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1화. ???, 김진환, 아드리아스 >
“으하하하! 농담이다!”
토르는 잡았던 머리통에 힘을 풀며 네브로를 놓아주었다. 순간 예전에 보았던 염라가 떠올라 식겁했네.
“보아하니 대가리에 망치라도 맞은 모양이군! 으하하하!”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추측해보지. 넌 지금 너 자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어, 맞지?”
무슨 헛소리냐.
나는 아드리아스 크롬웰. 이 사실을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설마 김진환을 의미하는 것이어도 그 또한 잊은 적이 없다.
[“난 나를 잘 알아.”]
“그럼 대답해봐라! 넌 뭐지!”
[“난······.”]
지지직!
순간 노이즈가 섞인 잡음이 들리며 시야가 점멸했다. 마치 내가 말하려는 걸 막으려는 듯한 현상이었다.
[계약에 따라 Player의 의지가 거부당합니다.]
메시지? 갑자기 이건 또 뭐야?
지직!
난 결국 내 이름을 말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토르가 아까처럼 입가만 웃는 섬뜩한 얼굴을 하며 나를 보았다.
“강력한 힘! 으하하하! 재밌는 녀석이구나! 너와 같은 격을 지닌 자가 아무런 힘도 못쓰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게 무슨 일인지 넌 알고 있는 거냐?”]
“인과율!”
또 저 단어가 나왔다. 뇌조차 근육으로 만들어졌을 것 같은 토르가 인과율이라는 단어를 쓰니 어색하군.
“인과율이지만 네 자신의 인과율은 아니다! 이 세상에 종속되지 않은 힘이 너의 인과율과 대가리를 꿰매고 있어! 으하하하!”
[“알아듣게 좀 설명해.”]
“넌 네 정체를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방금과 같은 힘의 작용 때문이지. 아마 누군가와의 계약으로 인한 강력한 인과율이 적용했을 것이다!”
내가 내 정체를 모른다고?
난 김진환이었다. 그 다음에는 아드리아스였지.
도대체 여기서 뭐가 더 있다는 말이냐?
“넌 네 부모를 기억하나?”
[“부모? 당연히······.”]
내 부모님은 케인 크롬웰과 캐서린 크롬웰.
그리고 그 전에는 고아였지.
[“기억한다.”]
“기억한다고? 고아였거나 그런 건 아니고?”
토르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알면 안 되는 거대한 비밀에 다가선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맞아.”]
“거 봐라! 으하하하! 넌 네 정체를 모르고 있는 거다! 자신의 격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으면서 정체를 알고 있다고 말하니 광대의 자격이 충분하군! 으하! 으하하하!”
토르의 천둥과 같은 웃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러더니 돌연 주변에 번개를 쏘아냈다.
콰르릉! 콰직!
“아?”
일행들이 번개가 쏘아진 곳을 보자 어느새 슬금슬금 몰려든 무언가가 주변을 포위하고 있었다.
“모험의 시작이군! 악당들이 등장했다! 하하하!”
토르의 팔에서 연달아 번개가 터져 나왔다.
“기어 다니는 자들.”
프레위르가 안색을 굳히며 그들의 명칭을 말했다. 겉보기에는 별 것 없는 인간의 형상을 한 녀석들이었는데 징그러운 속도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
콰르릉!
번개가 비산하며 다가오는 녀석들을 전부 터트려 죽여 버렸다.
“내가 바로 토르다! 으하하하!”
토르의 전격이 춤을 췄다.
자유자재로 번개를 다루는 그 모습을 보자 이게 진짜 초월자구나 싶은 감정이 들었다. 헬라를 보고 숨이 막혔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
“자, 광대들아! 샤이야까지 험난한 여정을 치러보자고! 으하하하!”
토르가 번쩍번쩍 빛을 뿜으며 미친 듯이 달려 나가고 일행들은 급하게 그 뒤를 쫓았다.
“역시 일리아스, 난 믿고 있었다고.”
“예? 못 믿어서 계속 이름을 불렀던 걸로 아는데?”
“닥쳐.”
태클 거는 네브로에게 산쯧하게 말한 프레위르가 곁에서 함께 뛰는 일리아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가 막힌 방법이긴 해.’
설마 토르를 여기서 만나게 되고, 또 그를 이용하게 될 줄이야. 한 가지 의문이라면 이렇게까지 했는데 그동안 왜 실패했냐는 거다.
