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6화. 초인격돌 >
“오셨군.”
저 멀리 보이는 데슈른을 보며 일이 계획대로 진행됐음을 느꼈다.
아마 지금쯤 북부에서도 공격이 시작됐겠지.
내 목적은 처음부터 죄악을 모으는 게 아니었다. 모든 불안 요소를 제거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 목표였던 만큼 관계가 틀어진 제국의 존재는 내게 불필요했다.
그러니 내 모든 계획은 죄악 같이 사소한 일에 얽매인 게 아니라 길게 내다 본 장기 프로젝트였다. 제국을 멸망시키는 것도 그 프로젝트의 일환.
“활활 타라!”
루나가 옆에서 마법을 뿅뿅 사용하며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크롬웰의 상황은 겉보기와 달리 꽤 멀쩡했는데 이유를 찾아보니 디에네와 루시아, 그리고 드미트리의 영물들이 철통 방어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멀리서 나를 발견한 루시아가 키메라를 공격하던 걸 멈추고 허공을 밟으며 달려왔다.
“선배!”
“잘 있었어?”
“그렇게 태평하게 인사할 때에요? 왜 갑자기 초인들을 도발한 거예요?”
안 그래도 정신이 없는데 왜 일을 늘리냐는 말투로 나무라는 루시아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진정시켰다.
“걱정하지 마.”
“아니······!”
“비비안은?”
“······건강에는 문제없어요.”
벌써 비비안의 진화가 시작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곧 있으면 진화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내 마음 속 도화선도 전부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금은 눈앞에 있는 일부터.’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네크로맨시가 크롬웰을 감싼 키메라들을 전부 흡수하고 있었다. 죽으면 죽는 대로 곧장 언데드가 되어버리는 녀석들을 보며 시선을 토벌군으로 옮겼다.
“많이도 왔네.”
“초인만 31명이에요.”
루시아가 말하자 신나게 마법을 난사하던 루나가 두 눈을 빛냈다.
“31명!”
“언니는 또 왜 기뻐하시는 거예요.”
루시아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루나를 번갈아 보았다. 루나는 그렇다쳐도 난 왜 그렇게 보는 거냐.
“많긴 하지만 감당할 수 있어.”
“······서른 한 명이라고요?”
“그래.”
내 예상보다 많긴 하지만 그래도 범위 안이었다. 이 키메라들이 아니었으면 나도 이렇게 무리한 도발을 할 생각은 못했겠지만······.
‘키메라를 써서 크롬웰을 공격한 건 실수였다.’
키메라들은 오히려 끝없는 언데드 병력이 되어 저들을 사지로 내몰 것이다. 황제는 키메라를 이용해 크롬웰을 끝장내려한 모양이었지만 결국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뿌우우--!
엘프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토벌대에 비하면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이 정령을 다룰 수 있는 종족인 만큼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무엇보다 저들은 등장 자체만으로 토벌대에 충격을 주기 좋았다.
“이자벨은?”
“에이미 곁에 있을 거예요.”
이자벨에게도 샤이야에 떠나기 전에 부탁해놓았던 게 있었는데 잘 전달했는지 모르겠네.
“사악한 네크로맨서놈!”
주변 정리는 금방 끝나가고 있었다. 죽음으로 퍼지는 압도적인 전염력은 대부분의 키메라를 언데드로 만든 것도 모자라 토벌군까지 위협할 수준이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이렇게 많은 초인들을 불러 모았던 이유가 여기 있었군! 이렇게 사악한 자일 줄이야!”
“쫑알쫑알 시끄럽다, 이름도 모를 늙은아.”
“네, 네놈이!”
명성을 중요시 여기는 워록에게는 최고의 욕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뱉어내며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네놈들의 황제가 만든 키메라들이 얼마나 강한지 직접 맛 좀 봐봐라.”
-끼에에엑!
수천이 넘어가는 언데드 군단이 토벌대를 향해 달려갔다. 하나하나가 기괴한 모습으로 바글대며 달려들자 토벌대의 병사들은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모두 정신 똑바로 차려라! 숫자는 우리가 더 많고 무려 초인들도 함께 한다!”
사령관으로 보이는 자가 힘차게 외쳤지만 사기를 높일 수는 없지.
“나는 네크로맨서다. 키메라만 언데드로 만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마라. 네 동료가 죽으면 조금 전까지 함께 싸우던 이들이 곧 너희들에게 칼을 드리울 거다.”
목소리를 증폭시켜 겁을 주자 효과는 발군이었다.
“주, 죽기 싫어!”
“죽으면 언데드가 된다고? 그러면 죽어서도 하늘로 올라가지 못한다는 건가!”
“나, 난 싸우지 않아. 어차피 초인들이 있는데······.”
