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3화. 적기사 >
아직 전장의 열기가 식지 않은 모하임 영지는 약간의 시간을 번 틈을 타 열심히 정리 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전해 듣고 오기는 했지만 예상외의 일로 인해 머리가 복잡했다.
“음?”
마침 내가 다가오는 걸 본 병사들이 경계를 갖추며 나를 막아섰다.
“누구냐!”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내 덤덤한 소개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병사들은 이내 두 눈이 커지며 천천히 물러났다.
“아, 아드리아스 크롬웰?”
“가, 가서 상급자를 불러와!”
뭐지, 내가 온다는 사실이 아직 전해지지 못한 건가? 왜 저렇게 당황하냐.
굳이 소란을 일으키기는 싫었기에 여기서 상급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던 중 저 멀리서 특이한 외형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비비안, 제 대신에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응.”
나는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그 시신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근처에는 어쩌지도 못하고 서로 눈치만 살피는 모습의 병사들이 보였는데 내가 당당하게 다가가자 상급자라고 오해한 모양인지 고개를 숙여왔다.
‘검은 말의 기수.’
기근을 다루는 기사였다.
나오려면 적어도 2주나 남은 녀석이 왜 지금, 그것도 여기서 죽어있는 건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조심하십시오, 기사님! 근처에 다가가면 말라비틀어져 버립니다!”
내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하려하자 누군가가 경고했다. 나는 알겠다는 의미로 대충 손을 흔들어주며 시신에게 다가갔다.
“맞네.”
게임 속 그래픽이랑 조금 달랐지만 저울을 들고 있는 게 너무나 명확한 증거였다. 이런 전장에서 저울을 들고 있는 것 자체가 이상하지.
[최상급 사령술 : 언데드 소환을 시전합니다.]
[시체 감지되지 않습니다.]
혹시나 싶어 사용해봤지만 반응이 없었다.
죽은 게 아닌 걸까 싶어서 검을 뽑아 깊게 한 번 찔러보았다.
푸욱!
입고 있는 겉옷만 느껴지고 마치 허공을 찌른 듯 걸리는 게 없었다.
“거 참 신기한 놈이네.”
백기사는 역병의 문제도 있고 베리얼에게 주었으니 그렇다 치지만 이 녀석만큼은 내가 가져갈 수 있으면 가져가봐야겠다.
“크롬웰 각하!”
기근의 흑기사를 데리고 한참 이런저런 짓을 하고 있자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대화를 나눌 수는 없기에 흑기사의 영역에서 벗어나자 마중 나온 인물이 감사를 표하며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 직접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크롬웰 각하. 전 모하임 가문의 집사인 모스라고 합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모스.”
부단장인 대너드가 나올 줄 알았는데 모하임 가의 사업 부문을 담당하는 집사 양반이 나오셨군.
“그럼 바로 들어가 보실까요?”
“예. 아, 그 전에 저 시신 말입니다.”
“아! 저건 지금 성 안에 있는 적기사가 쓰러트린 괴물입니다. 듣기로는 크롬웰 각하께서 쓰러트린 백기사라는 괴물과 연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적기사가 쓰러트렸다고?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네.
애초에 나를 여기까지 부른 이유가 그 적기사한테 있다니 웃긴 노릇이다.
“확인했습니다. 혹시 저 시신은 어찌 처리하실 생각입니까?”
“아직 다른 일들이 산재해있어서 저 시신에 대한 건은 조금 미뤄질 것 같습니다.”
그럼 미누스한테 졸라서 내가 가져가야겠다.
나는 알았다고 대답한 뒤 이내 비비안과 함께 성으로 향했다.
모하임 공작성이 있는 영지 내부도 정신이 없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로 게임 속에서 보았던 몇몇 익숙한 인물들도 보였으며 모스 대신에 마중 나올 거라고 생각했던 대너드도 보였다.
“아이고! 아드리아스 각하 아니십니까!”
거대한 근육질의 덩치가 밝은 미소를 지으며 달려오는 모습이 사뭇 위협적이었다. 내 옆에 있던 비비안도 그리 느꼈는지 반사적으로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아이코, 너무 반가운 마음에 몸이 급했군요.”
“잘 지내셨습니까, 대너드 부단장님.”
“하루가 멀다 하고 정신이 없습니다. 만약 초인들까지 치고 박는 싸움이었으면 전 아마 여기에 없었을 수도 있고요. 하하!”
