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5화. 선전포고 >
“제롬!”
마치 강아지를 부르듯 손을 흔드는 작은 소녀를 보며 건장한 신체의 제롬이 뚜벅뚜벅 걸어갔다.
“빨리!”
[“알았어.”]
소녀의 외모는 자신 못지않게 특이했다.
반짝이는 은발에 은하수를 담은 듯 빛나는 눈이 인상적이었다.
‘특이하다?’
어째서 자신은 저러한 외모가 특이하다는 걸 알고 있을까. 보편적인 외모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사고하는 걸 느끼며 위화감을 느꼈다.
“한스 아저씨!”
“어이쿠, 루나 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먼젓번에 말했던 사과잼 소보로 방입니다.”
“우와!”
성 내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는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루나를 보며 제롬이 우물쭈물 다가섰다.
“아! 한스 아저씨, 여기는 제롬이야. 으음······.”
루나가 제롬을 가리키며 소개를 하다가 이내 미간을 좁히며 고민에 빠졌다.
“뭐지? 고용 기사? 식객? 손님?”
루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그 모습을 보던 한스라는 요리사가 웃었다.
“뭐든 어떻습니까. 자, 갓 구운 빵이니 지금 드셔야 맛있을 거예요. 거기 키 큰 양반도 와서 한 입 해보시죠.”
무언가를 먹는다는 행위가 익숙지 않았던 제롬은 한스의 제안에 조심스레 빵을 집었다.
“뜨거!”
“하하! 그야 뜨겁지요! 천천히 식혀서 드세요.”
“아까는 지금 먹으라며!”
티격 대는 루나를 보며 제롬은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이내 느껴지는 포근포근하고 달콤한 감각에 자신도 모르게 몸서리를 친 제롬이 말했다.
[“맛있다.”]
“그렇죠? 이자벨 님의 과수원에서 수확한 사과로 만든 잼이 유독 맛이 좋더군요. 하하!”
“나도 먹을 거야!”
제롬은 빵을 음미하며 천천히 씹어 삼켰다. 태어나 처음으로 겪어보는 달콤함에 한동안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쯤, 루나가 양손에 빵을 집으며 닥치는 대로 입에 가져가고 있었다.
"역시 한스 아저씨가 만든 빵이 최고야!"
“물론이죠! 제빵 실력은 제국 어디에서도 꿇리지 않는다고 자신합니다.”
세상이란 이토록 평화로운 건가.
자신이 처음 눈을 떴던 전장과는 너무도 대비가 되는 광경에 제롬은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내가 태어난 이유.’
모하임에서 크롬웰로 넘어오는 사이에 아드리아스가 해주었던 말이 있었다. 어쩌면 자신은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 태어난 생체 병기일 수도 있다는 말.
하지만 그런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충분히 바꿀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난, 이 빵이 좋아.”]
“흐하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빵을 만들어드리죠.”
[“한스 아저씨라고 했나?”]
“한스라고 부르시죠.”
[“한스, 넌 전쟁으로 힘들지 않은 건가?”]
갑작스런 제롬의 물음에 한스가 턱을 짚었다.
“흐음, 딱히 그런 건 느껴보지 못했습니다. 이게 다 저희 영주님과 영주 대리 덕분이죠.”
[“평화를 느끼는 건가?”]
“그런 셈이죠.”
제롬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어쩌면 자신은 이 전쟁으로 인해 태어난 생명체, 그러나 과연 그것으로 전쟁을 옹호할 수 있는 건가.
[“행복해?”]
“그렇죠, 뭐. 전 그냥 이렇게 매일 많은 사람들을 위해 빵을 굽고 성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는 것만으로 행복합니다. 솔직히 전쟁이니 뭐니 하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건 별로 없습니다. 딱 한 번 제국의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가 있었지만 그것도 영주님의 귀환으로 해결되었고요.”
그때 빵을 우겨넣고 있던 루나가 제롬에게 자신의 손에 들린 빵을 건네며 말했다.
“제롬은 이 빵 먹으면 어때?”
[“어떻냐니?”]
