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0화. 누군가의 은인 >
따땃한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
싱그러운 푸르름이 아카데미를 감쌌지만 정작 학생들의 상태는 좋지 못했다.
“끄어어.”
“이제 더 이상 안 돼. 휴식이 필요해.”
개교기념 행사가 끝나고 곧바로 시작된 아카데미 1학기 중간평가.
점차 더워지는 날씨와 함께 학생들의 피로도도 덩달아 높아지고 있었다.
후웅!
그 가운데에서도 누군가가 연무장에서 수련을 하고 있었다.
“우와, 저거 봐라.”
“쟤는 우리랑 같은 일정 치르는 거 맞냐? 미치겠네.”
홀로 공용 연무장을 사용하고 있는 이는 학생회 말석을 쓰러트린 신입생, 벤자민 아니키우스였다.
그는 유일하게 학생회 임원 자리를 거부한 사람이었는데 그로 인해 또 한 번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었다.
후웅!
여전히 온몸에 검을 주렁주렁 매단 벤자민은 한 눈에 봐도 무게가 상당한 훈련용 대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탁탁탁!
“어어이이이~”
그런 그를 향해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어왔다. 벤자민은 시선도 돌리지 않고 천천히 검만 내린 채 물었다.
“후우, 무슨 일이죠?”
“회장님이 말 좀 전달해달라고 해서 왔지.”
학생회 7석, 마릴린이었다.
그녀는 벤자민이 카심을 쓰러트린 이후로 종종 말을 걸고는 했는데 그때마다 벤자민의 반응은 차갑기 그지 없었다.
“회장님이?”
“너 은근슬쩍 선배한테 반말한다?”
“그래서 무슨 말을 전달하러 오셨죠?”
알 것 없다는 식으로 말을 넘긴 벤자민을 잠깐 뚱한 얼굴로 바라본 마릴린이 말했다.
“아드리아스 교수님 강의도 평가가 있대. 평가는 일주일 뒤에 있고 내용은 그때까지 비밀.”
“아드리아스 교수님 평가?”
아드리아스는 초인 증명을 하러 간 이후 며칠 동안 종적을 감추더니 갑자기 다시 아카데미에 나타났다.
황궁에서도 초인 증명에 대한 결과를 공표하지 않았기에 소문만 무성했는데 아드리아스는 별로 관심이 없는 듯 주에 한 번 씩은 꾸준히 강의를 해왔다.
‘평가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오히려 좋아.’
이미 아드리아스에 대한 믿음이 하늘을 찌를 듯한 벤자민이었기에 중간평가로 인해 바쁜 일정 속에서도 감사한 감정을 느꼈다.
“뭐야, 너? 표정 봐라? 오히려 기쁘다는 얼굴이다?”
“기쁩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벤자민이 미소 지었다. 그 얼굴에 잠시 말을 잃은 마릴린은 이내 자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야. 꿈이 아니네.”
“뭐하십니까?”
“아니, 네가 웃는 걸 처음 봐서 꿈인가 했지.”
“저 이래봬도 자주 웃습니다.”
기분이 좋아진 벤자민이 너그럽게 맞받아치자 마릴린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아드리아스 교수님이 좋냐?”
“그 분은 제 은인입니다. 생명의 은인이라는 말로도 표현이 안 될······삶의 은인이라고 해야겠죠.”
“그래, 그러시겠지. 어쨌든 일주일 뒤에 새벽 4시까지 여기로 집합. 난 전달했으니까 가본다?”
“감사합니다. 근데 마릴린 선배.”
“응?
“왜 굳이 직접 오셨습니까? 태블릿으로 메시지를 일괄 발송하면 되는데.”
“네가 보고 싶어서.”
마릴린은 그 말을 끝으로 장난스럽게 혀를 내밀며 사라졌다.
웃긴 선배라고 생각한 벤자민은 이내 아드리아스의 평가를 생각했다.
“일주일 뒤라······.”
일주일 뒤라면 모든 과목의 중간평가가 끝난 이후였다. 아마 일부러 그렇게 일정을 잡은 듯했기에 벤자민은 추측을 해볼 수 있었다.
“하루 만에 끝나지 않는 평가인가.”