그래도 내가 미리 계획을 세워준 덕분에 여유가 있는 눈치였다. 내가 말하지 않았어도 모하임의 반란은 일어날 일이었고 공작가답게 꽤 오래 버텼을 거다.
“마침 전하께서도 안뜰에 나와 계십니다. 적기사라고 하는 괴상한 인물과 함께 있죠. 그러고 보니 그 괴상한 인물이 각하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아는 사이십니까?”
“모릅니다. 어떻게 절 알고 불렀는지 궁금하군요.”
“마음 같아서는 저도 같이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보다시피 여건이 되지 않는군요. 일이 끝나면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예, 수고하세요. 대너드.”
미누스는 적기사와 함께 있고 대너드가 대신해서 일처리를 하고 있는 중인가.
가면 갈수록 적기사의 상태가 궁금해졌다. 따지고 보면 보스 몬스터인데 그런 몬스터를 상대로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마주하고 있다니······.
‘적기사는 조금 특이하긴 했지.’
다른 이유로 특이하다는 게 아니라 다른 묵시록의 기사들과는 달리 별다른 개성이 없어서 특이하다는 의미였다.
백기사는 역병을 퍼트리고 흑기사는 기근을 퍼트린다. 최종 보스 격으로 등장하는 청기사는 죽음을 담당하는 만큼 특이한 기믹이 존재했는데 지금 만나게 될 적기사는 그저 육탄 공격 밖에 없었다.
“저기입니다.”
모스가 살짝 물러서며 말했다.
그곳은 대너드가 말했던 안뜰이었는데 미누스와 몇몇 호위들, 그리고 모하임 가문의 유일한 오러 마스터인 클루소와 여동생인 그레타가 보였다.
‘겁이 없네.’
상대가 정확히 뭔지 몰라서 겁이 없는 거겠지.
나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직접 마주하게된 적기사를 바라봤다. 마침 적기사도 우리의 접근을 알아차렸는지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기사라는 이름과 달리 헤져서 나풀거리는 붉은 천으로 온몸을 가리고 있는 모습의 사내였다. 특이한 점이라면 오른팔이 팔 대신 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뿐.
“여어, 아드리아스 크롬웰. 죽다 살아난 우리의 영웅 아닌가?”
적기사의 시선이 돌아간 걸 보고 나의 도착을 알아챈 미누스가 반갑게 외쳤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아는 척을 한 뒤, 신경은 전부 적기사에게 집중한 채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죽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보게 되서 좋네. 비비안 경도 오랜만?”
잠시 인사를 나누는 사이 적기사와 얼굴을 마주쳤다.
뭐라 할까.
탑에서 보았던 이모탈이 생각나는 외모였다.
만화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외모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이제 보니 나보다 여기 있는 자를 더 반가워하는 것 같네? 구면인가?”
“처음 봅니다.”
사실 구면이지. 게임에서 50번도 넘게 잡아본 보스몹이니까.
그때 누군가가 내 곁으로 다가와 자연스레 팔짱을 꼈다. 눈살이 찌푸려지는 것을 간신히 멈추고 옆을 돌아보자 그레타가 눈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크롬웰 공.”
“인사가 늦어 죄송합니다, 그레타. 조금 특이한 상황이라 정신이 없었네요.”
“괜찮아요. 그것보다 더 멋있어졌네요? 보기 좋아요.”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나는 말없이 그레타의 눈을 바라봤다. 그러자 그레타는 무안해졌는지 슬쩍 팔짱을 풀며 배시시 웃어넘겼다.
“죄송해요. 갑자기 팔을 잡아서······.”
“아닙니다, 뭐······.”
흠칫!
순간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처음에는 적기사의 기운인가 싶었지만 이내 나와 그레타를 싸늘하게 바라보고 있는 비비안이 보였다.
“흠흠.”
이럴 때가 아니지.
나는 말없이 관찰하고 있는 적기사를 살피며 미누스에게 물었다.
“저 자가 저를 찾았다는 말씀이시죠?”
“그래. 안 그래도 한 번 얼굴도 볼 겸 널 부를 생각이었는데 마침 일이 이렇게 됐지. 그런데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떻게 널 안 거냐?”
“물어보면 되겠죠.”
