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1화. 고민 >
“어떻게 된 일이지?”
유노르 후작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그의 시선이 에레스티얼 후작에게 향하 것을 보면 내게 묻는 것 같지는 않았기에 일단은 지켜보았다.
“크롬웰 백작이 우리를 구해주었네.”
반란군에 속한 이후로 백작의 작위가 사라졌지만 여전히 백작이라 부르는 에레스티얼 후작을 보며 유노르 후작은 말없이 우리를 바라보았다.
“괴물은 죽었네. 여기 있는 크롬웰 공이 처리했어.”
“혼자서 말인가?”
“그러고 보니 혼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곁에 있는 기사와 함께 죽였던 건가?”
아무래도 니켈을 말하는 듯했는데 비비안과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어찌됐든 크롬웰 공이 조금만 늦었어도 우리는 모두 죽을 처지였네. 실제로 죽음을 각오하고 남아있기도 했지만.”
“멍청하군. 도망치지 않은 건가?”
“우린 에레스티얼이야. 누구처럼 불리하다고 도망치지 않아.”
또 시작되려는 견원지간의 싸움에 세레나가 조심히 끼어들었다.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유노르 각하.”
“흥, 도와주러 온 게 아니라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을 구경 왔을 뿐이다.”
“허! 그런 것치고는 호흡이 거칠군? 오러 마스터가 헐레벌떡 달려올 정도로 구경이 고팠다니 마음껏 보고 가게나.”
두 후작 간의 치기 어린 아이와 같은 싸움이 계속 되는 가운데 뒤늦게 다른 사람들이 도착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원이 유노르 가문의 문장을 단 기사들이었다.
“크리스?”
그리고 그 중에는 어느새 더욱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변한 크리스가 있었다.
세레나가 놀랐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부르자 크리스의 시선이 세레나에게 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일 뿐, 고개를 돌리다가 나를 발견한 모양인지 두 눈이 크게 뜨이며 걸음을 멈췄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싸가지가 없는 건 여전했다.
“오랜만이다, 크리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 크리스는 이내 냉정을 되찾으며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지금 반란 주동자 중 하나를 대접하고 있는 건가?”
“어허, 주동자라니! 그대도 알겠지만 크롬웰 공은 포트리온에 있느라 영문도 모른 채 사건에 휘말린 셈이야. 우리 가문의 은인을 그렇게 매도를 하는 건 듣기 좋지 않군.”
“내가 듣기 좋은 말만 해야 하나? 지금 보니 정신 상태가 영 좋지 않군.”
다시 말싸움이 시작되려는 징조가 보이는 가운데,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두 분 모두 오랜만에 얼굴을 보아 반가웠습니다. 아, 저 괴물이 쓰러진 장소는 되도록이면 다가가지 않는 게 좋습니다. 중독될 가능성이 있어서요.”
역병을 설명하기는 귀찮으니 그냥 독이라고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가려고 하지.”
유노르 후작이 으름장을 놓았지만 무시하고 일어났다.
턱!
크리스가 지나가려는 내 앞을 막았다.
그러자 보고 있던 세레나가 나직하게 말했다.
“크리스, 비켜.”
“그렇게는 못하겠군.”
제 아버지를 닮아 얼음조각 같은 인상을 지닌 크리스가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크리스!”
세레나가 소리 쳤지만 그는 물러날 기미 없이 나를 바라본 채 서있었다.
“시험해보고 싶은 거냐?”
“······.”
내가 물음에 크리스는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차가운 크리스의 인상 속에서 한 줄기 열망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얼마 전에 루이스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던 인정 욕구였다.
‘나한테 인정받고 싶은 건가.’
궁금하기는 했다.
루이스는 무려 화안금정이라는 희대의 오러 비기를 각성한 상태, 과연 크리스도 오러 마스터가 되었을까?
느껴지는 기세로 보면 아직 오러 마스터가 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도 오러 비기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몰랐으니까.
그렇지만······.
“다음에 확인해줄게. 둘 다 시간이 나면 크롬웰로 와라.”