어쩌면 며칠 동안이나 아드리아스를 비롯한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졌다.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한 선배 세 명과 그 누구와도 비교 불가한 아드리아스 크롬웰.
“재밌겠다.”
벤자민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
“저······교수님?”
집무실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나는 조교수인 애덤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음?”
“혹시 이 부분을 좀 질문해도 괜찮겠습니까?”
“가져와봐.”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나.
처음 이곳에 왔을 때까지만 해도 마법적 지식이 전무했던 내가 살렘과 모른을 비롯한 여러 마법사들과 어울리다 보니 정말 그럴 듯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다.
‘재능 보정도 있지만.’
어느새 진화한 마나 재능은 영재급이었고 흑마법 사령 계열은 천재급 재능이었다.
비록 모두를 아우르는 ‘마법’ 재능이 아닌 흑마법 중에서도 사령 계열의 재능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범인은 훌쩍 뛰어넘는 마법적 재능이었다.
‘독학을 열심히 한 것도 빼면 안 되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애덤의 술식을 살피자 문제가 보였다.
“여기는 회전 술식을 넣지 말고 물 원소의 술식을 한 번 넣어봐.”
“네? 갑자기 원소 술식을요?”
“원소 술식은 회전과 같이 단순 술식이지만 그 형질은 복합적이라는 걸 알거야. 원소는 하나의 특징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어, 그렇다면 물은······.”
내 말에서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듯 애덤이 조용해졌다.
역시 로들렌 졸업생이라 그런가, 지구로 따지면 하버드생이었던 셈이니 평범한 졸업생도 똑똑했다.
“아, 형태를 언제든 변화할 수 있고 흐른다는 특징으로 회전을 대체하는 거군요!”
“그렇지. 게다가 더 능동적인 대처도 가능하고. 단순히 회전만 가능한 거랑 달리 변주의 폭이 넓어져.”
“똑같은 단순 술식인데 훨씬 넓은 범위의 운용이 가능하겠군요. 역시 교수님이십니다!”
“대신 부작용도 있어. 회전과 달리 변수가 너무 많아서 계산을 확실히 해야 돼.”
“알겠습니다!”
뿌듯하네. 내가 로들렌 졸업생에게 훈수를 둘 정도의 지식을 가지게 되다니.
물론 게임에서의 지식도 큰 도움이 됐지만 말이다.
“교수님께서 마법학부 학생들도 가르쳐주시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텐데 아쉽습니다.”
술식을 다시 살피던 애덤이 정말로 아쉬운 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은 해볼게. 다음 학기부터는 받을 수도 있고.”
“정말 그리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교수님께서 얼마나 뛰어난 마법적 지식을 가졌는지 모른다니까요? 그걸로 언성을 높인 것만 3번은 넘습니다.”
“굳이 신경 쓰지 마. 너만 피곤해진다.”
남이 뭐라 하는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황제를 만나보니 대혼란 에피소드가 직전까지 다가왔음을 실감했는데 지금 그런 게 문제냐.
‘멸망급 에피소드가 시작될 거다.’
대혼란 에피소드와 멸망급 에피소드는 별개였지만 연관이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대혼란으로 인해 멸망급 존재들이 깨어난다고 보면 됐다.
예상보다 조금 이르지만 대처할 방법은 이미 다 생각해둔 상태.
띠리링-
“아! 죄송합니다.”
애덤이 들고 있던 태블릿이 소리를 냈다.
메시지가 도착한 모양인데 그를 확인한 애덤은 곧바로 내게 말했다.
“아! 교수님이 신청하신 평가가 통과됐습니다.”
“그래?”
교수들은 모두 평가 계획서를 제출하는데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 일이 조금 바빠 평가 계획서의 제출이 조금 늦었는데 무사히 통과가 된 모양이었다.
“음? 교수님, 추신으로 교장 선생님께서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요?”
“지금?”
“언제든 시간이 되실 때 방문하라고 하십니다.”
“지금 바로 가볼게.”
“알겠습니다.”
애덤이 다시 태블릿으로 내가 곧 갈 거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나는 비비안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오냐.”
애덤의 인사를 뒤로 하고 곧장 행정동으로 향한 나는 교장실까지 직행했다.
