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5화. 세계수의 흔적 그리고 무결의 창시자 >
내 의지를 듣고 있던 뇨르드가 혀를 찼다.
“헛소리를 하는군.”
그리고는 판을 향해 한심하다는 눈초리를 해보였다.
“예언자? 예언자라는 게 그리 흔한 존재인 줄 아나?”
“······나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판이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나 이내 기분이 상했는지 다시 고개를 휙 돌리며 뇨르드를 보았다.
“예언자일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너도 헛소리 그만해라.”
뇨르드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겠다는 듯 움직였다.
“너희가 샤이야에 가는 건 말리지 않겠다. 허나 내 딸을 데리고 가는 건 별개의 문제.”
[“똑바로 말을 해줘야 납득을 할 거 아니야. 어차피 상관없어. 나도 원하던 만큼 시간을 끌었으니까.”]
“뭐?”
콰아앙!
탁자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토르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흐흐. 기분 좋게 취해서 잠들려고 했다만 이리 소란스러울 줄이야.”
토르의 주위로 번개가 파직거리기 시작했다.
뇨르드가 당황한 얼굴로 판을 바라봤지만 정작 판은 그새 어디론가 사라진지 오래였다.
“뇨르드, 우리의 모험을 방해하러 온 거냐.”
“토르, 내 딸을 돌려주었으면 하네.”
뇨르드가 공손한 자세를 취하며 토르에게 말했다. 그러자 토르는 옆에서 고성방가를 지르는 프레위르를 보고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이 광대 말이냐? 으흐흐.”
“그래, 그 아이가 내 딸이다.”
“지금은 내 광대인데?”
토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이내 프레위르와 같이 노래를 불렀다. 프레위르는 토르의 손에 의해 대롱대롱 매달린 상황에서도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토르! 이대로 샤이야에 가면 위험하다네!”
“으하하하! 원래 모든 모험에는 위험이 따르는 법! 그런 시련을 돌파해야 결국 영웅이 되는 것이지!”
“토르!”
뇨르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려갔다. 그의 수하들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쩔 줄을 몰라하는 얼굴로 두리번거리기만 했다.
“으음?”
그때 탁자에 엎드려 새근새근 잠들어있던 일리아스가 깨어났다. 그러더니 주변을 둘러보고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일리아스가 왜 잠을······?”
“아, 깨어나셨군요.”
네브로가 반갑게 일리아스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판이 멀리 도망가서 그의 힘이 사라진 듯했다.
그린나래와 프레위르는 여전히 취한 듯 노래를 부르며 허공에서 날아다녔지만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토르만 정신을 차렸으면 됐지.
‘여전히 알딸딸한 것 같지만.’
토르 정도의 강함을 지닌 신이라면 아무리 이곳이 판의 공간이라고 해도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판을 설득할 자신도 있었지만.
“조금 전에 우리 광대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더군.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 맞는 말이지!”
토르는 프레위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이마로 약한 전기를 흘렸다.
파직!
“윽!”
프레위르가 정신이 반짝 든 표정으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내 얼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다 입을 쩍 벌렸다.
“아버지?”
“정신이 드느냐.”
뇨르드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프레위르는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다른 일행들을 살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가 왜 여기에······.”
“뇨르드가 이곳에 함정을 파두었다! 으하하! 발칙한 짓이지!”
대답을 한 건 토르였다. 그의 말에 프레위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뇨르드를 바라봤다.
“아버지께서?”
“프레위르, 라스틸리아로 돌아가자꾸나. 네가 무단으로 나온 것에 대한 죄는 묻지 않겠다.”
“······.”
그러고 보니 저 녀석도 가출을 한거라고 했었지. 생각해보면 가출을 해놓고는 터무니없는 짓을 하고 있었네.
“아버지, 전 약속했습니다. 닉스의 무녀와 갈락슈르를 샤이야까지 무사히 데려다 주기로요.”
“철없는 소리하지 마라.”
뇨르드가 단호한 말투로 프레위르를 나무랐다.
“넌 그곳에 뭐가 도사리고 있는지 모른다.”
“······도착이 끝이 아니라는 말인가요?”
프레위르의 물음에 뇨르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토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미 왼팔을 잃었으니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그대여도 샤이야에 들어가면 죽을 것이네.”
“날 걱정해주는 거냐, 뇨르드? 눈물 나게 고맙군. 으하하하!”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확실히 샤이야가 위험하게 느껴지긴 한다. 실제로 토르조차 이전의 전투로 왼팔을 잃은 상태. 비록 어떻게 할 수는 없을까 싶어서 네브로가 챙겨왔지만 당장 고칠 방법은 없었다.
