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8화. 황제 >
논공행상이 시작되었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황궁의 홀에 모여들어 본인들의 좌석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클로슈 전하께서 이번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지?”
“아무래도 전쟁 초반부터 휘젓고 다니셨으니까. 적의 오러 마스터를 하나 잡았다니 비교할 만한 공이 없지.”
“들어보니 숨은 공신들이 꽤 있다고 하더군요. 호명이 늦는 순서대로 공이 큰 분들이니 일단은 지켜봅시다.”
황궁에 모인 이들 중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북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귀족들이 그러했는데 그들 중에서도 대부분은 남서쪽 방향의 갑자기 생겨난 왕국 연합으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좋은 날이군.”
전쟁에 나서지 않은 중앙 귀족 중 하나인 카자프 공작이 곧 시작될 행사를 기다리며 가장 전망이 좋은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는 이미 황제와의 논의를 통해 공을 세운 이들에게 줄 보상들을 직접 책정한 터라 마음 편히 행사에 참가할 수 있었다.
“카자프 전하.”
그러나 그런 그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무슨 일이냐. 이곳에는 함부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다름이 아니라, 미카엘라 황녀가 조금 전에 움직였습니다.”
“뭐라? 누구한테?”
“그것이······.”
잠시 뜸을 들인 부하는 이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끔 조심하며 카자프에게 말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입니다.”
“흥. 웃기지도 않는군. 고작해야 그런 애송이한테 붙었다고?”
“하지만 우습게 볼 일이 아닙니다. 이미 크롬웰에 모하임과 알븐이 지원해준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 아무래도 황녀가 소문을 듣고 잘못된 선택을 한 모양이군.”
친황제파 내부에서도 파벌이 존재했다.
그 이유는 황제가 거부한 후계문제 때문이었다.
황태자로 내정된 이가 없으니 황궁 내부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여러 명의 황족들에 의해 갈라진 상황.
그 중에서도 정통적인 1황자, 에드먼드 4세를 지지하는 헥토르 카자프는 공주의 행동이 귀엽게만 보일 뿐이었다.
“나머지는?”
“아직 확실한 움직임을 보인 쪽은 없습니다.”
“알겠다. 이만 가봐라.”
정보국의 부하가 재빨리 뒤로 사라졌다.
이내 나팔수의 팡파르가 울리며 황제의 입장을 알려왔다.
“더 이상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야, 아드리아스 크롬웰.”
헥토르의 스산한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곧이어 황제의 등장과 함께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모두 일어나 다시 착석하시오.”
황제는 왕좌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오늘은 짐이 피곤한 관계로 진행을 빨리하겠소. 시작하시오.”
뿌우---!
나팔이 울리고 황제의 옆에 시립한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북부 전장에서 활약한 파크라엘의 용감한 기사! 베네딕트 경은 들어오시오!”
이내 차례대로 호명이 되며 입장한 인물들은 황제를 대신한 시종이 무훈과 전공을 읊고 약소한 훈장과 보상을 건넸다.
홀에 모인 귀족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 누구 하나 직접 수여하지 않고 그저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는 황제는 굉장히 따분해보였다.
“몇 명 남았느냐.”
“열다섯 명이 남았습니다.”
“직접 와서 수여받을 정도의 전공을 세운 자가 이리 많을 줄은 몰랐군.”
싸늘한 황제의 말에 홀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황제는 의자에 턱을 괴며 말했다.
“마지막 다섯 명을 제외하고 한 번에 호명해라.”
“아, 알겠습니다.”
황제의 파격적인 진행에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하지만 이내 황제가 허리춤에 맨 검으로 바닥을 찍자 금세 조용해졌다.
“불만이오?”
그의 날카로운 물음이 좌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귀족들은 차마 아무도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 숙였다.
“내가 보상을 안 해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소란들이오. 짐의 처사가 불만이면 더 큰 전공을 세워서 마지막 다섯 명에 들었으면 된 것 아니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헥토르가 목청껏 외쳤다.
그러자 다른 귀족들도 눈치를 살피며 너도 나도 따라 외쳤다.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폐하.”
“그래, 그래. 이해해줄 줄 알았소. 그럼 다시 재개하게.”
