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시스템 상점
죄악(peccata)도 퀘스트가 있었다.
퀘스트 클리어 시 NPC로부터 받는 보상과 시스템이 주는 퀘스트 포인트가 따로 있었다.
특히 메인 에피소드도 퀘스트로 여겨져 에피소드를 클리어할 때마다 대량의 포인트를 주고는 했었다.
이 포인트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시스템 상점이었다.
‘설마 시스템 상점을 보게 될 줄이야.’
게임이 현실이 된 순간부터 어떤 건 게임 속 그대로고 어떤 건 없어져서 당연히 시스템 상점도 없어졌을 거라 생각했다.
특히 퀘스트가 없어진 이상 시스템 상점은 당연히 사라졌을 줄 알았다.
‘퀘스트도 생겼다. 근데 일일 퀘스트는 처음 보네.’
퀘스트도 궁금했지만 일단은 제쳐 두고 상점부터 먼저 확인해 볼까.
[상점]
[능력치] [편의 기능] [뽑기]
[현재 보유한 포인트: 6300pt]
상점을 열자 보이는 항목들이 낯설었다.
낯선 건 둘째 치고 너무나 의외의 것들이었다.
‘게임이랑 다르다.’
게임에서의 시스템 상점에서는 아이템을 팔았다.
저런 무형의 요소들을 팔지는 않았지.
일단 능력치부터 확인해 보았다.
[능력치]
[힘] [민첩] [체력] [마나 감응력]
살 수 있는 건 총 네 가지 항목.
그리고 가격은 능력치 1당 100포인트였다.
능력치 1이 얼마나 큰 건지 알 수가 없었기에 일단 놔두고 나머지를 확인하기로 했다.
‘편의 기능? 뽑기?’
짐작이 가질 않는 두 항목을 보며 일단 편의 기능을 선택해 봤다.
[편의 기능]
[편의 기능 항목은 매주 갱신됩니다.]
[이번 주의 편의 기능: 진화 시간 단축―300pt(1회 구매 가능)]
“오?”
진화 시간을 줄여 준다고?
매주 갱신된다는 걸 보면 그 외에도 다채로운 효과들을 판매하는 모양인데 이 정도면 굉장히 쓸 만했다.
300포인트면 능력치 3개를 올릴 정도의 금액인데 조금 비싼 것 같기도 하고…….
‘일단은 사 보자.’
[이번 주의 편의 기능을 구매하시겠습니까?]
“그래.”
[진화 포인트 300이 차감됩니다.]
[남은 진화 포인트: 6000pt]
된 건가?
바로 진화 창을 열어 확인해 봤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검술(영재)]
[진화 중…….]
[남은 시간: 0시간 05분 00초]
“개좋네.”
13일의 시간이 전부 사라지고 5분만 남았다.
획기적인 시간 단축에 놀라울 정도.
‘편의 기능 구입은 앞으로 자주 써먹겠는데.’
그러나 포인트가 없다면 살 수도 없겠지.
포인트를 벌 방법이 필요했다.
‘일단은 퀘스트로 버는 것 같기는 한데…….’
진화 실패로 인한 페널티 퀘스트는 사양한다.
결국 남은 방법은 조금 전에 떴던 일일 퀘스트.
[일일 퀘스트: 노력으로 한 걸음]
[팔굽혀펴기 0/3,000]
[스쿼트 0/3,000]
[내려 베기 0/1,000]
[클리어 시, 일일 포인트 10 획득]
10포인트인가…….
매일 10포인트라고 생각하면 방금 13일의 시간을 줄이려고 30일 치의 포인트를 쓴 거군.
조금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비싼 게 맞았네.
일일 퀘스트까지 확인했으니 이제 남은 건 상점의 뽑기 항목.
그러나 나는 뽑기를 확인하지 않고 남은 진화 시간을 뚫어지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발…….’
페널티는 괴로웠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문제는 이번에도 실패하면 정말 목숨이 위험하다는 것.
페널티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걸린 시간을 생각하면 남은 식량이 넉넉하지 않았다.
―띠링!
그리고 마침내 길었던 5분이 지나갔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검술이 진화하였습니다.]
[재능 ‘검술(영재)’이 ‘검술(천재)’로 진화하였습니다.]
“됐다! 됐다고!”
냉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참을 수가 없었다.
무려 검술 천재다.
다른 어떤 재능도 아닌 A급 재능인 검술이 천재!
