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화.아드리아스의 전진 >
“황제가 꾸민 짓이라는 말이구나.”
다른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에반과 노아를 제외하고 에이미는 영지를 살피는 사이 모두가 한 곳에 모였다.
어차피 숨길 필요도 없는 사이이니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자 모른이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선을 넘었어.”
그 미소를 본 살렘이 자신도 따라 웃었다.
“영감, 오랜만에 예전 모습을 볼 수 있으려나?”
“혈기왕성할 시절에는 무턱대고 들이박았겠지만 지금은 나도 한낱 늙은이야.”
“뭐야, 폼은 다 잡다니 쫀 거야?”
“흐흐, 살렘. 이 늙은이는 물러서겠다는 소리를 하는 게 아니야.”
모른이 내 손에 들린 반지를 가리켰다.
“우선은 준비부터 해야지. 제국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세력을 더 키워야해.”
“오호라. 집회를 먹을 때가 된 건가?”
“집회! 먹자!”
루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지금 있는 반지가 몇 개지?”
“3개입니다.”
헤이겔의 반지, 모른의 반지, 그리고 조금 전에 얻은 제스터의 반지.
“7개가 남았구나.”
“3개면 수장들 중에서 가장 많이 가진 거 아니냐?”
살렘과 모른의 말에 나는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수장들이 각자 몇 개를 가졌는지 파악하고 계십니까?”
“난 집회 소속이 아니야. 반지가 아티팩트도 아닌데 관심을 가질 이유는 없지.”
“미안하구나. 나도 누가 몇 개를 가졌는지 아는 바가 없어.”
그럼 결국 그 7개의 행방은 오리무중이라는 소리군.
‘아!’
마침 떠오른 게 있었다.
주변을 살피고 나는 모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언데드 하나를 소환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거라. 굳이 내게 물을 필요도 없어.”
모른의 허락에 나는 곧장 리치킹을 소환했다.
초대 집회 창시자 중 하나이자 불변이라는 이명으로 불렸던 최강의 네크로맨서.
-크라하!
······가 나올 줄 알았는데 왜 네가 나오냐.
“호오, 리치킹이구나.”
“이야, 재밌어 보이는 걸 가지고 있었네.”
이미 리치킹을 본 적이 있는 루나와 라고도 소환된 녀석에게 관심을 가졌다.
“라고, 힘들었다. 리치, 나쁘다.”
“와! 이거 친구 걸로 만든 거야? 대단해!”
막시민과 이자벨은 그저 조용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갑자기 관심이 쏠린 알-구르드가 머리를 긁었다.
-위대한 전사여, 이건 무슨 상황인가. 싸움이 아니었나?
“잠깐 볼 일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혹시 하룬겔은 안에 있습니까?”
-으음, 전투가 아니라 아쉽지만 그대가 원하니 그 불경한 녀석을 불러오도록 하지.
리치킹은 이내 축 늘어졌다가 다시 고개를 번쩍 들어올렸다.
알-구르드가 통제할 때와는 다른 음침하고 사악한 기운이 텅 빈 안구에서 스멀거렸다.
-애송이들이 많이도 모였구나.
오만한 말을 보니 하룬겔이 확실했다.
“하룬겔이라면······.”
그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른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리치킹을 가리켰다.
“부, 불변의 하룬겔이라는 말이냐?”
-그렇다, 다 죽어가는 늙은이. 이 몸이 한때 세상을 뒤흔들었던 위대한 흑마법사, 불변의 하룬겔 님이시다.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나타나자 하룬겔의 콧대가 이만큼이나 늘어나는 게 보였다.
나는 결국 그런 오만방자함을 참지 못하고 명령을 내렸다.
“하룬겔, 앉아.”
-음?
하룬겔은 의문성을 토해냈지만 몸은 정직하게 내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네 이놈! 감히 이 몸을 농락하는 것이냐!
“하룬겔, 기어.”
납작-
내 말에 꽤 큰 덩치를 지닌 리치킹이 바닥을 기었다.
행동과는 다르게 안광만은 이글거렸는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크, 크흠. 아가야, 아무리 본인의 언데드라지만 조금 보기가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일어나, 하룬겔.”