황제의 명에 따라 시종은 열 명의 인원을 한 번에 불렀다.
그리고 그 열 명은 순식간에 훈장을 받고 퇴장했다.
“이제 좀 봐줄만한 이들만 남았군. 한 명씩 호명해라.”
“북부 최후의 요새! 통곡의 협곡을 탈환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운 체스먼 아르디 후작은 입장하라!”
시종의 말이 울리자 귀족들 틈에서 탄성이 나왔다.
누가 얼마만큼의 전공을 세웠는가는 각자 판단이 달랐기에 그 순위도 황제의 마음이었는데 아르디 후작이 전공 5위를 차지한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었다.
“다섯 걸음 앞으로.”
“영광이옵니다, 폐하.”
황제가 직접 말했다.
그리고는 시종에게 종이를 건네받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명에 따라 남은 북부 잔당들을 깔끔히 소탕하고 요새까지 수복했지. 아주 큰일을 했네.”
“아닙니다. 전 그저 폐하의 명을 이행했을 뿐이니 모든 공은 폐하의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게 사실 맞지.”
황제의 오만한 발언에 좌중이 다시 얼어붙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를 전혀 개의치 않은 황제는 전공이 적힌 종이를 다시 시종에게 건네며 말했다.
“어쨌든 수고했네. 상으로 2급 훈장과 150억 윌, 그리고 황가의 보석을 하나 하사하지.”
“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갑자기 껑충 뛴 보상에 다시 한 번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 황제가 손을 저었다.
“상을 챙기는 건 밖에서 챙기게. 다음 사람을 호명해야 하니 어서 퇴장하게.”
“알겠사옵니다.”
그 다음으로 입장한 인물은 바하트 알븐이었다.
그도 의례적인 안부와 인사말을 한 뒤에 형식적인 말만 오가며 끝났다.
공작치고는 너무도 빠른 진행에 함께 있던 사람들은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고 있었다.
“전공 3위는 보르기옌을 수호한 매그너 경인가. 들어와라.”
전쟁 기간 동안 보르기옌을 지켜낸 보르기옌 가문의 기사단장이 들어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히크샴 보르기옌은 이 자리에 참석하여 관람을 하고 있는 처지였다.
“그대가 매그너 베르팔토인가.”
“폐하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영지를 버리고 도망간 돼지 새끼를 대신해서 자네가 수고를 좀 했다지?”
갑작스런 황제의 말에 매그너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귀족들도 순간 히크샴을 곁눈질했고, 히크샴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어진 얼굴로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기사로서의 소임을 다했을 뿐입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은 저기 앉은 돼지 새끼는 제 소임을 다하지 않은 거로구만?”
“그······보르기옌 백작은 황궁에 지원을 요청하러 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르기옌을 돕기 위해······.”
“짐을 우롱하는 겐가?”
매그너는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저, 전혀 그렇지 않사옵니다.”
“그럼 왜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을 하지? 히크샴, 저 돼지 새끼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온 제국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난 눈 뜬 장님이다, 이건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부디 절 죽여주십옵소서!”
“그래, 죽여주마.”
쇙-!
순식간에 검집에서 뽑힌 검이 휘둘러졌다.
파격의 연속이 진행되어 미처 사고가 따라가지 못한 관중들은 기겁하며 그 광경을 굳은 채 바라만 보았다.
털썩.
푸화악------!
누군가의 수급이 떨어지고 피분수가 천장으로 솟구쳤다.
“꺄악!”
“아아······.”
귀족들 틈에 앉아있던 히크샴의 머리가 사라진 채 피를 뿜고 있었다.
“어떤가?”
“하아, 하아······.”
갑작스런 사태에 몸을 떤 매그너가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폐, 폐하의 깊은 뜻을 소인이 몰랐습니다.”
“그렇겠지. 몰랐어도 괜찮네. 그것보다 보르기옌을 담당하던 귀족이 죽었으니 앞으로는 자네가 보르기옌을 책임지게.”
“······그 말씀은······?”
“이제 자네는 백작일세. 이제 볼일 없으니 나가서 귀족증명서를 만들고 수속 절차나 밟게.”
