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7화. 비극을 막으려는 자 >
내가 겪었던 ‘진짜’ 초월자 같은 녀석 중 하나.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할 수 없는 의지와 생각을 지닌 괴물이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본체.’
본체······는 모르겠다.
사실 이 세계에서 지내며 경험해 본 바로는 내가 있던 곳에 비해 초월자들의 힘이 그렇게까지 강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곳에 오기 전에 느꼈던 초월자들은 그야말로 ‘신’ 그 자체. 의지만으로 인간 하나쯤은 미치광이로 만들 수 있는 거대한 존재였다.
‘인과율이라고 했던가.’
이 세상은 인과율의 힘이 작용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이건 확실치 않지만 아이온이나 사마엘이 자주 어딘가에 갔다가 복귀를 하는 모습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도 했었지.
지금 이 세상은 다른 차원과 연결이 된 상태인 게 아닐까? 그래서 연결된 차원으로 들락날락하고 본인들의 차원에서만큼은 신과 같은 힘을 지닌 건?
‘석가모니가 인과율에 대해서 설명해주는 덕분에 세울 수 있었던 가설이지.’
그렇다면 저 ‘쫓는 자’도 내가 알던 것만큼 강하지 않을 수도······.
-빛! 비이이이잋!
혓바닥이 활짝 펼쳐졌다.
그 안에 감춰져있던 거대한 동체가 무시무시한 이빨들을 드러내며 미소 짓고 있었다.
······탑에서는 그나마 조금 괜찮게 생겼었는데 영 엉망이군.
“전부 얼려버리겠습니다!”
네브로가 마나를 모았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술식과 배열까지 총동원한 그의 마법은 이내 입술을 타고 영창되었다.
-얼어붙어라!
강렬한 의지가 제어의 기원을 타고 전개되었다. 나처럼 역천의 회로가 이식이 된 것도 아니건만 무리 없이 트롤들을 얼려버리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몸도 없는 주제에 전율이 흘렀다.
‘이걸 이렇게 계산하는군.’
네브로의 마법을 보고 있자면 나도 많이 배우게 된다. 마나의 흐름이나 술식의 나열, 그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마나의 배열은 내 시대에는 없던 방식이었다.
그야말로 천재의 본능적인 마법 사용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쩌면 천재를 뛰어넘는 재능일 수도······.’
네브로가 수 마리의 트롤들을 저지시켰으나 여전히 적의 수는 많았다. 무엇보다도 거대한 존재감을 드러내는 쫓는 자가 네브로의 마법에도 멀쩡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왔다! 왔어!
-도망가!
요정들이 도망가기 시작했다. 덩달아서 도망가려던 페어리 퀸을 일리아스가 막아서는 모습이 슬쩍 보였다.
“볼일 다 보고 빨리 와야 돼.”
-에이, 알았어!
그렇게 페어리 퀸이 떠나자 일리아스가 종종걸음으로 뛰어와 예의 검신을 꺼내들었다.
“흐림은 나한테 맡겨.”
“예?”
당황한 네브로가 반문을 할 무렵, 일리아스가 트롤 한 마리를 상대하는 프레위르를 지나치며 달려 나갔다.
“일리아스?!”
프레위르가 자신을 지나치는 일리아스를 보며 경악했고 이내 네브로도 부랴부랴 몸을 움직였다.
“일리아스!”
저것이 미쳤나.
나는 곧바로 당황한 네브로를 진정시켰다.
[“마법!”]
“아!”
실전 경험이 아직 부족한 모양이라 마법의 사용보다 아둥바둥대는 게 먼저였다. 내 의지를 전해들은 네브로가 곧바로 일리아스의 주변으로 보호 마법을 걸었다.
“하아아······.”
일리아스는 그러든 말든 깊게 호흡을 내뱉고는 검신을 양손으로 움켜잡았다. 손잡이도 없는 검신의 끝을 익숙한 듯 안정적으로 붙잡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일리아스! 어서 물러나야······.”
[“기다려 봐.”]
뭔가, 뭔가가 있다.
이내 검신을 부여잡은 일리아스가 쫓는 자를 향해 부드러운 몸짓으로 휘둘렀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형상이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제사를 올리는 무녀와 같았다.
쩌저적!
그러나 부드러운 몸짓과는 별개로 허공에서 일어난 무언가는 전혀 부드럽지 못했다.
[“누가 본좌를 불렀나.”]
거대한 인간의 형상이 일리아스가 든 검신을 통해 흘러나왔다. 곧이어 그 자는 일리아스를 바라보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갈락슈르가 거의 다 완성 되었구나.”]