이 세상에도 엄연히 사후세계에 관한 믿음이 있었다. 그리고 흑마법사 중에서 네크로맨서가 가장 극악무도한 존재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 있었다.
죽은 자조차 편히 쉬지 못하게 하는 사악한 마법. 영원히 흑마법사의 하수인으로 움직이게 하는 금단의 비술.
“이, 이 새끼들이!”
“지금 이탈하면 군법으로 즉결처분하겠다!”
효과는 좋았다.
곧바로 토벌군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으며 중간 간부들이 도망치는 몇몇 병사를 본보기로 죽이자 혼란은 더욱 커져만 갔다.
파스스-
-그어어.
죽은 병사들이 실제로 언데드가 되어 일어나자 토벌군은 혼란을 넘어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꺼져! 저리 비켜!”
“난 여기서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이런 곳에서 싸우다 죽어야하는 건데!”
그와 동시에 드디어 키메라 언데드들이 토벌군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콰직! 콰악!
우드득! 퍼걱!
“으아아악!”
그래, 따지고 보면 저들도 무슨 죄냐.
대부분이 그냥 끌려왔을 뿐이겠지.
하지만 이 세상은 잔혹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상에서 태어난 걸 탓해야지.
내가 아니었으면 크롬웰에 있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 도리어 죽었을 테니까.
콰아아앙!
초인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역시 초인이라는 이명에 맞게 언데드 따위는 가뿐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바람이여.”
하지만 우리에게는 언데드만 있는 게 아니지.
“대지여! 흔들려라!”
“자유 사격!”
뒤에 있던 엘프들이 가담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두에 있던 데슈른이 육중한 몸을 내달리며 초인들이 있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저건 좀 위험한데.”
아무리 데슈른이라도 너무 무모하게 움직이는군. 나는 곧바로 정예 언데드를 소환하며 근처에 있을 루이스를 찾았다.
“루이스!”
내 외침이 들렸는지 어딘가에 있던 루이스가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선배님.”
“나설 차례다.”
내가 초인들이 있는 방향을 눈짓하자 그의 안색이 굳었다. 그러나 이내 데슈른의 모습을 확인하고 곧장 성벽을 내려갔다.
‘오러 비기로 화안금정(火眼金睛)을 얻은 루이스는 다수의 전투에는 불리하지만 소수의 대결에서는 절대적이지.’
그가 얻은 오러 비기인 화안금정은 여러 복합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으로 거짓을 꿰뚫을 수 있다는 있다는 건데 이건 전투에도 매우 유용한 능력이었다.
‘움직임을 예측할 수도 있고 상대의 움직임을 순식간에 베낄 수 있다.’
상대의 마나를 눈으로 볼 수 있는데다 전세나 기세 따위를 읽게 되어 치고 빠질 수도 있게 되지.
시야와 관련된 능력 중에서는 거의 뭐 만능이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너희도 따라가라.”
루도를 제외한 나머지 정예 언데드들도 초인들에게 보낸 나는 천천히 뒤따라갔다. 한껏 도발해놓은 상태였으니 굳이 먼저 가서 표적이 될 필요는 없겠지.
“흥, 고작 이따위로 우리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여전히 기고만장한 모습으로 키메라 언데드를 썰고 있던 듀란 후작이 느긋하게 다가오는 내 모습을 보며 말했다.
“뒤나 조심하지.”
내 턱짓에 그가 뒤를 돌아봤다.
그리고 그곳에는 데슈른이 도착해있었다.
데슈른은 대륙 10인에 이름을 올린 인물. 같은 오러 마스터라도 격이 다른 강자였다.
“흥! 저 노망난 늙은이가 왜 너와 같은 자를 돕는지 몰라도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다.”
확실히 초인만 30명이 넘게 모였으니 자신이 넘칠 만도 하지. 하지만 난 데슈른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하하, 제이스 듀란. 네가 그런 말을 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구나.”
“그건 내가 할 말이오. 드디어 노망이라도 나서 저 미치광이를 돕는 거요?”
“미치광이라니. 아드리아스는 내 제자다.”
“제자라면 네크로맨서라도 감싸주는 거요?”
“애초에 그가 네크로맨서가 된 건 황제 때문이다.”
데슈른의 말에 듀란을 비롯한 초인들의 표정에 의문이 서렸다. 그나저나 데슈른도 황제와 우리 가문 사이에 얽힌 비사를 알고 있었던 건가?
“쓸데없는 말로 현혹하려 들지 마시오. 황가를 저버리고 야인이 된 그대를 베는데 나는 주저함이 없을 거니.”
“제이스 듀란, 네가 나를? 허, 실력이나 구경 해보자구나.”
“혼자서는 무리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우리라면?”