언제 날을 한 번 잡고 상하관계를 다시 똑바로 잡아놔야겠다.
“크흐, 불변의 하룬겔이라······. 설마 이런 꼴이 되어있을 줄은 몰랐군. 한 번 실험용으로 써봐도 되냐?”
“안 됩니다.”
살렘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한 나는 하룬겔에게 반지를 보여주었다.
“이게 뭔지 알지?”
-······그건 또 어디서 났지?
하룬겔의 시선이 반지에서 떠나질 못했다.
그러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류드의 반지군.
“류드?”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집회의 창시자쯤이면 누구나 알 법한 마법사일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가.
-류드밀라 오를로프.
착각인지 모르겠지만 하룬겔의 목소리가 어쩐지 잠겨있는 듯했다.
“정말 하룬겔이 맞는 모양이군.”
옆에서 보고 있던 살렘이 고개를 끄덕였다.
“류드밀라는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은둔한 현자의 느낌이었지. 지금 현자라고 불리는 미아 린이랑 달리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마녀였어.”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살렘이 더 놀랍다.
-어째서 그 반지를 네가 가지고 있지?
“집회 반지는 아직도 남아있어. 집회의 수장들이 각자 가지고 있지.”
-지랄 났군.
하룬겔이 투덜거리더니 반지를 가리켰다.
-나한테 주어라.
“반지를?”
나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용아병이 보관하고 있는 나머지 두 개의 반지도 더 꺼냈다.
각각 헤이겔과 모른이 주었던 반지.
“이건 누구 건지 알겠냐?”
-······3개나 가지고 있었던 거냐.
하룬겔은 반지를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이내 웃음소리를 내었다.
-푸흐흐. 내 반지도 있군.
“이거?”
-아니, 그 옆에 거다.
겉보기에는 다 똑같은 외형이지만 숫자가 새겨진 덕분에 구별은 쉬웠다.
-나머지 하나는 라바의 반지군. 그 빌어먹을 가식덩어리.
“라바 미름닐!”
아는 이름이 나오자 루나가 소리쳤다.
처음에 나왔던 류드밀라와 달리 하룬겔처럼 유명한 마법사였다.
원소 마법의 대가로 처음으로 원소 마법의 이론을 정리했다고 알려진 인물이었다.
-하아아. 이제는 다 뒤지고 나만 남은 거군.
하룬겔이 우울한 어조로 중얼거리더니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반지를 나한테 줘라.
“아니 근데 넌 네 반지가 여기 있는데 왜 굳이 류드밀라의 반지를 달라는 거냐?”
-그냥 달라면 좀 줘라.
하룬겔이 성질을 내더니 이내 다시 한숨 소리를 내었다.
-반지를 주면 반지에 얽힌 비밀을 말해주지.
“그래. 어차피 네게 내 건데 상관없지.”
하룬겔이 나를 배신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반지 좀 빌려준다고 큰일이 나는 건 아니니 곧바로 건네주었다.
-류드.
하룬겔이 왠지 아련한 어조로 이름을 부르더니 반지를 움켜쥐었다.
-이 반지들은 우리가 집회를 창시할 당시에 함께 만든 아티팩트들이다.
“아티팩트?”
이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건 아무것도 없지. 실제로 뭔가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10개의 반지가 모두 모이면······.
“모이면?!”
루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하룬겔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도 모른다.
“뭐야 그게!”
루나가 소리쳤다.
한껏 기대하게 만들어놓고 허무하네.
-반지를 만든 놈은 베른헬이었다. 그 놈도 집회 일원 중 하나였지. 아무튼 10개가 모이면 뭔가가 일어난다고 했던 건 베른헬이 해준 말이었다.
“10개가 모인다는 건 구체적으로 무슨 소리지? 10명이 반지를 끼고 모였던 적이 있었을 텐데.”
-베른헬의 말에 따르면 한 사람이 10개의 반지를 모두 끼워야한다고 하더군.
반지가 얇은 편에 속했지만 10개를 열 손가락에 다 끼라니······.
