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선물
“후겐 장로님! 저 인간 놈이 저를 죽이려 했습니다!”
타이밍도 하필…….
나는 곧바로 고자질을 하기 시작하는 세이르를 보며 혀를 찼다.
“인간. 설명이 필요하군. 대답에 따라 처분을 생각하지.”
후겐이 특유의 쌍검을 뽑아 든 상태에서 말했다.
내가 아무리 강해졌다고 해도 엘프 최강의 검사라 불리는 후겐에게는 밀리겠지.
“세계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뿌리에 자신을 괴롭히는 무언가가 있다고 하더군요.”
나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세계수의 목소리?”
“거짓말! 저건 거짓말입니다, 장로님!”
후겐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미 증거까지 있는 마당에 두려울 건 전혀 없었다.
“저 뒤에 살덩이가 보이십니까?”
“음?”
그제야 시선을 돌린 후겐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저게 무엇이지?”
“기생충입니다. 저것 때문에 세계수가 병들고 있었죠.”
“장로님! 속지 마십시오! 저 괴물은 제가 먼저 발견했습니다. 우연찮게 인간이 제 뒤를 따라 도착했기에 설명을 해 줬더니 마치 자신이 행한 것처럼 속이고 있는 겁니다!”
세이르가 발악하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마피아 게임도 아니고 뭐 하자는 거냐.
“저 괴물은 그렇다 치고 왜 둘이 싸운 거지?”
“제가 괴물을 처리하자 저 인간이 비겁하게 기습을 했습니다! 괴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려고요!”
저 새끼가?
후겐의 눈초리가 더욱 짙은 의심을 보내왔다.
“장로님. 전 비록 인간이지만 신탁을 받았고 누구보다 먼저 뿌리로 향해야 한다고 말한 장본인입니다. 이미 그때도 세계수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믿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하지 않았을 뿐, 저는 정말 세계수를 지키려 했습니다. 오히려 배신자는 거기 있는 바람 기사단장이죠.”
“바람의 두 번째 별이 배신자?”
“저 간악한 인간의 말에 속으시면 안 됩니다! 제가 무슨 이유로 엘프들을 배신합니까!”
후겐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아무래도 고민이 심한 것 같은데 그 고민을 덜어 주기로 했다.
“장로님. 지금 세이르의 품속을 검사해 보십시오. 아마 배신자라는 증거가 나올 겁니다.”
내 말에 세이르의 안색이 굳었다.
하지만 후겐이 보지 못하게끔 금세 표정을 바꾸고는 고개를 저었다.
“흥! 허튼수작! 증거는 무슨 증거란 말이냐! 역시 인간 놈들은 간악하고 사악하기 짝이 없군.”
그리고는 당당하게 두 팔을 벌렸다.
“그럼 네가 한번 뒤져 봐라. 네가 말하는 증거가 뭔지 나도 궁금하구나.”
“장로님, 괜찮겠습니까?”
일단은 후겐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은 없었다.
“만약 아무 증거도 나오지 않으면 넌 죽을 거다.”
“글쎄.”
모든 일이 네 뜻대로 흘러가는 건 아니란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는 척하며 그대로 발도했다.
마치 빛이 뿜어지듯 순식간에 검집에서 튀어나온 갈락슈르가 후겐조차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쏟아졌다.
스윽!
베이는 소음조차 없이 조용히.
무려 오러 마스터인 세이르가 저항조차 못 하고 목이 떨어졌다.
챙!
“무슨 짓이지?”
뒤늦게 달려온 후겐의 검을 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여전히 후겐의 검을 경계했다.
“녀석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알 수 없으니 그냥 죽였습니다. 방심한 상대의 잘못이죠.”
“그게 변명이 된다고 생각하나?”
후겐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리고 굉장한 마나의 기운이 후겐의 주변으로 휘몰아쳤다.
오러 비기인가.
“세이르 모라 제 프라실리아. 그는 확실한 배신자입니다. 애초에 바람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대수림을 순찰해야 하는 그가 굳이 세계수에 따라왔다는 것이 수상하지 않습니까?”
“더 이상 너와 할 말은 없다.”
“다크 엘프들이 라스틸리아를 노리고 있습니다. 다크 엘프뿐만이 아닙니다. 일부 뱀파이어 파벌들과 몇몇 드워프족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죠.”
“……씬을 말하는 건가.”
“알고 계셨군요.”
그러나 후겐은 여전히 검을 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굳게 다문 그의 입술에서 숨길 수 없는 고집이 엿보였다.
