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마지막 평가
“진짜 신분으로 들어온다는 이야기는 아니겠지요?”
잠시 차분하게 생각해 보자 조금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기겁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의 뉘앙스를 보면 단순히 내 약점이 될 수도 있는 가족들을 지켜 주겠다는 의미 같았으니.
“당연하지. 왜? 제국 최악의 수배범 살렘 예디디아가 크롬웰 백작가 휘하로 들어갔다는 논란을 만들고 싶냐?”
“너무 갑작스러운 이야기라 당연한 말을 해 버렸네요.”
“그렇게 놀랄 것까지야. 평생 있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 1년이다. 그리고 네가 알려 준 성서도 완전히 분석하지는 못했거든. 1년 동안 여기서 연구하는 것도 나름 나쁜 이야기는 아니겠지.”
나야 살렘의 정체가 밝혀지지만 않으면 두 팔 벌려 환영이지.
안 그래도 집회의 파벌 문제로 다른 흑마법사들로부터 견제가 들어올 수 있는데 그걸 원천 봉쇄하겠다는 소리니까.
‘살렘이 내게 붙었다는 걸 알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그리고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은 1년만 있겠다고 했지만 상황이란 게 어떻게 변할지 모를 노릇.
어쩌면 이런저런 일이 겹쳐서 계속 내 밑에 있게 될 수도 있었다.
“저야 감사하죠. 살렘이 곁에 있어 준다면 안심할 수도 있고요.”
“대신 조건이 있다.”
“……저한테 받은 게 너무 많아 그냥 도와준다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호구냐?”
살렘의 당당한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일단 조건이 뭔지 들어나 보자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조건이 뭡니까.”
“나도 마법사다. 그리고 연구에는 돈이 필요하지.”
“살렘이 돈이 부족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요.”
“이래 봬도 제국 수배범이다. 멀쩡한 수입원이 있을 것 같냐? 그래도 모자라지 않은 실력 덕분에 여기저기서 앵벌이를 해 왔지만 한곳에 정착하게 되는 순간 그것도 무리다.”
이건 생각도 못 했는데.
안 그래도 돈이 필요한데 살렘한테 돈을 줘야 한다면 한동안은 강화 특성의 ‘강’자도 못 꺼내게 생겼다.
‘그래도 살렘을 돈으로 고용할 수 있는 건 큰 메리트지.’
문제는 과연 얼마를 필요로 하냐는 건데.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크롬웰 가문에 빌어먹는 동안에는 나도 나름 돈을 벌 궁리를 해 볼 거니까. 뭣보다 네 동생의 사업이 생각보다 잘 되고 있어. 내 인맥이나 도움이면 지금보다 훨씬 성장할 거다.”
“에이미의 사업이 그 정도라고요?”
저번에 확인했을 때만 해도 내가 특허로 버는 돈에 10분의 1 수준이었다.
물론 이제 막 꾸린 상단이라 수입보다 지출이 많으니 어쩔 수 없었다지만 살렘을 감당할 정도로 많이 버나 의문이었다.
솔직히 내가 지금 특허로 버는 돈을 전부 써도 살렘이 만족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래. 상단에 네 지분도 조금 있다고 들었는데 일단 내 급여에 대한 건 네 동생이랑 같이 얘기해 보자고.”
“알겠습니다.”
“그래. 일 얘기는 이제 돌아가서 마저 하자.”
살렘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직접 맥주를 시키고 돌아오더니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나이와는 별개로 그 개구쟁이 같은 표정이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꽤 재밌겠어. 지금부터 있을 1년의 시간도, 그 1년이 지난 후에 일도. 과연 네가 집회를 먹을 수 있을까?”
“만약 제가 집회의 주인이 된다면, 그때는 살렘도 집회에 들어오시겠습니까?”
“내가 미쳤냐? 들어간다면 주인이 없는 지금 들어가지……. 아니다, 차라리 네가 먹기 좋게 만들어 놓으면 그때 가서 꿀꺽 삼켜 버릴까?”
우스갯소리라는 걸 알고 있지만 살렘이 말하니까 조금 무섭네.
그러고 보면 살렘이 집회에 가입하지 않은 이유도 어딘가에 묶여 있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알고 있는데 의외로 순순히 나와 함께해 준다는 걸 보면 신기했다.
비록 1년이라는 기간뿐이었지만 그 1년조차도 살렘치고는 대단히 양보한 느낌이었다.
“에이미는 살렘의 정체를 모르고 있죠?”
“일단은 정체를 숨겨 뒀다. 앞으로도 숨길 생각이고. 알아 봤자 좋을 건 없어.”
재주문한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켠 살렘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마 정계의 흑막이나 뒤 세계에서 힘 좀 쓰는 녀석으로 알고 있겠지. 그런 내가 1년 정도만 크롬웰 가문에 의탁한다고 한다면 오히려 좋아할 거야. 네 동생은 생각보다 영악하거든.”