이미 유노르 후작이 도착했을 정도로 제국의 움직임은 빨랐다. 가까웠으니 빠르게 온 것도 있겠지만 더 이상 시간을 보내다가는 정말로 토벌대가 도착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여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두 번째 기사인 전쟁의 적기사는 백기사가 소환되고 정확히 13일 뒤에 나타난다. 이후 등장하는 녀석들도 13일의 텀을 두고 차례대로 등장하는데 바로 출발을 해야 소환되는 장소에 미리 도착해있을 수 있었다.
“크롬웰로 오라니 죽으러 가라는 소리인가요?”
세레나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그건 내 알 바 없었다.
“오기 싫으면 오지 않아도 돼. 참고로 루이스는 이미 크롬웰에 와있다.”
“루이스가요?”
“루이스······.”
아직 소식이 퍼지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설령 소식이 전해졌어도 전쟁이나 백기사 때문에 정신이 없었겠지.
“막으실 겁니까?”
마지막으로 유노르 후작에게 물었다.
그는 차갑게 내려앉은 눈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난 널 본 적이 없다.”
“감사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만 앙숙지간이지 실제로는 그 어떤 가문들보다 단단한 사이를 맺고 있는 두 가문인 만큼 에레스티얼을 구한 날 막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실제로 헐레벌떡 뛰어올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뒤따라오는 비비안과 루나를 데리고 성을 나섰다. 은근한 시선이 뒤통수를 통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하고 걸어갔다.
“이제 어디로 가?”
“다시 돌아갑니다.”
“돌아가? 어디로?”
“크롬웰로 갈 겁니다.”
첫 번째를 제외한 묵시록의 기사들이 나타나는 장소는 매번 변했다. 하지만 무작위는 아니었고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장소에 소환이 되었다.
전쟁의 적기사가 나타나는 곳은 주로 전투가 일어나는 장소, 그 중에서도 내란이 일어나는 곳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제국 서부가 유력한 상황.
애초에 내가 모하임에 입김을 넣은 것도 모두 이번 에피소드를 예상해두고 벌인 일이었다.
‘동선은 짧을수록 좋지.’
일단은 크롬웰로 돌아간 뒤 천천히 상황을 파악해도 늦지 않았다.
**
타닥타닥-
밤이 깊어지고 장작이 타들어갔다.
노숙이라고는 하지만 내 마법으로 만든 흙 움막으로 큰 불편함은 없었다.
어느새 루나는 잠이 들어 숨을 고르게 내쉬고 있었고 나와 비비안은 말없이 모닥불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크롬웰은 내일이면 도착할 수 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백기사를 처리하기 전에 미리 만났던 에반의 수하에게 나머지 기사들이 소환될 만한 장소를 감시하게 시켰으니 준비는 이미 마친 셈이었다.
“아드리아스.”
“예.”
“헤이겔이라는 흑마법사를 찾으러 온 게 아니라 그 괴물을 잡으러 온 거였지?”
비비안의 말에 나는 내심 놀랐다.
티가 났었나?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너무 당연하다는 반응이었으니까.”
비비안은 내 얼굴을 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만졌다.
굳은살이 박혀 거친 손가락이 내 얼굴에 난 흉터를 쓰다듬었다.
“왜 그렇게 고생하는 거야.”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요.”
그리고 많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이었다.
“내가 모르는 게 아직 있는 거지.”
“예.”
“말해줄 생각은 없어?”
3년 동안의 기다림.
비비안이 날 생각하는 마음을 알고 있는 만큼 얼마나 끔찍한 세월이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내색은 안했지만 마음고생이 심했겠지.
오히려 그런 그녀였기에 진실을 말해주기가 겁이 났다.
‘믿어주기야 하겠지만······.’
믿어주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과연 나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가 이 세상이 아닌 지구라는 다른 차원에서 왔다는 걸 이해해줄까. 원래는 이 세상을 게임으로 수십, 수백 번 경험해봤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떤 반응일까.
