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7화. 초월하지 못한 자들 >
도산지옥부터 다음 지옥까지의 길은 어렵지 않았다.
그저 언덕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쭉 내려가면 끝.
길을 따라 내려가자 마치 수묵화를 그대로 옮긴 듯 무채색으로만 이루어진 주변 풍경은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우우우우······.
-끄익! 끄이이익!
그 서늘한 느낌은 원혼들의 울음소리와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소리로 더욱 강해졌다.
또롱-
그렇게 기묘한 언덕 산길을 따라 내려가던 중 저 앞에서 알 수 없는 방울 소리가 울렸다.
조금 더 지나자 저 아래에서 호롱불을 들고 선 삐쩍 마른 달걀귀신이 보였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님 맞으십니까?”
입도 없는데 말을 하네.
“예, 맞습니다.”
“저는 지옥의 길을 안내하는 생불(生佛)이라고 합니다.”
이름을 들어봤자 지옥에 대해 자세히 아는 건 아니라 생불의 정확한 정체는 몰랐다.
생불은 이목구비가 없이 그저 갓을 쓴 모양새였는데 호롱불을 한 차례 흔들더니 안쪽을 가리켰다.
“따라오시죠.”
굳이 길이 있는데 안내까지 받아야하나 싶었지만 없는 것보단 나았다.
나는 말없이 생불의 뒤를 쫓으며 그의 외형을 살폈다.
“죽지 않은 분이 이곳까지 오는 일이 흔한 일은 아니지만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은 대부분 인연을 따라 들어왔다고 하죠.”
뜬금없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생불을 조용히 바라봤다.
“제가 알기로 아드리아스 크롬웰 님께서는 천수관음께서 보내신 걸로 압니다, 맞습니까?”
“애매하군요.”
관세음보살 때문에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애매했다.
아마 보살의 성물로 보이는 상자 때문에 오게 된 것 같은데 그게 보살이 보낸 거랑은 사실관계가 다르지.
“복잡하게 생각하실 것 없습니다. 천수관음께서 얽히셨다는 건 곧 그 분이 보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니까요.”
“예.”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곳, 시왕지옥은 10가지의 주제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웬만하면 일곱 번째 지옥에서 육도윤회를 하게 되죠.”
육도윤회가 뭔지는 몰랐지만 일단 그의 말을 끊었다.
“저는 10가지의 시험을 치러야한다고 들었습니다.”
“다른 분들이 같이 들어오셨겠죠? 그리고 아드리아스 님께서는 홀로 감당하시는 걸 선택했겠지요.”
“아니, 처음부터 10가지 시험이라고 했습니다.”
“아드리아스 님. 보살들이라고 거짓말을 안 하는 건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보살의 이미지랑은 다른데.
생불의 말이 진짜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천수관음께서는 지고한 공덕을 쌓으신 분이니 아드리아스 님에게 거짓말을 한 것만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으셨을 겁니다.”
“타격? 제게 거짓말을 한 걸로 피해를 입었다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굳이 그렇게까지 했을까?
솔직히 7가지의 시험이라고 했어도 나는 다른 일행들을 대신해서 혼자 짊어질 생각이었다.
루나나 비비안이 이런 끔찍한 시험들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진저리가 쳐지거든.
“솔직히 말하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앞서 말했듯 천수관음께서는 지고한 공덕을 쌓으신 분. 그만큼 우리가 모르는 세상의 비밀을 많이 알고 계시죠. 아마 그리 행동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관세음보살은 이 모든 게 인연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그의 그러한 행동도 그 인연에 맞추기 위한 틀이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되었다.
솔직히 내가 초월자의 의중을 어떻게 헤아리겠나.
그냥 그러려니 하는 게 심상에 이로웠다.
“다음 지옥은 화탕지옥(火湯地獄)입니다. 몸을 뜨뜻하게 지지기 좋은 곳이죠.”
순간 표정이 굳었다.
설마 지금 저걸 농담이라고 한 건가?
얼굴이 없어서 표정은 읽을 수 없었지만 텐션이 높아 보이는 제스쳐를 통해 그가 정말로 농담을 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본인이 치르는 시험이 아니라고 막말을 하는군.