“행복해?”
제롬은 루나에게서 빵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한 입 베어 물고 다시 그 달콤함을 느꼈다. 조금 식어서 포근포근한 맛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맛있는 빵이었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이런 건가?”]
“맞을 거야! 나도 한스 아저씨가 만들어주는 빵을 먹으면 행복하거든!”
만약······.
만약 자신이 저번에 죽였던 흑기사와 같이 행동했다면 이러한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을까?
아마 수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베어 넘기고, 이내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겠지.
[“전쟁은······좋지 않네.”]
전쟁으로 인해 태어났지만 전쟁을 부정하는 모순이었다. 그러나 제롬은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입 안에 남아있는 달콤함을 느끼기에도 벅찼다.
**
휴식을 오래 할 수는 없었다.
이미 묵시록의 4기사 에피소드가 비틀렸다는 걸 안 이상, 죽음의 청기사가 나타날 장소를 특정 하는 건 어려워졌다.
‘전쟁도 중요하지만 청기사부터 처리해야지.’
에반의 정보 조직은 집회와 합쳐져 그 규모가 이전과는 달리 아득하게 커져 있었다. 솔직히 어떻게 관리를 하는 건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덕분에 양질의 정보가 걸러져 내게 도달할 수 있었다.
“황제가 황궁을 비웠다고?”
그렇게 매일 청기사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애를 쓰고 있을 때, 뜻밖의 정보가 내게 전달되었다.
“그렇습니다. 그와 관련해서 에반 경이 직접 방문한다고 합니다.”
“음, 알겠습니다. 고생했어요.”
보고를 올리던 인물이 나가자 나는 에반이 직접 작성한 듯한 보고서를 살피며 이마를 짚었다.
‘황제가 움직였다는 건 사실 대수로운 게 아니지.’
문제는 시기였다.
하필 이런 시기에 황궁을 비울 정도로 큰일이라는 이야기였으니까.
“어디로 갔는지 나왔어?”
곁에 있던 비비안도 궁금했는지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건 없습니다. 황궁을 비웠다는 것도 여러 정황상 추측을 한 것뿐이라네요.”
“수상해.”
비비안이 내 심경을 그대로 읊어주었다.
황제가 사실 집회, 아니 헤이겔과 연락을 해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가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지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멸망급 에피소드를 만든 다던가?’
사실 루나를 살리고 뒤바뀐 포트리온 에피소드도 따지고 보면 멸망급 에피소드였지. 그대로 두었으면 강제로 초월자가 된 루나를 이용해 맥스웰이 세상을 파괴했을 거니까.
사실 그에 관해서는 아직도 불안한 점이 남아있었다. 루나의 몸속에 남은 미약한 초월자의 기운이 그것이었다.
“일단은 에반을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군요.”
에반이 직접 온다고 했으니 큰 걱정은 없었다. 할 얘기도 없는데 굳이 올 정도로 에반이 여유로운 것도 아니니 뭔가가 있겠지.
탁탁탁탁탁!
복도에서 익숙한 달리기 소리와 함께 문이 콩콩 두드려졌다.
“들어와도 돼요.”
“친구! 이거 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루나의 손에는 편지가 들려있었다.
“편지?”
갑자기 웬 편지냐.
그것도 밀랍 인장으로 제대로 봉인까지 된 정성스러운 외형의 편지였다.
“어디서 났어요?”
“하인이 발견했는데 내가 대신 전해준다고 뺏어왔어.”
편지를 받아들고 인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묘하게 어디서 본 듯한 그 인장의 외형에 잠시 생각해보다가 이내 편지 봉투를 뜯었다.
우웅!
편지지를 꺼내는 순간 마법이 발동되었지만 간단하게 마력으로 짓누른 뒤 글자를 읽었다.
“선전포고.”
그게 끝이었다.
그리고 그 문자만으로 이 편지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초인들이네요.”
제국의 초인들.
그 중에서도 황궁에 소속되어 있거나 직접적으로 의뢰를 받는 이들이 보내는 편지였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쟁의 시작입니다.”
“응.”