“화,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아, 참. 그리고 저 돼지 새끼의 자식들은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저런 오물이 세상에 흔적을 남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히크샴의 가문을 멸하라는 간접적인 명령에 매그너는 물론이고 귀족들마저 입을 틀어막았다.
“뭐하나? 빨리 나가지 않고?”
“며, 명을 받들겠습니다.”
“여봐라. 저 오물을 좀 치워라. 보기 흉하구나.”
본인이 죽여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황제를 모두가 겁에 질린 채 바라봤다.
황제의 성격이 변했다는 말은 이미 꽤 왈가왈부되었던 이야기였지만, 이 자리에서 귀족들은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황제는 정말로 변했다.
아니면 지금까지 그 본성을 숨기고 살아왔거나.
“소란을 일으켰군. 나갈 사람은 나가게. 짐에게 미움 받을 용기가 있다면.”
미소 지으며 말하는 황제의 말에 감히 그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황제의 오른팔이자 재상인 헥토르 카자프조차 조금 전에 일어난 일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없나? 그럼 계속 진행하지.”
덜덜 떠는 시종이 종이를 건넸다.
황제는 그런 시종을 보며 미간을 좁히며 종이를 받아들었다.
“나가고 싶은가?”
“아, 아닙니다! 폐하!”
“그럼 좀 가만히 있게. 왜 그리 떠는 게야.”
이내 종이를 확인한 황제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흐음······.”
“혹시 뭔가 문제가 있습니까?”
“전공 순위를 바꾸지.”
또 다시 나온 황제의 변덕에 일순 모두가 긴장했다.
황제는 자신과 함께 전공 순위와 보상을 매긴 헥토르를 향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싱클레어 클로슈 공작! 먼저 나오게!”
“예! 폐하!”
호탕한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부리부리한 눈과 사자 갈기처럼 뻗친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남자.
그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이 황제에게 다가섰다.
“흐흐. 그만 다가오게. 그대는 너무 위압적일세.”
“하하! 황송합니다, 폐하!”
“그래. 자네도 알게 됐다시피 전공 1순위에서 밀렸어.”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몸이나 좀 풀려고 북부 일대를 돈 김에 얻은 전공이라 크게 와 닿지도 않군요.”
“역시 무안공이군.”
황제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에게는 따로 술자리를 권하지. 이 정도 보상이면 되겠나?”
“충분하다 못해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폐하!”
“그래. 이만 가보게.”
전공 2위의 시간은 그게 끝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헥토르는 이마를 짚으며 지끈지끈한 두통과 싸웠다.
분명 싱클레어를 전공 1위로 넣었으나 가뿐히 그 의사를 무시한 황제의 처사를 보니 재상인 자신의 의견 따위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드디어 마지막 차례군. 여기 모인 그대들에게 묻지. 이번 야만족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전공을 세운 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
홀은 적막에 싸였다.
잠시 대답을 기다리려는 듯 황제가 조용히 지켜보았지만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건가? 그렇다면 짐이 재상에게 물어보지. 재상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마치 엿이라도 먹이려는 듯 대놓고 묻는 황제의 말에 헥토르는 이마에 난 땀을 닦았다.
이미 자신과 상의까지 해놓고 마음대로 결과를 바꿔놓은 상태로 일부러 묻는 것을 보면 그 의미는 하나였다.
짐의 결정에 불만인가?
“아드리아스 크롬웰 백작이 타당하군요.”
“그래! 아드리아스 크롬웰! 듣고 있으면 어서 들어오거라!”
황제의 외침에 홀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누군가의 걸어오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오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검은 정장으로 드러난 날렵한 근육질 몸매, 묶어 올린 검녹색의 머리카락.
그리고 감정 하나 보이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
“신, 아드리아스 크롬웰.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습니다.”
다른 이들이 황제의 앞이라 떨었던 것과는 다르게 완벽한 예법이 흘러나왔다.
그저 인사만 할뿐인 그 장면이 자리에 있던 귀족들에게 강렬한 인상이 되고······.
“그래, 크롬웰 공. 미카엘라와는 잘 만났느냐?”
황제가 입가에만 미소를 지은 채 뚫어지는 눈빛으로 아드리아스를 바라봤다.
< 228화. 황제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