검술 천재 재능을 가진 플레이어블도 오직 벤자민밖에 없었다.
나머지 플레이어블들은 다양한 영재급 재능과 다른 분야의 천재급 재능을 가졌지.
[‘업적: 하늘이 내린 검의 재능’을 달성했습니다.]
뒤이어 들려오는 업적 달성 메시지는 덤이었다.
여기서 겪은 고통과 시련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다.
딱! 따닥!
니켈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래, 고맙다. 다들 고마워.”
이런 오글거리는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은 몰랐네.
하지만 그 정도로 지금의 내 기분은 높이 치솟은 상태였다.
“후우.”
나는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려 노력했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일단은 이곳부터 빠져나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벽에 새겨진 검의 흔적을 연구해야 했다.
“니켈, 다시 해 보자.”
검흔을 살필 시간이었다.
* * *
[일일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일일 포인트 15pt가 적립됩니다.]
“하아.”
물구나무를 선 채 한 손가락만으로 버티는 건 생각보다 어려웠다.
마나를 사용하면 쉽지만 일일 퀘스트는 순수한 육체의 능력만을 인정해 주었다.
“오늘은 15포인트짜리 퀘스트. 이걸로 진화 포인트까지 합쳐서 15,000포인트가 넘었네.”
어느새 검술 재능을 진화시킨 지 2년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난 아직도 탈출하지 못한 상태였다.
나가지 못했다는 것에서 이미 당연한 말이지만 검법을 완벽하게 복원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려 천재의 재능으로도 복원이 힘든 검법.
‘신이 만든 검법이니 당연한 말인가.’
사실 너무 쉽게 봤었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더 쉬워 보였달까?
오히려 천재의 재능이 생기니 이 검법에 담긴 지고한 무리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스승님에게는 미안하지만 무아검과 견주어도 상위의 검법이라고 할까.
아마 게임 내의 등급으로 따지면 SS급의 검법은 될 듯싶었다.
딱!
휘웅!
니켈의 검이 이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이 초월자가 남긴 검법은 나만 익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니켈도 함께 배우고 있었는데, 단조로웠던 니켈의 검이 많이 변했다.
‘엘프의 검술이라 그런지 엄청 세심하면서도 부드럽다.’
검을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나 외모가 어렴풋이 그려지는데 아무래도 이 검법을 만든 초월자는 여자 엘프였던 것 같다.
‘아님 말고.’
그래도 검법의 복원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기에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아니, 오히려 이 기회를 살려 최대한 버틸 수 있을 만큼 이곳에서 버티고 나갈 생각이었다.
지금쯤 바깥의 시간은 고작해야 하루 정도가 지났을 터.
무려 4년의 시간이 하루로 치환되는 기적이었다.
마음대로 나갈 수만 있다면 이만한 수련 장소가 없었다.
“니켈. 이건 이렇게 해 봐.”
휘익?
“아니, 조금 더 구불구불하게.”
휘릭?
“어. 그거인 것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딱!
생각이 바로 전달되니 내가 생각한 움직임을 니켈이 곧바로 구현했다.
사실 검법의 형(形)은 이미 다 파악했다.
문제는 마나의 흐름.
검법에 맞는 마나의 움직임을 찾아야 했는데 그 작업도 얼추 다 마무리되고 있었다.
“다른 곳은 다 됐는데 이 부분만 막힌단 말이지.”
딱딱!
“처음부터 어긋난 건가? 아니면 여기만 어긋난 건가? 뭐라고? 넌 아무 생각이 없다고?”
딱!
여기서 4년이나 지내다 보니 혼잣말이 많아졌다.
가끔 심심할 때는 크리브마허의 주둥이만 소환해서 대화를 나누고는 했는데 녀석은 그런 나를 굉장히 귀찮아했다.
참고로 4년이나 흐른 탓인지 크리브마허의 진화 확률도 거의 100%에 육박해 있었다.
하지만 실패 페널티가 꽤 세다는 걸 이번 기회에 톡톡히 배운 나는 100%를 완전히 채울 생각이었다.
비록 내가 고통스러운 건 아니지만 그 페널티가 어떠한 형태로 나에게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기에 내린 판단이었다.
―크릉.
그때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티무르가 다가오더니 마나를 두르며 기묘한 움직임을 취했다.
뭐 하는 건가 싶어 잠시 지켜보던 나는 점차 이어지는 티무르의 동작에 번개가 스친 듯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저거였어!