“그래. 비록 우리가 한 때는 적이었지만 지금은 같은 둥지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사이. 솔직히 내 딸이 아니었으면 그대가 무얼 하든 무시했겠지만 이렇게 만난 상황에서까지 그대를 죽음에 내몰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말해라.”
갑자기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토르가 이전과 달리 진중한 얼굴로 뇨르드를 향해 물었다.
“샤이야에 누가 있는 거지?”
“······한 둘이 아니다. 아마 온갖 세력에서 몰려왔겠지. 무려 이 대륙이 만들어지고 처음으로 완성된 갈락슈르다. 모든 신들의 힘이 모인 물건이 흔한 건 아니지.”
뇨르드의 말에 딱딱하게 굳어있던 토르가 마치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좋군!”
“뭐가 좋다는 거냐!”
“녀석들을 다 때려죽이면 결국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으하하하하!”
토르의 사고방식에 뇨르드는 할 말을 잃었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바라봤다.
“죽을 수도 있다. 아니, 죽을 거다.”
“뇨르드.”
토르가 씨익 웃어보였다.
“내가 죽음을 두려워할 거라고 생각하나?”
“······적어도 내 딸만은 살려다오.”
뇨르드의 간절한 말에 토르의 시선이 프레위르에게 향했다. 프레위르도 뇨르드의 말을 통해 위험이 실감되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프레위르.”
그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일리아스가 나직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어, 어?”
“이 앞으로는 일리아스도 겪어보지 못했어.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지 몰라.”
일리아스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갑작스런 일리아스의 행동에 프레위르의 눈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빠져도 돼.”
“나, 난······.”
“일리아스가 계속 반복하는 이유도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였어. 프레위르가 필요했던 상황은 다 지나갔으니까 이제 돌아가도 괜찮아.”
일리아스가 처음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프레위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 많았어, 프레위르.”
“난 빠진다고 하지 않았어.”
“프레위르가 죽으면 의미가 없어. 일리아스는 프레위르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다시 반복할 거야. 그걸 원해?”
일리아스의 협박성 짙은 말에 프레위르는 도움을 구하듯 네브로를 바라봤다. 그러나 네브로에게 뭘 바라겠나.
“으음······.”
네브로는 곤란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우유부단한 네브로는 이런 일에 결정을 내리지 못하겠지.
애초에 결정은 네브로가 하는 게 아니라 프레위르가 하는 거니까.
[“프레위르, 넌 약해.”]
내가 좀 도와줘볼까.
“뭐?”
[“말 그대로다. 뇨르드가 저리 말할 정도면 넌 손도 못쓰고 죽겠지.”]
“너······.”
천사님이라고 부르던 주제에 이제 와서 너라고 하네. 딱히 상관은 없지만 그만큼 자존심이 상한 거겠지.
[“너도 느끼지 않았냐? 네가 직접 네 입으로 말한 거 같은데.”]
“그거랑 다른 문제야. 이건 책임이 달린······.”
[“너 때문에 모든 일이 틀어지면 그건 네 책임이 아닌가?”]
내 신랄한 말에 프레위르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네브로는 나와 프레위르의 대화를 들으며 불안한 몸짓을 해보이더니 결국 나를 막았다.
“처, 천사님. 프레위르는 훌륭한 동료였어요.”
[“맞아. 프레위르가 없었다면 너도 없었고 그동안의 여행도 불편했겠지. 그렇지만 프레위르가 말했듯이 그거랑 이건 다른 문제야.”]
“맞아.”
프레위르가 끼어들었다. 그녀를 변호하던 네브로는 얼떨떨한 얼굴로 그런 그녀를 바라봤다.
“그동안 도움이 됐던 것과는 다른 문제겠지.”
씁쓸하게 인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언뜻 초라해보였다. 나도 마음이 좋지는 않았지만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판단은 냉정해야만 했다.
당장 네브로도 도움이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프레위르가 함께하는 건 짐이 될 수도 있었다.
‘아마 프레위르도 그런 상황을 원치는 않겠지.’
오히려 그녀가 그런 상황을 더 못 견뎌할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는······.
[“내가 알려준 거나 돌아가서 열심히 수련해라. 북구로주에서 받은 보수도 있을 거 아니야.”]
“수련······.”
프레위르는 맥없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일리아스가 다시 까치발을 들며 프레위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마웠어, 프레위르. 무사히 끝나면 꼭 라스틸리아에 만나러 갈게.”
“······그래.”
결국 그녀는 포기를 인정했다.
아마 성격상 인정하기 싫었을 테지. 하지만 오히려 그런 성격 때문에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거고.
프레위르는 속이 쓰렸는지 일리아스의 손을 한 번 잡아주고는 그대로 주점 밖으로 나갔다.
“프레위르······.”
[“프레위르를 걱정할 때가 아니야. 너도 걱정해야지.”]