비비안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는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전재애애앵!”
루나가 용맹한 장군이 된 듯 공포검을 추켜올리며 외쳤다.
“우리는 이 전장에서 승리할 것이다아아!”
초인들에게 선전포고가 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이 없는 모습들이었다.
[“전쟁?”]
그때 루나를 따라온 듯한 제롬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물었다.
“초인들이 올 겁니다. 제롬 때문은 아니니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다 너처럼 강한가?”]
“글쎄요. 저보다 강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약한 사람이 더 많을 겁니다.”
마침 에반도 복귀하니 한 번 붙어볼 만한 전력이었다. 집회의 흑마법사들까지 끌어다 쓰면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겠지만 굳이 시선을 끌 필요는 없겠지.
‘괜히 그랬다가 토벌이라는 명목으로 더 몰려올 수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막아만 주면 다음부터는 감히 크롬웰을 건드리지 못할 거다.
[“나 때문이 아니라면 왜지?”]
“우리 영지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겁니다. 제롬이 처음 있었던 곳 있죠? 그 전쟁의 연장선이라 보면 됩니다.”
[“왜 싸우는지 모르겠어.”]
제롬은 중얼거리더니 문득 손에 들고 있는 무언가를 내게 주었다.
[“맛있어.”]
“빵?”
[“한스가 오늘 새벽에 갓 구운 빵이라고 했다. 맛있었어. 먹어봐.”]
“감사합니다.”
빵을 건네는, 정말 별 것 아닌 행동이었지만 너무나 순수하게 느껴지는 호의에 원래 알고 있던 적기사와의 갭이 느껴졌다.
[“이곳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더 이상 그렇게 맛있는 빵을 먹지 못하겠지?”]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우리 모두가 노력할 겁니다.”
제롬은 빵을 잘라서 비비안에게 건네는 나를 보며 오른손을, 아니 오른검을 들어보였다.
[“나도 도와주고 싶어.”]
“그러면 제롬은 이 성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주세요. 눈에 띄면 더 난리가 날 수도 있어요.”
[“그러네.”]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한 차례 둘러본 제롬은 검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괜찮은 거냐. 단단하네.
[“특이한 외모는 평범하게 살기 힘들구나.”]
“적어도 제 영지에서는 최대한 평범하게 살 수 있도록 해줄게요.”
[“그럼 너를 도와야 할 이유가 늘었네.”]
제롬의 무력은 언젠가 한 번 측정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게임 속에서 겪어본 능력치도 있지만 이번에는 흑기사마저 이길 정도의 실력을 보여줬으니 기대가 되는 힘이었다.
“언제쯤 올까.”
비비안이 빵을 먹다가 물었다.
“선전포고를 한다고 바로 오지는 않을 겁니다.”
문제라면 하필 청기사의 등장 시기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제롬과 흑기사에서 비틀린 주기로 인해 과연 언제 등장할 지조차 짐작이 가지 않았다.
특히 청기사 같은 경우 조금이라도 시간을 주면 주변을 전부 초토화시키기에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일단 사람들한테 알려야겠습니다.”
“응.”
“내가 알릴게! 전쟁이다아아아!”
공포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루나가 달려 나갔다. 그런 루나의 뒤를 따르며 제롬이 내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저들이 있는 한 크롬웰이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마치 연구실처럼 꾸며진 방에는 먹다 남은 온갖 과자 상자와 쓰레기들이 뒹굴었다. 청소조차 못하게 할 정도로 타인의 출입을 금지한 그 방으로 오랜만의 손님이 들이닥쳤다.
“설마 여기에 오실 줄은 몰랐어요.”
“내가 그렇게 정 없어 보였어?”
“에이, 그런 말이 아니잖아요. 언니.”
디에네가 미소를 지으며 쀼루퉁한 표정을 짓는 루시아를 쓰다듬었다.
“무사해서 다행이야.”
“전 솔직히 한 거 없어요. 위험했을 때도 대부분 아드리아스 선배나 다른 워록들이 처리했으니까······.”