[“앞으로 고비가 더 남은 건가.”]
“예?”
[“토르와 함께하는데도 실패했기 때문에 일리아스가 50번이나 회귀를 한 거지 않겠냐.”]
“아!”
네브로가 내 말을 듣고 깨달았다는 듯 안색이 굳었다.
“일리아스가 토르를 만난 건 이번이 네 번째.”
그때 일리아스가 나직하게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들은 네브로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리고 토르와 함께하는 건 이번이 두 번째.”
[“이것도 최근에 찾은 방법이라는 거네.”]
“응.”
그렇다면 이번에는 성공에 베팅을 걸어 볼만했다. 그렇게 되도록 나도 최대한 도울 생각이고.
‘원래였으면 굳이 도울 필요는 없겠지만······.’
싯다르타가 말했다.
내가 가는 길이 옳은 길이고 그저 최선을 다해서 나아가라고. 내가 이들을 돕는 것도 결국 내가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라는 얘기일 거다.
“근데 아까부터 넌 왜 말이 없냐?”
토르 덕분에 무임승차를 한 기분으로 따라가는 도중 프레위르가 그린나래를 향해 물었다. 그린나래는 헬라를 만난 뒤로 아무 말이 없이 그저 따라오기만 할뿐이었다.
-······.
“아까 헬라가 했던 말 때문에 그래?”
-만약 내가 이번 일을 도와서 무사히 해결된다면······.
그린나래가 눈물에 젖은 눈으로 네브로를 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약속을 지켜줘야 돼, 꼭.
[“보상?”]
-응.
헬라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군.
근데 내가 어떻게 도와줘야 하는 거지?
골치가 아파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약속은 지킬 생각이었다.
[“만약 내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들어줄게.”]
-천사님이라면 무조건 가능해! 히히!
이 녀석도 나를 천사라고 부르기 시작했네.
금세 밝아지는 표정을 보니 단순하다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위기감 따위는 저 멀리 내다던진 채 토르의 뒤를 쫓다보니 어느새 풍경이 바뀌고 있었다.
“우와······.”
탁 트인 평야가 시야를 가득 매웠다.
하늘은 보랏빛의 은하수로 가득 채워져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벌써 도착했군! 무한의 땅이다!”
“무한의 땅?”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네브로가 뱉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만 지나면 샤이야까지 금방이야.”
옆에 있던 일리아스가 말해줬지만 나와 네브로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라 ‘무한의 땅’이라는 이름의 저 지명의 뜻이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름이라 살짝 걱정도 되는데······.
‘토르가 있으니 상관없나.’
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주변으로 수많은 기운들이 느껴졌다.
“역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군! 으하하하!”
“샤이야로 가는 길은 여기 밖에 없으니까.”
프레위르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바글거리는 기운들을 보자 확실히 우리를 노리는 것들이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일에 우리만 보낸 것도 이해가 안 가네.”]
“그건 일리아스가 결정한 거야. 더 많아봤자 필요 없어.”
일리아스가 내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누가 배신할지 모르니까.”
“배신!”
네브로가 충격을 받은 얼굴로 일리아스를 바라봤다. 그러나 일리아스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산뜻하게 말을 이었다.
“배신자들이 너무 많아. 처음에는 아니었어도 회유되는 애들도 있었어. 지금 일행들이 최선이야.”
[“생각이 짧았다.”]
나는 아직 갈락슈르의 귀함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항상 들고 다니던 검이라서 그런 걸까.
내 예상보다 훨씬 많은 녀석들이 노리는 듯했다.
“내가 바로! 토르다! 으하하하!”
번개가 사방으로 몰아치며 애꿎은 땅에 꺼먼 자국을 남겼다. 그러나 사방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모습을 숨긴 채 드러나지 않았다.
“겁쟁이 녀석들! 이러면 모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나!”
결국 토르가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넓은 평원으로 한 차례 번개가 휩쓸고 지나갔다.
**
거대한 전각이 하늘을 뚫고 올라선 도원경(桃源境). 그 전각의 안에는 흔히 신선들이라 일컬어지는 초월자들의 모임이 주최되고 있었다.
“토르가?”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는 여인이 누군가의 소식에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함께 있던 신선들도 의외의 이름이 등장하자 관심을 보였다.
