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미믹의 보물 그리고 모하임 공작가
이 서늘하고 묵직한 감각.
손끝에 걸리는 무언가를 움켜쥐고 천천히 꺼냈다.
퉁―!
검은 물과 같은 상자의 내부가 원형의 파동을 일으키며 울렸다.
이내 내 팔이 천천히 밖으로 나오며 움켜쥔 무언가가 딸려 나왔다.
“검.”
그것은 지극히 평범하게 생긴 검이었다.
공장에서 찍어 낸 듯 아무 특징도, 하다못해 폼멜조차 양산형 거푸집으로 만든 모양새였다.
‘하지만 평범한 검일 리가 없다.’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게임에서 얻었던 것과는 다른 랜덤 아이템이었다.
외형은 볼품없었지만 카오스 미믹이 가지고 있었던 만큼 기대해 볼 만했다.
무엇보다도 이 검에서 고유의 파동이 미약하게나마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임드급 아이템인 건 확정. 이제 아이템 창을…….’
[만변(萬變)]
[마나 전도율 0%]
[착용자에 따라 외형과 능력치가 변합니다.]
이건 또 무슨 아이템이냐.
처음 보는 스펙인 건 물론이고 특성조차 특이했다.
딱!
내가 멍하니 설명을 읽고 있자 니켈이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그 행동과 살며시 느껴지는 그의 감정이 이 검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잘됐다. 니켈이 쓰면 되겠네.”
어차피 내게는 갈락슈르가 있었다.
언젠가 언데드들도 전부 네임드급 아이템으로 도배하려고 했는데 마침 잘됐지.
가끔 영문 모를 유물이 등장하는 카오스 미믹의 상자치고는 뽑기 운이 좋았다.
내가 검을 내밀자 니켈은 곧바로 검을 들고 마나를 불어넣었다.
우웅!
검이 진동하며 푸른빛의 오러가 검을 휘감았다.
그와 동시에 검의 외형이 아이템 창의 설명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오!”
양산품 같았던 검이 중후하게 변했다.
그와 동시에 뼈 모양의 장식들이 손잡이와 폼멜을 꾸몄다.
‘니켈에게 맞게끔 검의 밸런스가 변했다.’
검의 균형은 사용자에 따라 제각각이었고 이를 얼마나 잘 맞추느냐에 따라 검을 만든 대장장이의 명성이 달라졌다.
그런데 이 검은 스스로 외형을 변화시켜 착용자에게 최적의 모양으로 변화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네임드는 네임드네.”
이내 완전히 모습이 변한 검은 니켈과 어울리는 장도(長刀)가 되었다.
외날로 이루어진 긴 검의 형태는 기본기에 충실한 니켈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만변(萬變)―묘(苗)]
[마나 전도율 150%] [내려 벨 때 가속 200%] [제자리에서 검을 휘두를수록 파괴력 증가]
[착용자에 따라 외형과 능력치가 변합니다.]
착용자에 따라 능력치가 변한다더니 특성도 새로 생길 줄은 몰랐다.
그것도 마치 니켈을 분석한 듯 맞춤형 능력이었다.
‘내가 썼으면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지만 네임드 아이템은 주인이 정해지면 그 뒤로는 바꾸기가 힘들다.
궁금증 하나 해결하겠다고 이미 갈락슈르가 있는 내가 건드리는 건 너무 아깝지.
니켈은 자신의 검이 마음에 든 모양인지 곧바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휘익!
검에 붙은 특성 때문인지 내려 베기의 속도가 정말로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빨라졌겠지. 아이템 창이 거짓말을 할 리는 없으니.’
딱!
니켈의 기뻐하는 감정이 내게 전달되었다.
내 첫 검술 스승이자 첫 동료인 니켈이 기뻐하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잠시 조촐한 시용식을 가진 후 다시 카오스 미믹으로 시선을 던졌다.
카오스 미믹의 상자는 물건을 더 이상 꺼낼 수 없게 되었을 때 평범한 상자로 변해 버린다.
하지만 아직 검은 액체의 표면과 같은 시커먼 내부가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아직 더 꺼낼 수 있어 보였다.
통!
다시 손을 집어넣자 액체에 손을 담근 것처럼 청량한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금방 뭔가가 손에 잡히고 이내 팔을 꺼내자…….
“이건 뭐냐.”
금속이 잡히기에 이번에도 무기인 줄 알았다.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건 전혀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길쭉한 무언가였다.
상자에서 꺼낼 때는 무게를 짐작하지 못했지만 밖으로 나오니 엄청난 무거움을 자랑했다.
황금색의 금속은 내 키와 비슷한 크기였으며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거웠다.
“꽝인가.”
카오스 미믹은 게임에서도 쓸모없는 유물을 자주 주었었다.
고대 시대에서나 예술적 가치가 인정이 되던 물건들이 주로 나왔고 지금에 와서는 알아봐 줄 이도 없는 잡동사니.
그래도 혹시나 싶어 아이템 창을 확인했다.