“어서 오십시오. 앉으시죠.”
데오스는 언제나 그렇듯 포근한 미소와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다.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이번 평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플레이어블 4인방을 데리고 나가는 평가의 내용은 나와 비비안, 그리고 계획서를 확인한 데오스만 알고 있었다.
“아드리아스 교수님의 실력은 익히 알고 있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큰일은 없을 겁니다.”
아니? 절대 큰일 있을 건데?
평가 계획서에는 단순히 용병 체험이라고 해뒀지만 실상은 달랐다.
“가문에서 직속으로 고용한 베테랑 용병이 있습니다. 그녀도 함께 가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흐음, 비비안 양께서도 당연히 함께 하시겠죠?”
“그럼요.”
내가 떼어놓고 싶어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실력을 생각하면 뗄 이유도 없지만.
“그것보다 단순히 용병 체험은 아니리라 생각하는데 구체적인 계획이 따로 있겠죠?”
기사학부의 가장 뛰어난 인재를 데려가는 일인 만큼 교장의 걱정이 이해가 됐다.
사실대로 말하면 승인이 떨어지지 않을 게 뻔했기에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아마 간단한 몬스터 처치를 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저희 측에서 고용한 용병에게 조언을 구해보려고요.”
“흐음, 알겠습니다. 모쪼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예.”
그렇게 간단히 데오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밖으로 나오는데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음?”
처음에는 비비안의 기운인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설마······.’
나는 가볍게 마나 파동을 날려 주변을 정리했다.
“왜 그래?”
내 갑작스런 행동에 비비안이 주위를 경계했지만 나는 손을 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몸이 조금 뻐근해서 마나를 순환시켰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비비안에게는 대충 얼버무렸지만 아마 조금 전의 기운은 정령이 틀림없었다.
‘마나 재능이 진화를 해서 느껴지나 보네.’
진화를 하지 않았으면 정령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마 습관적으로 마나 파동을 사용했을 테지만.
데오스를 만나고 난 이후에는 실제로 정령이 붙는지 안 붙는지는 몰라도 항상 주의를 해왔다.
“아드리아스.”
“예.”
“정말로 괜찮겠어?”
비비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마 평가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오히려 짐이 돼서 아드리아스한테 해가 될 수도 있어.”
“애들을 걱정한 게 아니라 절 걱정한 겁니까.”
나도 모르게 맥이 빠지며 웃음이 나왔다.
괜찮겠냐는 물음에 당연히 애들이 괜찮을지 물어본 줄 알았다.
“전 괜찮습니다. 오히려 전 애들을 믿어요.”
“강한 건 맞아. 하지만 그 애들은 실전을 많이 겪어보지 못했어. 특히 흑마법사랑 싸워본 적은······.”
거기까지 말한 비비안은 입을 다물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건 알고 있지만 말을 조심하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전 애들하고 같이 있지 않을 거예요.”
“그럼······?”
“보모 역할은 따로 생각해둔 사람이 있죠.”
그 사람의 반응을 생각하며 웃었다.
아마 질색을 하겠지.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
“음?”
이자벨과 함께 차를 마시던 막시민은 갑자기 간지러워지는 자신의 귀를 긁었다.
“왜 그래요?”
“아니, 누가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군.”
“후후. 제국에서 또 당신을 욕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오히려 다행인데······.”
유난히 감각이 발달한 막시민은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내가 볼 때는 애송이가 또 이상한 짓을 꾸미는 것 같아.”
“그래도 빠지지는 않을 거잖아요.”
“그래. 약속을 했으니 무르지는 않아.”
크게 감사를 표한 적은 없지만 이미 막시민에게 있어서 아드리아스는 인생의 은인이었다.
표현하는 게 서투를 뿐이지 이자벨의 신변에 위협이 생기는 문제만 아니라면 그녀와 함께 평생 아드리아스의 곁에 있기로 다짐한 상태였다.
“불안한데······.”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따라간다고 할 걸 그랬어요. 재미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텐데 놓치겠네요.”
“아니야. 아무 일 없을 거다.”
막시민은 진심으로 빌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 320화. 누군가의 은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