티무르의 움직임을 보고 깨달았다.
이 검법은 단순히 검술뿐만이 아니라 체술과 합쳐져 있는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계속 어디 한 군데가 어긋난 거였구나.”
역시 호왕 티무르다.
생각이 없는 니켈과는 달랐다.
딱따닥!
니켈이 항의를 하듯 이를 부딪쳤으나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렇게인가?”
후웅!
콰드드득!
순간 엄청난 기운이 갈락슈르에 집중되더니 살짝 닿은 벽 한쪽이 갈라졌다.
그 위력에 나는 식은땀이 살짝 흘러내렸다.
“미쳤네.”
원죄가 이 검법을 익히면 빠져나갈 수 있다고 했을 때는 그저 그런 기믹인가 보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냥 무식하게 힘으로 뚫고 나간 거였어.
‘이거 근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잘 생각해 보니 이런 위력의 검술을 경험한 기억이…….
“막시민?”
막시민의 검술이 이 정도의 위력이었던 것 같다.
물론 직접 검을 맞대 보지는 않았지만 수라한을 두들겨 팼을 때의 임팩트가 딱 이러했다.
그와 같은 검법은 아니지만 위력 자체는 엇비슷해 보였다.
‘궁금하네.’
문득 지금의 내가 막시민과 붙으면 어떨까 싶었다.
물론 오러 마스터인 막시민을 내가 이길 수는 없겠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했다.
“일단은 나가자.”
더 있으려면 더 있을 수도 있었지만.
역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니 몸이 근질거렸다.
그렇게 4년의 수련 끝에 바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휘이이이익!
기다란 휘파람 소리가 울리고 이내 소리가 난 곳으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빛 장발에 잘생긴 얼굴, 그리고 긴 귀.
바람 기사단 단장인 세이르였다.
벌써 세계수에 들어온 지 꼬박 하루가 지난 상태.
그는 휘파람을 분 인물에게 다가갔다.
“찾았나?”
“흔적이 이 근처에 있는데 마치 땅으로 꺼진 듯 사라졌습니다.”
젊은 엘프이자 세이르와 같은 조직 소속의 반다르가 어느 바닥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세이르는 곧바로 바닥을 살폈다.
“정말이군. 바닥으로 꺼졌어.”
“예? 진짜입니까?”
“그래. 골치 아파졌군.”
정령으로 흔적을 확인한 세이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닥을 뚫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국 아드리아스를 찾기 위해서는 헤매야 했다.
“그럼 그냥 놔둬도 알아서 죽지 않을까요?”
“방심하지 마라. 신탁이 우습나?”
“죄송합니다. 경솔했습니다.”
반다르가 바로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세이르도 더 이상 뭐라 할 생각은 없었기에 정령술을 이용해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우선은 호이르나 후겐이 찾기 전에 먼저 찾아서 죽여야 한다. 죽인 이유야 어떻게든 가져다 붙이면 되는 일이니 속도가 생명이다.”
“세이르 님. 근데 녀석은 포람조차 손쉽게 꺾은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의 소유자입니다. 혹시라도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반다르. 난 대전사다. 대전사가 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날 무시하는 건가?”
“그, 그게 아니라 만약에라도 제가 먼저 발견하게 되는 일을 말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우선 세이르 님을 찾아오는 게 맞지 않나 해서…….”
“그래. 그때는 녀석을 데리고 내게 와라. 네가 해결하려 할 필요는 없지. 대신 후겐과 호이르에게만 걸리지 않게 조심해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내 둘은 다시 아드리아스를 찾기 위해 헤어졌다.
반다르와 반대 방향으로 내달린 세이르는 차갑게 굳은 인상으로 아드리아스에 대해 떠올렸다.
‘포람을 쓰러트렸다고 해도 내 상대는 아니다. 난 무려 대전사. 고작 인간 따위에게 질 리가 없지.’
그러나 그런 그의 뇌리로 환인족 마을에 방문했을 때 마주쳤던 한 사내가 떠올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서야 알게 된 그의 이름은 막시민 크로넬.
그가 앞을 가로막았을 때는 온몸에 소름이 일어날 정도였다.
“제길.”
괜한 기억을 떠올려 자존심이 상한 세이르가 애꿎은 세계수 내부를 두드렸다.
그런 그의 행동에는 세계수에 대한 존중이 단 1도 없었다.
“인간. 반드시 내 손으로 죽인다.”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세이르의 혼잣말이 아스라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