듀란 후작의 곁으로 오러 마스터가 다섯이 붙었다. 무려 6명의 오러 마스터가 데슈른의 앞에 모인 상황.
‘모르는 모양이군.’
아무래도 저들은 데슈른의 오러 비기를 모르는 눈치였다. 데슈른의 경우 오러 마스터가 되자마자 은거기인처럼 살았으니 잘 알려지지 않았겠지.
“내 앞에서는 숫자도 무의미하다.”
데슈른이 내게 가르쳐줬던 무아검(無我劍).
그리고 그러한 의지가 극한으로 발동되는 오러 비기.
“삼라만상(森羅萬象).”
또한 데슈른이 평소에 검을 차고 다니지 않는 이유였다.
“응?”
이상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아니, 미처 깨닫기도 전에 오러 마스터 중 하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닥을 보았다.
바닥에는 어느새 떨어진 팔이 검을 쥔 채 뒹굴고 있었다.
“커헉?”
“크악!”
무언가가 베고 지나갔다는 것만 알 수 있는 흔적들이 오러 마스터들의 신체에 새겨졌다. 이내 듀란 후작이 간신히 보이지 않는 공격을 막아내며 몸을 떨었다.
“이, 이것은······!”
데슈른의 오러 비기, 삼라만상.
그것은 데슈른의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곧 그의 검이 되는 오러 비기였다.
자신을 잊고 검을 잊는다. 그리하면 결국 모든 게 곧 자신이고 모든 게 곧 검이 된다.
‘실제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미쳤네.’
절대로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인물 중 하나가 괜히 데슈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삼라만상도 완벽한 건 아니었는데, 범위가 작다는 게 단점 중 하나였고 무엇보다 한 번 사용하면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이 애송이가!”
한쪽에서는 루이스를 위시한 니켈과 티무르가 차근차근 초인들을 상대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데슈른의 압도적인 무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지금이라도 물러난다면 굳이 붙잡지는 않겠습니다.”
드디어 전장에 도착한 내가 말하자 항상 내게 태클을 걸던 워록이 소리 질렀다.
“하! 이제 좀 속이 타는 게냐!”
“어이, 늙은이.”
난 오랜만에 날개를 꺼냈다.
이제는 일곱 개가 된 날개는 검은 빛을 뿌리며 단숨에 그 워록의 앞에 다가섰다.
타악!
“흐익!”
“계속 싸우면 결국 너희가 이길 수 있겠지. 인정해. 초인 31명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워록의 멱살을 잡고 나직하게 말했다. 그 와중에 자잘한 마법이 나를 직격했지만 완전히 진화한 검은 날개는 마법조차 흡수하고 무효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반드시 장담하는데 너희 중 20명 이상은 죽이고 갈 자신이 있지.”
“······.”
“그 20명 중 하나가 네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냐?”
내 살벌한 말에 주변에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결국 초인들은 본인들의 목숨이 제일 소중한 이들이었다. 그런 이기적인 마음이 곧 실력을 향한 욕망이 되어 초인이 된 거지.
“크롬웰을 멸망시키는 게 그만큼이나 이득인가?”
다시 한 번 내가 묻자 그 누구도 대답을 하는 자가 없었다. 어느새 내 의지에 따라 언데드들의 움직임도 멈추고 주변은 정적만으로 가득 들어찼다.
“무기를 내려놓고 물러나라. 이번에는 살려주마.”
마치 내가 자비를 베푼다는 느낌.
하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철컥.
쇠덩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그것이 신호가 된 듯 하나, 둘 씩 검을 놓는 소리가 들려왔다.
“미쳤군. 정말로 항복한다고? 이 긍지도 없는 작자들!”
그러나 모두 그런 것은 아니었다.
3할은 전의를 잃은 듯했지만 나머지 3할은 망설이는 눈치였고 나머지 3할은 살기가 흉흉했다.
“무기를 내려놓으신 분들은 가십시오.”
“현혹되지 마라! 이렇게 그냥 가면 무사할 줄 아느냐!”
쫑알쫑알 시끄럽네.
카가가각!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갈락슈르가 심상치 않은 마찰음을 냈다. 곧이어 검은 오러에 휩싸인 갈락슈르는 단숨에 입을 열고 있던 듀란 후작을 향해 나아갔다.
‘천마.’
네브로의 과거에서 보았던 천마의 검술.
그와 비슷한 무언가가 내 손끝에서 펼쳐졌다.
찌이이익-
공간을 찢는 소음.
동시에 천마에 비하면 희미하지만 악귀와 같은 형상이 순간 머물렀다.
퍼억!
보이지 않았다.
휘두른 나조차 볼 수 없었던 검격.
아직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다.
툭-
나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머리가 굴러 떨어졌다.
“계속 할 거냐.”
전의를 상실한 초인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 406화. 초인격돌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