자, 그래서 나는 어떻게 안 거고 왜 부른 거냐.
“적기사라고 부르면 될까요?”
[“글쎄.”]
내부를 울리는 적기사의 목소리에 순간 온몸에 근육이 긴장했다. 마치 초월자의 음성과 비슷한 그것에 경계를 조금 끌어올렸다.
“저는 어떻게 안 겁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이 말하는 걸 엿들었다. 네가 백기사라는 괴물을 죽였다면서?”]
“맞습니다.”
[“그거 때문에 궁금해서 부른 거다. 나도 내가 누군지 모르거든. 너라면 알지 않을까 싶어서.”]
이건 또 무슨 상황이냐.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보스 몬스터라고?
‘그러고 보니 적마가 보이지 않네.’
이 보스들의 이름이 기수이듯 그들이 타고 다니는 말들은 상징과도 같았다. 그 정도로 중요한 존재가 곁에 없는 게 뭔가 이상했는데 아무래도 이상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
생각을 할 시간이 필요했다.
태도를 보아하니 우리에게 딱히 적대적이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지닌 건 아닌 듯싶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 했지?”]
“예.”
[“단 둘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갑작스러운 적기사의 제안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아무리 그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다고 해도 평범한 인간이 아님을 알고 있기에 모두들 어느 정도 경계를 하는 기색이었다.
“굳이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나?”
미누스가 그런 분위기를 때려는 듯 나섰다.
하지만 나도 적기사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기에 조심스레 나섰다.
“전 괜찮습니다.”
“아드리아스.”
미누스가 경고를 하듯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난 괜찮다는 미소를 보여주며 말했다.
“설마 그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이 분이 절 공격한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공격해는 게 고민도 없고 좋았다.
아예 생각할 여지가 없게 해결해버릴 수 있었으니까.
[“내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 달라서 경계하는 건가? 정말 모르겠어.”]
그때 적기사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적응할 수 없는 모습이네.
내가 알던 적기사는 이전에 죽였던 백기사처럼 끝없는 적의를 지닌 채 살아있는 모든 걸 죽이려 드는 모습뿐이었는데.
“내가 따라갈게.”
비비안이 타협점을 찾듯 말했다.
나도 비비안까지는 상관없다고 생각되어 적기사에게 동의를 구하듯 쳐다보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 불안하다면 그래도 돼.”]
진짜 적응이 안 되네.
사람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적기사를 보며 어이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자 미누스가 손을 흔들었다.
“마음대로 해라. 어차피 나도 바빴는데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와야겠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내 집무실로 올라와라.”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이내 나와 비비안을 제외한 사람들이 모두 자리를 비켜주었다. 안뜰에 남은 적기사와 우리는 잠시 할 말을 고르며 어색한 침묵 속에 남겨졌다.
[“백기사는 무슨 말을 했지?”]
“글쎄요. 대화를 나누기도 전에 죽여 버려서······.”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었기에, 그리고 애초에 내게 있어서 묵시록의 기사들은 처리해야할 대상이었기에 대화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만, 당신이 흑기사를 죽였습니까?”
[“죽이려고 한 건 아니야. 살려고 발버둥 치다가 그렇게 된 거지.”]
“흑기사가 당신을 죽이려고 했습니까?”
[“어.”]
너무나 평범한 말투와 말의 내용에 내가 진짜로 묵시록의 기사와 대화하는 건가 싶었다.
[“난 도대체 뭐지? 왜 그 녀석은 날 죽이려했고 난 그런 전장에서 태어난 거지? 왜 내 모습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걸까?”]
그는 복잡해 보이는 얼굴로 내게 물었다.
정답을 알고 있지만 나는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태어난 괴물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게다가 이미 묵시록의 기사 중 2마리가 죽었으니 묵시록은 실현되지 못했다. 넷 중 하나라도 없으면 멸망은 거의 막은 거나 다름없기에 굳이 적대적이지 않은 적기사를 처리하는 것도 애매했다.
물론 나중에 나타날 죽음의 청기사 같은 경우 뭔가 고장 난 듯한 적기사와는 달리 살아있는 모든 걸 적대하겠지만.
[“난 이제 뭘 해야 하지.”]
고뇌에 가득 찬, 쓸쓸하고 답답한 적기사의 음성이 텅 빈 안뜰을 가로 질렀다.
< 353화. 적기사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