애초에 왜 그런 기능을 넣은 거지?
‘한명이 다 끼게 될 상황을 만들었다는 게 이해가 안 가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하룬겔의 설명이 이어졌다.
-베른헬은 우리 중에서도 가장 괴짜였지. 그와 온전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류드 뿐이었어. 그러다보니 녀석이 반지에 뭔 짓을 하던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뼈 밖에 남지 않은 손가락에 반지를 끼운 하룬겔은 생각이 많아보였다.
세월의 흐름을 깨달은 걸까.
아니면 현재 처해진 본인의 상황을 비관하는 걸까.
“그 집회라는 것을 차지하려면 반지 10개를 전부 모아야한다고 들었다.”
그때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막시민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굳이 반지를 모을 필요가 있나. 힘으로 찍어 누르면 상관없는 것을.”
“왕관이 없는 자가 힘으로 사람들을 굴복시킨다고 왕이 되는 건 아닙니다.”
명분은 중요했다.
개인으로서 다수를 이길 수 있지 않는 이상 명분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저희는 세력이 필요한 거지 집회라는 이름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요.”
“늦을 거다.”
막시민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면 제국이 널 공격할 때쯤에는 아무것도 못하고 당할 거다.”
제국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만큼 막시민의 적대감은 상당했다.
실제로 맞서 싸워본 경험도 있으니 저 충고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겠지.
“명분이라면 이미 있잖냐.”
살렘이 끼어들었다.
“일단 제스터부터 족치는 거야. 선제공격을 했으니 명분은 너한테 있다. 그 과정에서 추가로 반지를 얻으면 좋지만 그건 부수적인 걸로 따지자고.”
사악한 미소를 지은 살렘은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기대가 된다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스터의 세력만 흡수한다면 절반 이상은 먹은 거나 다름없다. 에이카랑 페이드? 우리 힘이면 나머지 둘은 각개격파로 충분해.”
“도와주실 생각이십니까?”
“뭐야. 난 외부인이라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귀찮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사실은 외부인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면 안 되겠지.
살렘은 집회 소속도 아니었고 방랑자라는 이명이 있는 만큼 잠깐 있다가 가는 식객처럼 생각했었다.
“한 번 물갈이를 해줄 때가 되긴 했어. 제스터도 그렇고, 에이카도 그렇고 너무 오랫동안 집회를 주무르고 있었지.”
살렘의 나이를 3바퀴 이상 돌릴 정도로 집회의 위에서 군림했던 흑마법사들이니 고인 물이 맞긴 했다.
하지만 그런 이들을 가볍게 갈아치울 수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살렘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슬슬 움직일 때가 되긴 했구나. 허허.”
모른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는 최강의 네크로맨서로 활약했던 하룬겔에게 관심이 쏠렸었지만 중요한 이야기가 나오자 곧바로 의견을 표출했다.
“막시민, 도와주실 수 있습니까?”
“내가 먼저 꺼낸 이야기다. 도와주지 않을 생각이었으면 말도 안했어.”
무뚝뚝하게 말하는 막시민이 믿음직스럽군.
“전 이곳에서 에이미를 지키고 있을게요.”
이자벨은 불참을 선언했지만 오히려 좋았다.
집회나 제국과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아무래도 내 가장 취약한 약점은 에이미일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보다 이자벨이 더 든든하지.’
애초에 파티 플레이 권장이기도 하지만 게임의 특성상 시간이 지날수록 초인조차 혼자서 잡을 수 없는 적들이 나타나는데 그런 게임 안에서도 뱀파이어는 후반 컨텐츠였다.
그리고 이자벨은 뱀파이어 중에서도 무려 직계.
실제로 이자벨의 능력이나 실력을 온전히 확인한 적은 없지만 그동안 겪은 경험에 의하면 직계 뱀파이어의 힘은 화신체에 버금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계획을 세우죠.”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어영부영 넘어갈 필요는 없겠지.
“1차 목표는 이번 달 안에 제스터의 세력을 흡수하는 겁니다.”
집회를 잡아먹을 시간이다.
< 318화. 아드리아스의 전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