“오러 비기.”
아드리아스의 미소가 짙어져 갔다.
< 408화. 마지막 전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