“예?”
[“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냐?”]
내 의지를 전해들은 네브로가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놀란 얼굴을 해보였다. 그러나 이내 내 물음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초점이 흐려졌다.
“광대가 하나 빠져나갔군. 아쉽게 됐어.”
가만히 지켜보던 토르가 씨익 웃었다.
“하지만 넌 도움이 될 거다, 알을 품은 광대야. 그러니 고민하지 말고 따라와라!”
“알을 품은 광대? 저요?”
“그래!”
설마 나를 보고 알이라고 하는 거냐.
뭐라고 부르던 상관없지. 중요한 건 네브로가 샤이야까지 따라가느냐 마느냐의 선택이다.
“전······.”
네브로가 일리아스를 바라봤다. 그러자 일리아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일리아스는 차라리 토르랑 둘이서 가는 게 나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으으······.”
일리아스의 말에 잠시 휘청한 네브로였지만 이내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게 바통을 넘겼다.
“천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샤이야.
아마 내가 돌아갈 수 있는 열쇠가 그곳에 있지 않을까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단지 짐작일 뿐이니까.
[“네 선택이 곧 내 선택이다.”]
“으음······.”
[“두려워하지 마라.”]
네브로가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애초에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가 뭘까? 난 반드시 돌아가야만 했다. 나를 기다리고 있을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두려워하지 마라.
이건 네브로에게만 하는 말이 아닌 내 자신에게도 전하는 말이었다.
“가겠습니다.”
“일리아스는 네브로도 여기서 헤어지면 좋을 것······.”
“걱정하지 마세요.”
일리아스의 말에 네브로가 처음으로 강하게 자기 주장을 했다.
“전 계속 강해질 겁니다. 샤이야에 도착하고 나서도, 그곳에서 어떤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고 해도, 전 죽지 않을 거고 계속 강해집니다.”
“으하하하! 그렇지! 네 녀석은 계속 강해질 거다! 죽지만 않는다면 말이야! 으하하하!”
토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이야기가 일단락되는 듯하자 뇨르드가 슬쩍 고개를 숙여왔다.
“부디 무운을 빌지.”
“내 서사시가 온 대륙에 퍼질 것이다! 기대하라고 뇨르드! 으하하하!”
이내 뇨르드가 수하들을 데리고 주점을 나갔다.
“우리도 바로 출발할까? 꽤 오래 쉬었구나!”
“응.”
“예!”
여전히 헤롱거리는 그린나래를 일리아스가 품에 안으며 우리도 뒤따라 주점을 나섰다.
**
“마음이 상했느냐.”
“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죠.”
일행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프레위르가 여전히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설마 네가 가출을 하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했다. 소식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좋은 경험이었어요.”
“살아있으니 좋은 경험이 된 것이다. 목숨을 잃었으면 아무 쓸모도 없어.”
뇨르드의 잔소리에도 프레위르는 그저 멀어지는 일행들의 뒷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분해요.”
“······.”
“저도 강해지고 싶어요.”
프레위르는 문득 천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돌아가서 수련이라도 하라고 했던 말.
“아버지.”
“말하거라.”
“돌아가면 ‘시간이 뒤틀린 공간’에서 수련을 하고 싶어요.”
프레위르의 말에 뇨르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사고를 쳐놓고 또 뭘 하겠다는 것이냐.”
“전 강해지고 싶어요. 더 이상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아요.”
프레위르의 간절한 말에 뇨르드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수에 위치한 그곳을 말하는 거겠지?”
“제가 말한 건 거기 말고 없잖아요.”
“그곳의 하루는 이곳의 1분이다. 게다가 들어가게 되면 스스로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다. 우리가 도와줄 수도 없어.”
라스틸리아의 세계수는 또 하나의 세상이었다.
온갖 기이한 장소가 내재되어 있는 세계수의 안에는 금역으로 지정된 장소도 존재했다.
프레위르가 말하는 장소 또한 금역 중 하나로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흘러가는 기묘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곳을 감옥으로 사용하지. 기나긴 세월을 살아가는 엘프에게는 더한 형벌이 되는 장소.”
“대신 그만한 시간을 벌 수 있죠.”
프레위르는 천사가 알려준 무결을 반드시 완벽하게 터득하고 나올 생각이었다. 무려 초월자가 알려준 검술인 만큼 익히기만 하면 빠져나올 자신은 있었다.
비록 네브로처럼 순식간에 강해질 순 없지만, 그렇지 못한다면 세계수의 힘을 빌어 강해질 것이다.
“그곳은 제게 감옥이 아니라 수련장이 되어 줄 거예요.”
프레위르의 두 눈에 강렬한 열망이 담겼다.
< 395화. 세계수의 흔적 그리고 무결의 창시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