도산지옥에서 겪었던 고통은 진화 실패로 겪었던 패널티와 맞먹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이 다른 지옥이라고 더 약하거나 하지는 않겠지.
“아마 아드리아스 님이시라면 금방 통과하실 겁니다. 사실 난이도로 따지자면 도산지옥보다 쉽거든요.”
“그렇습니까.”
“최단 통과 기록을 갈아치우신 분인 만큼 아드리아스 님에 대한 저희들의 관심도 큽니다.”
벌써 정보가 퍼진 건가.
내가 모르는 소식통이 존재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점차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원혼들로 이루어진 산맥과 숲이 사라지고 매캐한 유황 냄새와 높아지는 주변 온도가 느껴졌다.
“다 왔군요.”
호롱불을 치켜든 생불이 말했다.
“화탕지옥입니다.”
부글부글--
도산지옥과는 전혀 다른 광경.
이전이 수묵화와 같은 느낌이었다면 이곳은 지옥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어울리는 장소였다.
뜨거운 열기와 붉은 대지, 그리고 사방에서 끓어오르는 알 수 없는 액체들까지.
그리고 저 멀리에는 달랑 의자 하나와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저 분이 이곳의 대왕이신 초강 님이십니다.”
초강이라 불린 인물은 여인이었다.
물방울 모양의 문신이 한 쪽 눈가에 그려진 그 여인은 이 들끓는 대지와 상반된 파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생불과 함께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서자 초강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이곳에서 치를 시험이 없다. 지나가라.”
“초강대왕님?”
초강의 갑작스런 말에 오히려 생불이 당황한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생불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고 다시 말했다.
“지나가라.”
“감사합니다.”
나야 땡큐지.
딱 봐도 뜨거운 것과 연관된 시험일 것 같았는데 그냥 보내주겠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하지만 생불은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초강의 이름을 불렀다.
“초강대왕님, 이렇게 넘어가면 다른 대왕들께서······.”
“그에게 내 시험은 필요 없다.”
초강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가 이곳에 온 이유는 죄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다. 말 그대로 시험을 지르기 위해서지. 하지만 그에게 내 시험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죄? 도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초강의 말은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있었다.
일단 내가 지옥에 떨어진 이유가 죄를 묻는 것이 아닌 순수하게 시험을 치르기 위함이라는 것.
그리고 시험을 치르는 기준이 내게 도움이 되는가를 따지고 있는 것.
‘진광은 아무 생각 없는 눈치였는데······.’
차가운 인상의 초강은 마치 뭔가를 알고 있는 듯했다.
“다음 지옥은 한빙지옥(寒氷地獄). 송제가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가기 전에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내 물음에 초강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인형과 같았다.
정작 진짜 인형인 이모탈보다 더 인형 같네.
“조금 전에 말씀하신 내용에 따르면 제가 지옥에서 시험을 치르고 있는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게 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나도 모른다.”
초강은 단번에 잘라 말했다.
그러나 대답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하지만 짐작이 가는 건 있지.”
“그 짐작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지옥은 죽은 자들을 심판하는 곳. 죗값을 치르며 겪게 되는 시험들은 전부 고통과 인내에 관한 시험들이지.”
관세음보살 때부터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들은 혓바닥이 길었다.
뭘 그리 빙빙 돌리면서 말하는 거냐.
그렇다고 초를 칠 수는 없었기에 묵묵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인내와 고통은 인간이 성장하는 데 발판이 되는 요소지. 하지만 이미 죽은 자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야. 그들은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는 이들이니까.”
초강이 손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하지만 살아있는 자들은 다르지. 종종 이곳에 그대와 같이 살아있는 자들이 들어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들이 속세로 돌아갔을 때는 전혀 다른 인물이 되어 복귀했어.”
“성장을 위함이라는 뜻입니까?”
“그것보다 조금 더 근본적이다.”
“근본적?”
초강은 나를 가리켰던 손을 돌려 본인을 가리켰다.
“시왕지옥에 존재하는 대왕들 중 단 둘을 제외하면 모두 속세의 인간들이었다. 나를 비롯한 여덟의 대왕들은 그런 인간에서 신이 되다 만 것들이지.”