“미안하지만 세이르를 죽인 너를 그대로 보낼 수는 없다. 이건 우리 종족의 문제…….”
“참자 참자 하니까…….”
4년 동안 개고생을 한 탓일까.
“이 개 같은 게 욕 나오게 하네. 이 씨발 새끼야, 나라고 너희들이 좋아서 도와주냐? 나도 나 좋아지려고 세계수를 돕는 거야.”
그동안 참았지만 그간의 고통이 떠올라서 폭발하고 말았다.
덕분에 강해질 수는 있었지만 그건 온전히 내 노력.
지금까지 도움은커녕 계속해서 걸림돌이 되는 엘프들은 내 쪽에서도 사양이다.
지금만 해도 봐라.
아직 폭식의 새끼들은 남아 있었다.
녀석들을 다 처리하지도 못했는데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물론 상황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당연한 거지만…….’
열 받는 건 열 받는 거다.
내가 갑자기 들이받자 후겐은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나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여전히 검을 내려놓을 생각은 없는지 그의 오러 비기는 발현되고 있었다.
스스슥.
나뭇잎과 같은 모양의 초록빛 오러가 후겐을 감싸며 마치 갑옷을 입은 모양으로 변했다.
그와 함께 그의 쌍검도 화려한 외형으로 모습을 바꿨다.
후겐의 오러 비기, 물아일체(物我一體)였다.
‘쫄 필요 없다. 선빵 필승.’
후겐은 세이르보다 훨씬 윗줄의 오러 마스터.
단순하게 맞붙으면 5분도 못 버틸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세이르를 보았듯이 결국 오러 마스터도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
‘김진환이었을 때도 느꼈지.’
악명 높은 명성을 지녔던 외국의 용병도 운 나쁘게 맞은 한 발의 총알로 명을 달리했다.
근육질의 거한이 내게 아무것도 못 하고 칼질 한 번에 목숨을 잃기도 했지.
‘아무리 강해 보이는 상대여도 결국 죽는 건 다 똑같다.’
사람이란 건 의외로 죽기 쉬운 생물이었다.
물론 오러 마스터가 초인이라 불린다고는 하지만 과연 초근거리에서 쏘아지는 크리브마허의 드래곤 브레스도 버틸 수 있을까.
나는 곧바로 소환을 준비했다.
꿀렁.
그러나 미처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세계수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음?”
우드드득!
쿠르르르릉!
뿌리가 거칠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채찍처럼 휘둘러진 뿌리가 후겐에게 다가가자 그는 다급히 몸을 피했다.
세계수를 다치게 할 수 없다는 그의 심정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왜 이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시간을 벌었다.
후겐이 나를 믿기 싫어한다면 믿게 만들 수밖에 없겠지.
우선은 세이르의 시신을 챙겼다.
그의 품속에 그가 배신자라는 증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파바박!
쿠구구구궁―――!
그런데 세계수의 상태가 생각보다 거칠었다.
요동치는 공간이 점점 붕괴될 듯 아슬아슬했다.
마치 처음 들어왔을 때처럼 공간이 분리되기 시작했다.
휘리릭!
그사이 작은 뿌리줄기가 내게 다가왔다.
“뭐야.”
처음에 세계수로 진입했을 때와 같은 불순한 의도는 없어 보였다.
그 작은 뿌리는 내 손을 휘감더니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폭식인가.”
뿌리가 데리고 간 곳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폭식의 새끼들이 요동치는 뿌리를 꽉 붙잡은 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근데 후겐도 있었을 텐데 굳이 나를 데리고 온 이유가 뭐냐?
“일단 어울려 주지.”
세계수의 타락은 엘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별개로 해결해야 할 문제였으니까.
쿠구구구――!
공간이 뒤틀리며 후겐의 모습도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되었다.
아무래도 세계수가 나를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서걱!
―그어어억!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폭식의 새끼들이 죽어 갔다.
녀석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했는데 세계수가 요동치는 것도 한몫했다.
마치 내가 베기 쉽게 만들어 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근데 총 몇 마리지?’
어깨에 둘러멘 세이르가 살아 있었다면 물어봤을 텐데 아쉽네.
푹!
푸슈욱!
한 열 마리쯤 잡았을까.
워낙 세계수가 컸기에 10마리를 잡는 데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후겐은 완전히 다른 곳으로 간 건가?’
그리고 그동안 후겐은커녕 엘프 한 명 보이지도 않았다.
스륵.
세계수의 잔뿌리가 내게 다가왔다.