옆에서 귀엽게 자고 있는 루나가 이미 죽었어야 할 인물이라고 말하면? 아드리아스라는 인물도 원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고 흑마법사로서 죽었을 운명이라는 건?
사실은 비비안이 진즉에 죽었어야 할 빌런이라는 걸 알게 되면?
‘안 돼.’
분명 비비안이라면 노력은 할 거다.
하지만 무의식은 노력으로도 바꾸기 힘든 영역이었다. 아무리 노력을 한다고 해도 이미 정보가 뇌리에 박힌 이상······.
“아드리아스.”
혼자 복잡한 생각에 빠져있자 비비안이 양 손으로 내 볼을 잡고 날 불렀다. 난 눌린 찐빵처럼 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괴로우면 말해주지 않아도 돼. 그렇게 고민할 필요 없어.”
말랑말랑-
은근슬쩍 내 볼을 가지고 노는 비비안을 보며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아드리아스가 선택하는 모든 결정을 존중해. 아드리아스가 나한테 말해주지 않는 건 분명 이유가 있어서겠지.”
괜히 미안해지네.
저런 태도를 보이니까 죄책감이 더 생겨났다.
“전······욱.”
내가 뭔가를 말하려고 하자 비비안이 내 양 볼을 눌렀다.
“억지로 말하지 않아도 돼.”
표정은 굉장히 진지했는데 그런 모습으로 내 볼을 가지고 노는 게 웃겼다.
“대신 하루에 한 번씩 이렇게 만지게 해줘.”
“울굿숩니두.”
“뭐라고?”
“알겠습니다.”
손에 힘을 빼니 간신히 제 모양을 되찾은 입으로 대답하자 비비안이 환하게 웃어보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 미소가 건드리면 흩어질 것처럼 아련했다.
‘아······.’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행복을 모르고 지낸 내가 도리어 행복을 느끼게 되니 불안해졌다는 사실을. 혹여나 이 행복을 내 실수로 잃게 되는 건 아닌가하는 상상이 나를 뱀처럼 옭아맸다.
‘과연 내게 행복할 자격이 있을까.’
그리고 이 모든 여정을 마치고 나면, 그때는 이 행복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행복하네요.”
그러나 부정하지 않았다.
난 지금 행복하다. 그 사실은 변치 않는다.
설령 이 행복으로 불안에 떨어도 차라리 그게 낫다.
“나도. 아드리아스가 돌아와서 다행이야.”
비비안의 손이 천천히 내 얼굴에서 떨어졌다.
“널 잃고 나니까 더 확실하게 느꼈어.”
이름이 아닌 너라고 불린 건 오랜만, 아니 처음인가?
“내가 널 좋아한다고.”
“크흠.”
아무리 그래도 이건 치사량을 넘었다.
나는 괜스레 시선을 돌리고 싶었지만, 또 그러기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진지하게 눈을 마주쳤다.
슬쩍.
그런데 의외로 비비안 쪽에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본인이 말해놓고도 부끄러운 모양이었는지 시선이 계속해서 흔들렸다.
저 얼굴은 모닥불 때문에 빨개진 건가, 아니면 방금 그 말 때문에 빨개진 건가.
“저도 좋아합니다. 고마워요, 좋아해줘서.”
“응.”
말수가 줄어든 비비안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이내 몸을 조금씩 움직여 루나의 곁으로 향했다.
“먼저 잘게. 이따가 깨워줘.”
“예. 안녕히 주무세요.”
저 반응을 보니 아마 잠을 못자지 않을까 싶었다. 부끄러워서 일단 후퇴를 한 거겠지. 귀엽네.
타닥!
불침번을 서며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와 이 세상, 그리고 전생과 행복에 대해서.
‘일단 모든 걸 끝낸 후에.’
지금은 가슴 속에 가득 차는 행복을 느끼기에도 벅찼다. 누군가에게는 별 것 아닐 수도 있었지만 이런 자잘한 일상이 내게는 특별했다.
마음이 여물어가는 밤이었다.
< 351화. 고민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