[만트라]
[사비트리를 여는 열쇠]
‘잡동사니는 아니네.’
용도가 분명한 물건이었다.
그런데 열쇠치고는 너무 큰 거 아닌가?
거의 내 몸이랑 비슷한 크기인데.
사비트리가 뭔지 알 수가 없었으니 열쇠라고 해도 써먹을 방도는 지금 당장 없었다.
‘뭔가가 그려져 있기는 한데…….’
거대한 열쇠에는 알 수 없는 기호와 문양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내 손바닥만 한 문양부터 자잘한 기호들까지 다양했다.
“고대의 글자…… 같은데 조금 다르네. 거신? 거인?”
중복된 의미를 가진 단 한 글자만 간신히 해석이 되었다.
마법의 연구를 하며 고대의 언어도 어느 정도 익혔기에 가능했다.
이 세상 아니, 게임의 목표가 사실은 고대의 시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뒤 곧바로 공부했지.
그 덕분에 고대의 마법진도 해석이 가능했던 건데 이건 조금 달랐다.
‘고대의 문자도 마법과 관련된 문자는 다르게 쓰여서 머리가 아팠는데 다시 기출 변형이 나왔네.’
자료가 더 필요했다.
지금 당장은 해석하기가 힘들고, 또 시간도 많이 걸릴 것 같으니 놔두기로 했다.
잡동사니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시선을 돌려 상자를 보았다.
다행히 상자는 아직도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아마 이제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을 거기에 심장이 떨려 왔다.
‘처음에 뽑은 검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쓸 만한 네임드템 하나만 더…….’
운 좋게 다섯 개까지 꺼낸다고 해도 모두 잡동사니면 의미가 없었다.
물론 그 잡동사니도 비싼 값에 팔아 치울 수 있지만 네임드급 아이템은 돈으로도 살 수 없을 만큼 흔치 않으니 이왕이면 아이템으로 나왔으면 했다.
“제발!”
염원을 담아 외치자 니켈이 검을 휘두르다 말고 나를 바라봤다.
한심하다는 느낌이었지만 애써 무시하며 팔을 다시 집어넣었다.
물컹.
물컹?
전혀 예상치 못한 감촉에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놓치지는 않았기에 그대로 손에 잡힌 이상한 감촉을 끄집어냈다.
“아…….”
물컹거리는 걸 꺼내자 상자의 내부가 평범하게 변해 버렸다.
3번밖에 꺼내지 않았는데 끝나 버렸네.
안타까움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니켈이 사용할 검을 뽑은 걸로 만족해야지.
“이건 또 뭐냐.”
나는 손에 들린 몰캉거리는 무언가를 들어 올렸다.
내 머리통만 한 검은 구체였는데 마치 슬라임처럼 모양을 바꿀 수 있었다.
나는 곧바로 정보부터 확인했다.
[카오스 미믹의 핵]
단순한 설명.
그리고 단순한 만큼 나를 당황스럽게 했다.
“카오스 미믹?”
* * *
내가 집무실에 간 건 저택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에 오래 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만트라라는 이름의 열쇠는 루도에게 맡겨 아공간으로 보내고 카오스 미믹의 핵은 니켈에게 맡겼다.
끼익.
밖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에이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오빠!”
“왜.”
“알고 있었어? 어?”
“뭐를?”
내가 지하로 내려갔던 그 잠깐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아직 살렘도 만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지금 모하임 공작가에서 사람이 오고 있대!”
“모하임에서 사람이?”
에이미에게 서신이 왔었다고 전해 듣기는 했는데 시기가 공교로웠다.
설마 내가 저택에 방문할 줄 알고 맞춘 건가?
일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에이미를 진정시켰다.
“좀 침착해. 별일 아니니까.”
“이게 뭐가 별일이 아니야! 무려 공작가라고!”
현대인으로서의 기억도 그렇고 그동안 아무렇지도 않게 바하트 알븐이나 미누스 모하임을 만나 왔기에 에이미의 반응이 신기했다.
어찌 됐든 모하임에서 사람이 온다면 나쁜 일로 오는 건 아닐 테니 큰 걱정은 없었다.
“일단 응대할 준비나 해 둬. 나를 보러 온 건지 널 보러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마리아 언니한테 말해 뒀어.”
“맞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리아는 어떻게 고용하게 된 거야?”
“드륜 님이 소개해 주셨는데?”
살렘이? 마리아가 살렘하고도 연결점이 있는 줄은 몰랐다.
어찌 됐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신경 쓰지 못했던 부분을 얼떨결에 챙긴 느낌이라 좋았고.
‘마리아 프란츠. 이후에 일어날 북부 전쟁의 후반부부터 일거에 세력을 키우게 되는 프란츠 상단의 주인. 게임의 후반부에는 대륙 5대 상단의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네임드 캐릭터.’
꽤 야심가로 알고 있는데 무슨 수로 고용을 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이 이야기는 살렘한테 자세히 물어봐야지.