잔뿌리는 나를 폭식의 새끼들에게 안내했을 때와 같이 내 팔을 휘감더니 어디론가 끌고 갔다.
그 움직임이 왠지 모르게 상냥했다.
“처음부터 잘했어야지. 가둘 때는 언제고 말이야.”
세계수의 이끌림에 따라 걸어가자 나는 어느새 세계수의 중심 부분으로 걷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는 곳마다 세계수의 몸통이 갈라지며 길을 만들어 주었다.
도착한 곳은 동그란 공간이었다.
내가 갇혔던 곳과 비슷했지만 중앙을 장식하는 무언가가 달랐다.
‘엄청난 마나.’
나무에 휘감긴 거대한 보석 같은 물건인데 느껴지는 마나도 그렇고 생김새도 그렇고 어디선가 많이 본 듯했다.
설마 핵…… 같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중요한 장소에 나를 데리고 왔을 리가…….
―인간.
공간 자체에 울리는 거대한 파동이 느껴졌다.
파동은 마치 목소리처럼 변형되어 내게 들려왔다.
“세계수냐?”
―감사한다. 저는 세계수.
말이 서투네.
“여기에는 왜 데려온 거지? 또 날 가두려고?”
―미안해. 저는 인간이 날 괴롭히는 나쁜 놈.
뭐라 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세계수를 괴롭히는 나쁜 놈이라는 소리인가?
그래서 일단 용건이 뭐야.
―인간. 관찰자. 누구의 것?
“관찰자? 원죄를 말하는 거야?”
원죄야. 세계수가 너 찾는데.
하지만 원죄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처음 갇혔을 때를 제외하고는 깨어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저를 괴롭힌 건 관찰자 부하. 하지만 인간이 도와줬습니다. 감사한다.
핵처럼 보이는 물건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곧이어 나무줄기가 뭔가를 쥔 채 내 머리 위에서 내려왔다.
―선물.
그건 열매처럼 보이는 무언가와 긴 나뭇가지, 그리고 나뭇잎이었다.
“세계수 세트냐.”
게임에서는 장비로 받았었는데 그건 게임이니까 그렇다 치고…….
이 열매는 예상외다.
설마 세계수의 열매인가?
다른 건 다 구했어도 이 열매는 게임에서도 구해 본 적 없는 희귀한 아이템이었다.
일단은 주섬주섬 니켈의 가방에 챙기자 곧이어 메시지도 울렸다.
[‘업적: 세계수를 구한 자’를 달성했습니다.]
벌써 이곳에 들어와 2개의 업적을 달성했다.
그동안 얻었던 게 2개였는데 순식간에 두 배로 늘었네.
‘나중에 돌아가서 결산을 해 봐야겠군.’
그나저나 세계수에게는 물어볼 게 있었다.
초대받은 이후로 계속 궁금했던 것.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말해 주세요. 인간.
“왜 굳이 신탁으로 나를 부른 거지? 엘프들을 불렀으면 됐잖아.”
―신탁. 내 주인이 씁니다. 제가 쓰는 것 아니다.
“신탁은 타피오가 내리는 거고 너는 관련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그렇습니다.
역시 신이라는 놈들의 생각은 전혀 짐작할 수가 없다.
왜 굳이 나를 시킨 거고, 왜 굳이 세계수가 타락하고 있는 걸 지켜본 거지.
‘따지고 보면 세계수가 타락하는 건 우리 입장에서 나쁜 거긴 하지.’
신의 입장에서는 그거나 그거일 수도 있겠다.
어딘가 나사가 빠진 듯한 놈들이었으니.
―밖으로 내보내 줄게.
“야, 하나만 더 부탁하자.”
―말해라.
“엘프들이 지금 오해를 하고 있는데 네가 나서 줄 수 없냐?”
―알겠다.
다행이네.
이걸로 여기서 얻어 낼 수 있는 건 모두 얻어 낸 건가.
―여기 올라타라.
거대한 나무줄기가 내려왔다.
줄기 끄트머리에 올라타자 땅이 흔들리더니 천장이 열렸다.
그리고 내가 앉은 줄기가 그대로 땅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밖이다.
남들에게는 고작 하루나 그보다 조금 더 된 정도겠지만 내게는 무려 4년의 시간이었다.
‘따지고 보면 레테의 던전보다 오래 있었던 것 같은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때는 정말로 시간이 멈춰서 얼마나 흘렀는지 짐작이 가지를 않았으니.
그렇게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밖으로 나오자…….
“인간이 나왔다!”
“저게 뭐지? 어째서 세계수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수많은 엘프들이 세계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