“흐음, 그 자가 나섰다면 밑에 녀석들만으로는 부족하겠군.”
“그것보다 왜 나선 것이지?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들을 도와주는 게야?”
“그 번개에 미친 녀석이 날뛰는 것도 하루 이틀일이 아니니 이제는 그러려니 해야지. 허허.”
웅성대는 소음 사이로 처음에 소식을 들었던 여인이 연분홍빛 입술을 매만지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그 작은 몸짓 하나에도 다른 신선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몰려들었다.
“어찌 하시겠어요?”
“토르가 나선 이상, 내가 직접 간다.”
질문을 건네받은 이는 검을 등에 가로로 매고 있었는데 풍겨지는 기운이 주변의 신선들을 능가했다.
“역시 동빈 오라버니시네요.”
“너도 같이 간다.”
검을 찬 신선, 여동빈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여인을 향해 말했다.
“네? 동빈 오라버니가 나서시는데 굳이 소녀가 함께 할 필요가 있을까요?”
“토르는 나도 장담 못한다. 적어도 너 정도는 같이 가야 해볼 만하겠지.”
여동빈의 말에 여인의 모습이 점차 어려지기 시작했다. 이내 소녀와 같은 모습으로 자연스레 변해버린 여인은 몸을 흔들며 아양을 떨었다.
“소녀는 작고 가련해요. 소녀 대신에 나서주실 분은 없을까요?”
“크, 크흠. 곤란한 듯 보이니 내가 나설까?”
“그, 그래! 우리가 나서면 되지! 한 네댓 명이 가면 충분히 토르 정도는 상대할 수 있지 않을까?”
주변에 있던 신선들이 두 눈을 뒤집으며 여인을 대신해 나서려 하자 여동빈이 차갑게 말했다.
“소달기, 네가 나서고 싶지 않다면 그만한 강자를 데려와라. 약한 자들로 수만 채워봤자 아무 쓸모가 없다.”
여동빈의 말에 주변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대놓고 무시하는 말이었지만 신선들은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하아, 그러면 거기 오라버니?”
여인, 소달기의 시선이 그때까지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던 사내에게로 향했다. 그는 달기가 불렀음에도 여전히 술잔을 비우며 탁상에 올려진 음식들을 맛보고 있었다.
“거기! 천마 오라버니!”
“음?”
천마라 불린 사내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겉보기에는 평범해보였으나 허리에 찬 묵빛의 검이 심상치 않았다.
“본좌를 부른 건가?”
“그래요, 천마 오라버니.”
“본좌보다 나이도 많은 요물이 헛소리를 해대는군. 왜 불렀나.”
여동빈과 같이 전혀 매혹되지 않는 천마를 보며 달기의 혈관이 살짝 도드라졌다. 가까스로 화를 참아낸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천마에게 말했다.
“완성된 갈락슈르가 궁금하지 않나요? 최근에 불려가기도 하셨다는데······.”
“일 없다.”
술을 병째로 들이켠 천마가 거하게 트림을 하며 대답했다. 그럼에도 달기는 꿋꿋하게 그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굳이 싸우실 필요도 없어요. 그냥 곁에 있기만 해도 도움이 되실 테니 한 번 마실을 다녀온다고 생각하시고 바람 좀 쐬고 오시는 건 어떨까요?”
“그렇게 바람을 쐬고 싶으면 네가 직접 가라.”
거기까지 말한 천마는 우뚝 멈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갈락슈르의 부름을 받고 출두를 했을 때 보았던 예상외의 인물이 떠올랐다.
“으음······.”
천마가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자 달기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러나 재촉하지 않고 그의 반응을 지켜보자······.
“한 번 봐보는 것도 좋겠군. 그자가 왜 여기 있는지도 궁금하고.”
“잘 생각하셨어요! 그나저나 ‘그자’라니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일 없다.”
천마는 술을 여러 병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여동빈도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둘의 움직임만으로 전각이 진동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초월자라 불리는 신선들조차 그 모습을 숨죽이며 지켜보는 가운데,
“잘 다녀오세요, 오라버니들! 갈락슈르를 가져오는 것도 잊지 마시고요!”
달기만이 유쾌한 얼굴로 그들을 배웅했다.
< 391화. ???, 김진환, 아드리아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