갈락슈르?
의문이 채 가시기도 전에 스스로를 본좌라 부른 인간이 자신의 묵빛 검을 내리찍었다. 그 목표는 앞에 있던 쫓는 자였다.
콰아아앙--------!
숲이 파괴되었다.
단 한 방으로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일격이었다.
[“초월자······?”]
[“음? 넌 또 뭐냐?”]
내 중얼거림이 전해졌는지 그가 나를 돌아봤다.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부릅뜨고는 경악어린 표정을 지었다.
[“너는······!”]
그러나 이내 허공에서 흩어져버린 초월자는 그대로 일리아스가 든 검신에 돌아갔다.
‘내가 보인 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그것도 그건데 저건 도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잠깐 튀어나왔던 사내가 만들어낸 광경은 내가 알던 초월자의 무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투두둑-
쿠구구구----!
숲은 더 이상 숲이 아니게 되었다.
마치 거대한 절벽처럼 바닥이 움푹 꺼져있었고 나무들은 전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꾸르륵.
-끄륵.
기가 막힌 솜씨였다.
일행과 요정들에게는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고 정확히 트롤들만 노린 공격. 그리고 그 공격을 맞은 쫓는 자는 형체가 일그러진 채 바닥 싶은 곳으로 처박혀있었다.
“이, 일리아스? 어떻게······.”
네브로와 프레위르가 놀란 얼굴로 일리아스를 바라봤는데 나도 몸이 있었다면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
“잠깐 동안은 괜찮을 거야.”
일리아스는 그리 말하더니 휘청거리며 발걸음을 옮기려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브로가 곧바로 그런 일리아스를 마법으로 받쳐주었다.
“그린나래한테 가야 돼.”
당연하다는 듯 마법에 몸을 맡기며 일리아스가 한쪽을 가리켰다.
“지금 가야 돼. 안 그러면 놓쳐.”
“제, 제가 잡아오겠습니다!”
네브로가 일리아스가 가리킨 곳으로 염동력을 이용해 날아갔다. 그 정신없는 모습을 보며 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을 가진 채 일리아스를 주시했다.
‘저 검신이 갈락슈르? 내가 가지고 있는 거랑 전혀 다른 모양인데······.’
게다가 저 검신으로 부렸던 놀라운 능력은 입조차 다물지 못할 정도였다. 무슨 도깨비 방망이도 아니고 휘두르면 뚝딱하고 초월자가 나오냐.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마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일리아스의 행동은······묘하게 나와 닮아있었다.
정확히 어느 부분이 닮았냐고 하면 나도 딱 집어서 말은 못하겠지만, 어쨌든.
“찾았다!”
네브로가 간 방향에는 허공에 이상한 포탈이 열려있었고 때마침 페어리 퀸이 입장하려 하고 있었다.
[“늦겠다, 막아라.”]
“예!”
결국 마나를 이용한 기술.
네브로는 강력한 마력으로 상대의 마법, 아니 마나로 만들어낸 기술을 닫아버렸다.
-으악!
미처 나가지 못한 페어리 퀸이 허공을 더듬다가 이내 몸을 돌려 우리를 바라봤다.
-뭐야! 니네가 한 거야!
“아니, 그건······.”
[“도망가려고 한 거냐?”]
내가 끼어들자 페어리 퀸이 윽! 하는 얼굴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네가 먼저 약속을 깼으니 내 약속도 무효다.”]
-그, 그런 게 어디 있어! 난 전혀 도망치려고 안했어!
입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을 해라.
그렇게 퀸을 붙잡아두고 있자 일리아스와 프레위르가 도착했다.
“이제 넌 일리아스를 따라와야 해.”
-흥!
퀸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휙 돌려버리자 일리아스가 싸늘한 표정으로 상대의 얼굴을 붙잡았다.
“네가 트롤의 심장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여기를 다 불태워버리기 전에 일리아스를 따르는 게 좋을 거야.”
-무서워! 잔인해! 너 뭐야!
협박성 짙은 일리아스의 말에 퀸이 기겁을 하며 몸부림쳤다. 그러더니 결국 울상을 지으며 말했다.
-따라갈게! 알았으니까 이거 놔!
그제야 얼굴을 놓은 일리아스는 얼른 허공에 턱짓을 했다.
“어서 여기를 벗어나게 해줘.”
-······흐림이 쫓아올 거야.