“오빠가 나와야지 나도 집무실에서 나갈 수 있어서 기다렸거든? 모하임 공작가가 이제 곧 도착하니까 오늘 약속을 잡아 놨던 다른 거래처들한테 양해를 구하러 가야 돼.”
“그래. 가 봐.”
“오빠도 같이 가야지 무슨 소리야.”
“내가?”
“그럼! 초반에 투자한 만큼 이 상단에 오빠 지분이 얼마나 큰지 알아? 그리고 크롬웰의 이름을 단 이상 오빠도 이 상단의 책임자야.”
“그런 억지가 어디…….”
에이미의 눈빛이 살벌했다.
오러 마스터조차 겁내지 않는 나였지만 역시 여동생은 무서웠다.
결국 나는 여동생을 이기지 못하고 함께 응접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순번이 밀린 다른 상단의 인물들이 무려 다섯 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크롬웰 각하. 매튜 상단의 로들렌 지부 지부장 기온 핸슨이라고 합니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크롬웰 각하! 저는…….”
상단 인물들의 인사를 일일이 받으며 인사를 마치자 에이미가 말을 꺼내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말했다.
“이미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모하임가에서 손님이 오신다죠?”
“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미리 알고 계셨던 것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방문이라 들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테이튼 상단의 대리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모하임 공작가와는 무슨 일로……?”
“그건 아직 저희도 모릅니다. 만나 봐야 알 것 같아요.”
“아, 그러시군요. 그럴 수 있죠.”
에이미의 대답에 타 상단 관계자들은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테이튼 상단의 대리인도 말로는 그럴 수 있다고 표현했지만 그 표정과 몸짓이 마치 숨기는 걸 이해한다는 뉘앙스였다.
“혹시 크롬웰 상단이 아닌 각하를 만나러 오신 건 아닌지……?”
“여러분.”
에이미가 뭔가 말을 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섰다.
귀찮은 건 질색이었고 정말로 아는 게 없으니까 할 말도 없었다.
그렇기에 말을 하면서 은연중에 알-구르드를 각인하고 얻은 만인적의 기세를 흘렸다.
“차를 조금 더 드리지요. 아마 기다리셔야 할 것 같은데.”
나는 옆에 있던 직원에게 손님들에게 차를 더 따라 주라 명했다.
내 말에서 약간의 강압적인 기운을 느낀 사람들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크롬웰 각하. 모하임 공작가의 손님이 방금 막 웰튼 성내로 진입했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성문에서 저택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으니 금방이겠네.
나는 조용히 차를 마시기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모하임 공작가에서 손님이 오시니 잠시 양해를 바랍니다. 먼저 오신 손님들인데 이렇게 대접해 드리니 죄송하군요.”
“아, 아닙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가장 처음에 물었던 테이튼의 대리인이 양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을 웃으며 바라본 나는 이내 곧 도착할 모하임의 손님을 생각했다.
‘누가 오려나? 그것보다 왜 오는 걸까.’
뮤리엘에서 식사를 나눴던 이후로 거의 반년.
그동안 연락한 적은 없었지만 세간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꽤 잘나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작정하고 정보를 풀기는 했었다.
공작 중의 하나가 내 편이 된다는 건 황제가 적인 내게 큰 메리트였으니까.
‘이쯤이면 미끼를 물었다고 봐도 되는 건가?’
우선 도착했다는 손님과 대화를 나눠 봐야 알겠다.
“모하임 공작가의 손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응접실에서 기다리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귀한 곳에서 온 손님인 만큼 다른 장소에서 응대하는 게 맞겠지.
“에이미, 우리 집에 별관이 있나?”
“안 그래도 내가 따로 안내하라고 말해 놨어.”
역시 내 동생.
나보다 한발 앞섰네.
“소, 손님!”
그렇게 에이미와 함께 응접실을 나서려는 사이 밖에서 소란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싶어 문을 열자 바로 문 앞까지 와 있던 누군가와 마주쳤다.
“어! 오랜만이에요?”
마치 전날에 만났던 것처럼 자연스레 인사를 해 오는 여인.
뒤편을 보니 안절부절못하는 직원이 보였다.
아마 안내한 곳으로 가지 않고 곧장 이쪽으로 직진한 모양이다.
“오랜만입니다, 그레타.”
그레타 모하임.
미누스의 여동생이자 모하임 공작가의 말괄량이.
하지만 실력은 전혀 말괄량이라 부를 수 없었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실력자.’
그리고 그런 그녀의 옆으로 모하임 기사단의 부단장인 대너드 슬레이가 서 있었다.
“그레타 모하임! 대너드 슬레이!”
“그냥 대리인들이 아니라니…….”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기에 모하임의 동생까지 온 거지?”
뒤쪽에서 놀란 소리와 소곤대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들리지 않게 말을 한다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전부 들을 수 있었다.
‘나도 궁금하네.’
도대체 무슨 일로 무려 혈육과 기사단의 부단장까지 왔을까.
‘지금부터 알아보면 되겠지.’
나는 손을 펼치며 말했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