거기까지 말한 루시아는 문득 디에네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왜? 왜 그렇게 쳐다봐?”
“저한테 왔다는 건 아드리아스 선배는 이미 먼저 만나고 온 길?”
“그런 거 아니야. 여기에 먼저 왔어.”
“여기에 먼저 왔다는 건 곧 크롬웰에도 갈 거라는 소리?”
“뭔 말을 못하겠네.”
디에네가 한숨을 내쉬었다가 이내 웃었다.
루시아의 변함없는 성격에 아카데미 시절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여전해 보여서 이제 정말로 걱정이 없네.”
“여전하다뇨. 제가 그 빌어먹을 포트리온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고 왔는데. 아마 지금 제 마법 실력이 언니를 뛰어넘었을 걸요?”
“오오? 우리 루시아가 그랬어? 한 번 확인해볼까?”
“흐흐. 그렇게 후배 취급하는 것도 오늘로 끝이에요, 언니.”
루시아가 최대한 사악하게 웃어보려고 했지만 그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던 디에네는 다시 한 번 그녀를 쓰다듬었다.
“근데 너 언제 씻었니?”
“글쎄요. 한 5일 전인가?”
“······일단 가서 씻고 실력을 확인하자.”
루시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느껴지는 무언가에 혹시나 싶어 물어본 디에네는 예상이 들어맞자 얼른 손을 떼며 말했다.
“저 씻겨주려고 그 멀리서 오신 거예요? 너무 죄송한데······.”
“죄송한 줄 알면 빨리 따라와.”
강제로 루시아를 끌고 나온 디에네는 곧바로 욕탕으로 데려 갔다.
촤아악!
“윽, 차거.”
루시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튀는 물을 피했지만 이내 마법으로 생성된 물방울이 그녀를 감쌌다.
“연구를 하고 마법 수련을 하는 건 좋지만 청결을 유지해야지.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거야.”
“부글부글!”
뭐라고 항변하듯 입을 벌렸지만 들려오는 건 물이 부글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 모습에 다시 웃음을 참지 못한 디에네가 웃자 루시아는 마력을 사용해 디에네도 흠뻑 적셔버렸다.
촤악!
“예상했지.”
하지만 디에네의 주위에는 얇은 막이 생성된 상태였다.
“비겁해요, 언니.”
“잔말 말고 일단 씻자. 머리 대봐.”
이내 거품을 내어 루시아의 머리를 만져주던 디에네는 나직하게 질문을 던졌다.
“아드리아스는 괜찮았어?”
“거의 죽을 뻔했어요. 마탑주님이 말씀해주시지 않았어요?”
“들었어. 덕분에 자기도 반쯤 죽을 뻔했다고.”
“빈 말이 아니라 진짜에요. 아드리아스 선배 하나 살리려다가 마탑주님까지 저세상 가실 뻔했죠.”
촤아악-
거품이 씻겨 내려갔다.
그 모습을 눈으로 쫓던 루시아는 이내 머리를 털며 디에네를 보았다.
“어차피 여기 왔다는 건 시선을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러면 크롬웰에도 한 번 가보세요. 어차피 저희도 곧 크롬웰에 갈 것 같거든요?”
“크롬웰에?”
“네. 보다시피 저희는 작위를 산 가문이다 보니 스스로를 지킬 힘이 부족해요. 돈은 많다지만 이런 상황에서 돈은 오히려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 될 뿐이죠.”
“그래서 크롬웰로 망명하려는 거구나.”
“원래는 모하임으로 가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쪽은 저희를 골수까지 빨아먹을 것 같아서 노선을 바꿨죠.”
루시아의 말에 디에네는 곰곰이 생각을 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언제쯤 출발하는데?”
“늦어도 일주일? 같이 가시게요?”
“그래도 될까?”
“저야 좋죠. 언니랑 계속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홀링턴 각하께도 여쭤봐야겠네.”
“제가 말해줄게요. 아니, 지금 나가서 저랑 같이 바로 말하죠?”
“그래.”
디에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마음에는 어느새 크롬웰이 자리 잡고 있었다.
< 355화. 선전포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