“그러면 여기 계속 있을까? 그리고 너도 그 편이 좋을 걸? 흐림이 여기 남으면 네가 트롤의 심장으로 만든 것도 다 부서질 거야.”
일리아스가 차갑게 말하자 퀸은 혼잣말을 투덜대며 조금 전과 같은 포탈을 열었다.
-너, 이상해. 어떻게 그런 걸 아는 거야?
“······.”
페어리 퀸의 말을 들으니 계속해서 느껴졌던 묘한 기시감이 드디어 직접적으로 다가왔다.
‘남들이 모르는 정보를 알고 있다?’
이거 완전 나 같은 경우 아니야?
나는 게임 속에 들어온 거라지만 일리아스는 그럼 뭐지?
“흐림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빨리 가자.”
어느 순간부터 일리아스가 일행들을 이끌고 있었다. 그 전까지 프레위르나 네브로가 하는 대로 아무 말 없이 따라왔던 것과 대조되었다.
“일리아스.”
“왜?”
“몸은 좀 괜찮으세요?”
그런 일리아스를 향해 네브로가 문득 걱정스럽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자 일리아스는 무표정하던 얼굴을 싸늘하게 굳히며 무시했다.
그 모습이 마치 거부 반응이라도 일으키는 듯했다.
“일리아스?”
“······잔말 그만하고 따라와.”
일리아스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포탈을 넘어갔다. 그러자 프레위르와 네브로가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공주님께서 기분이 영 좋지 않으신가 보네.”
“아무래도 위험했으니까요. 그보다 일리아스가 저리 강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 하지만 저만한 힘에는 아마 대가가 필요했을 거야. 며칠 지켜봐야겠지.”
프레위르가 조금 걱정스럽다는 얼굴을 하며 뒤이어 포탈을 넘어갔다.
-먼저 가!
[“너도 따라와라. 네브로, 잡아.”]
내 의지에 네브로가 페어리 퀸을 붙잡았다.
“죄, 죄송해요. 금방 놓아드릴 테니까 잠시만······.”
-으그그그!
퀸이 벗어나려고 발버둥쳤지만 마법을 사용하는 네브로에게는 무리였다. 그렇게 퀸을 잡고 무사히 포탈을 넘어가자······.
“여긴 또 어디야?”
프레위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변을 확인하니 반짝이는 물결이 달빛에 비치고 있었다.
“호수?”
털썩-
네브로의 말이 이어지고 이내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리아스!”
일리아스가 기절하듯 풀밭에 쓰러져 있었다.
**
일리아스.
일리아스······.
일리아스······!
그리운 목소리가 일리아스의 귀를 맴돌았다.
아니, 이제는 지겹다는 표현이 맞을까.
‘포기할 수 없어.’
지겹다.
하지만 그렇기에 다행이라고 느꼈다.
지겹다는 것은 곧, 지금도 곁에 있다는 소리니까.
“네브로오오.”
일리아스의 입으로 말한 게 맞을까?
비몽사몽 불러본 이름에 곧바로 반응이 왔다.
“일리아스! 괜찮으신가요?”
“아.”
바로 곁에 있었던 게 네브로였다는 걸 깨달은 일리아스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아, 그렇지.
갈락슈르를 사용했구나. 벌써 이때가 왔어.
여기서부터 잘 해야 돼.
일리아스는 지친 몸으로 주변을 확인했다.
다행이었다. 아직 예상에서 벗어나진 않았다.
“괜찮아요?”
“일리아스는 괜찮으니까 이제 됐어.”
자신이 네브로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리아스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일리아스?”
“가야 돼.”
아련한 감상을 느낄 시간 따위 없었다.
모두를 위해서, 아니 일리아스 본인을 위해서라도······.
‘움직여야 해.’
일리아스가 비틀비틀 움직였다.
그때 네브로의 내부에 있는 자칭 천사가 의지를 전달해왔다.
[“일리아스.”]
······이건 예정에 없던 일인데?
일리아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네브로를 보았다. 그러자 네브로가 자신이 아니라는 듯 스스로의 가슴팍을 보았다.
“제, 제가 말한 게 아니라······.”
“일리아스도 알아.”
일리아스가 어서 말하라는 듯 고개를 치켜 들었다.
“천사님, 일리아스는 왜 불렀어.”
[“일리아스, 넌······.”]
의미심장한 뜸들임.
그 불길함을 일리아스가 직감하고 손을 내저으려는 순간, 다시 한 번 의지가 전해져왔다.
[“회귀자인가?”]
< 387화. 비극을 막으려는 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