초월자가 되지 못한 존재들.
꼭 원죄를 말하는 것 같군.
녀석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초월자가 되지 못한 모양이었으니까.
“근본이라는 것은 그러한 의미다. 신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종의 한계를 초월할 수 있느냐 없느냐.”
“지옥의 시험이 신이 될 수 있느냐를 판가름한다는 소리입니까.”
“비슷하다. 하지만 극히 일부만 판가름할 수 있지. 고로 이곳의 시험을 전부 통과한다고 해도 신이 될 수 있는지를 정확히 판별할 수는 없어.”
초강이 덤덤하게, 그러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확인할 수는 있겠지.”
“지옥의 시험조차 통과하지 못한 자는 신이 될 수 없다는 의미겠군요.”
“그래.”
근데 생각해보면 너무 갑작스러웠다.
나는 신이나 초월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어째서 이 시험을 치르고 있는 걸까.
‘관세음보살.’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지옥으로 끌고 온 것인가.
“궁금증은 풀렸나.”
“예, 덕분에 조금 풀렸습니다. 제가 왜 여기 있는지 여전히 모르겠지만요.”
“그건 나도 모른다. 그러나······.”
초강이 시선을 돌려 다음 지옥이 있는 길을 바라봤다.
“염라나 오도전륜대왕은 그 이유를 알 수도 있겠지. 그들이 내가 앞서 말했던 인간이 아니었던 자들이다. 특히 염라는 우리와 격이 다르지.”
그녀가 나직이 말했다.
“그는 전대 염라를 잡아먹은 진짜 신이다.”
염라.
염라대왕을 말하는 건가.
뭔가 진광이나 초강은 본인들의 이름인 것 같은 느낌이지만 염라는 직위명 같이 들렸다.
그 자리에 선 자가 곧 염라대왕, 실제로 전대 염라가 있었던 모양이니 직위가 맞을 거다.
‘진광이나 초강도 사실 직위인가.’
별로 중요한 생각은 아니었다.
초강은 그런 나를 보며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계속 말했다.
“어차피 시험을 치르다보면 그들을 만나게 될 거다. 가서 직접 물어봐라.”
“알겠습니다. 말씀 감사합니다.”
대화는 그게 끝이었다.
초강은 이내 눈을 감아버렸고 마치 잠에 빠진 듯 숨을 골랐다.
“가실까요?”
그동안 옆에서 듣고만 있던 생불이 속삭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마지막으로 화탕지옥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자고 있는 듯한 초강을 바라봤다.
초월자가 되지 못한 인간.
그녀가 어쩌다 화탕지옥을 지키는 대왕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원죄를 떠올리자 기분이 묘해졌다.
‘원죄, 자냐?’
말을 걸어봤지만 원죄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이 원할 때를 제외하면 말이 없었다.
원죄가 초월자가 되지 못한 무언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녀석이 과연 인간이었을까?
‘모르는 게 많아.’
파고 들수록 이 세계는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였다.
애초에 초월자들의 세계관으로 들어가면 내가 존재하는 세계만의 이야기가 아니었기에 더욱 복잡해졌다.
“다음은 들으셨다시피 한빙지옥입니다. 아주, 아주 추운 곳이죠.”
초강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만큼 오자 생불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
“그리고 그곳의 송제대왕께서는 조금 까다로운 분이십니다.”
“그렇습니까.”
“예예. 얼마나 까다로운지 한빙지옥을 지나간 제일 마지막 영혼이 258년 전입니다. 물론 재판을 받고 죄가 없었다면 그냥 지나갔겠지만 그러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고통 받고 있죠.”
258년?
조금 불안해지는데······.
생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가만히 있기도 힘들 정도로 뜨거웠던 화탕지옥과는 정반대의 온도.
쩌저적!
몸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이거, 이거. 이제 보니까 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겠군요.”
생불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다.
그보다 이 추위는 어떻게 할 수가 없군.
곧이어 눈앞으로 거대한 협곡들과 얼음, 눈발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빙지옥이 다가오고 있었다.
< 297화. 초월하지 못한 자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