“에이미가요?”
우리 순진한 에이미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믿기지 않는 말이었지만 당찬 구석이 있는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믿을 만한 동생이긴 했다.
“집으로 돌아가서 마저 이야기를 끝내자고.”
“알겠습니다.”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가야 하는 만큼 이 문제는 에이미의 의사가 더 중요했다.
그녀가 싫다고 하면 어떻게든 설득을 할 생각이었지만.
‘푼돈 몇 푼으로 살렘이 호위 겸 도움을 주겠다는데 거절하면 손해지.’
앞으로 1년.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었지만 변화를 만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 * *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기말 평가로 인해 아카데미는 어수선했다.
특히 내년이면 졸업반이 되는 4학년 학생들은 이마에 고랑이 생길 정도로 모두들 심각한 표정이었다.
“오랜만?”
강의실에 앉아 곧 시작될 강의를 기다리는 사이 뜻밖의 인물이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천연덕스럽게 내 옆에 앉더니 전공서를 꺼내기 시작했다.
“유리히? 디에네는?”
“볼일이 있다고 해서 오늘은 먼저 왔어.”
“그래?”
유리히가 나한테 먼저 말을 걸어올 줄은 몰랐다.
나도 바보가 아닌지라 그녀가 그동안 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저 상대할 가치가 없어서 무시해 왔을 뿐이지.
“그래서. 뭔 일로 왔어.”
“이제 곧 기말 평가잖아. 졸업 시험 다음으로 중요한 평가니까 우리 대단하신 아드리아스 크롬웰 님께 조언 좀 얻으러 왔지.”
어차피 아카데미를 다닌 동안의 성적과 점수를 합산해서 졸업반에 올라가는 형식이라 그동안 잘만 해 왔으면 무사히 진급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졸업반에 올라가기 전, 마지막 평가가 될 수 있는 이번 기말 평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디에네를 플레이해 본 나는 평가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해 줄 조언이 어디 있겠냐. 평가가 뭐로 나올지도 모르는데.”
“조별 평가일지 혹시 알아? 그렇게 되면 잘 부탁한다고.”
넉살 좋게 말하는 그녀를 보면 어떻게 디에네와 친해졌는지 알겠다.
그리고 의외로 그녀가 한 말은 들어맞았다.
마법학부 4학년의 아카데미 마지막 기말 평가는 다름 아닌 조별 평가였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될 수 있으면 디에네와 한 조가 됐으면 했다.
‘무작위로 선정이 되는 거라 의미 없는 바람이지만.’
소리 소문도 없이 치르고 지나간 중간 평가와는 달리 이번 기말 평가에는 특수한 사건이 일어난다.
저번에 일어난 물푸레 기숙사 사건과 같은 에피소드의 일종이었다.
게임에서 디에네를 플레이하며 두 번 정도 겪어 봤지.
물론 처음에는 제대로 공략하지 못해 세이브 로드했다.
하지만 한 번 겪어 보면 무조건 깰 수밖에 없는 구조라 다음 트라이에는 손쉽게 깼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조금 변했을 거다.
원래는 없었어야 할 내가 있으니.
‘게임이었으면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까.’
때마침 디에네가 강의실에 들어오는 게 보였다.
옆에 앉아 있던 유리히가 반갑게 손을 흔들자 그녀는 곧장 우리에게 다가왔다.
“웬일이야. 둘이 같이 앉아 있고.”
“그러게 말입니다.”
내가 장난스럽게 받아 주자 그녀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번 기말 평가에 그녀와 같은 조가 되지 못한다면 그녀를 지켜 줄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닌 실존 인물.
게다가 무려 천재였다.
아마 이번 에피소드는 내 도움이 없더라도 헤쳐나갈 수 있겠지.
무력이 필요한 에피소드가 아니니까.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유리히와 재잘대는 디에네는 나름 천진해 보였지만 토너먼트 때 보여 주었던 모습을 생각하면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이번에는 그녀를 믿어 보는 수밖에.
* * *
마법학부 4학년은 오랜만에 다 함께 모여 마나 부상 열차에 올라탔다.
그들을 통솔하는 미쉘 교수는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듯 즐거운 표정이었지만 반대로 학생들의 분위기는 전쟁에 임하는 듯한 각오들이 얼굴에 엿보였다.
“모두 긴장한 건 알겠지만 긴장을 너무하면 오히려 독입니다.”
함께 통솔을 맡은 톨먼 교수가 학생들의 표정을 보며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분위기가 무거운 것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 있을 평가는 졸업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지 결코 도착점이 아닙니다. 졸업반이 되면 이번 평가와 같은 일들이 앞으로 매번 즐비해 있을 겁니다. 몸이 너무 긴장을 하게 되면 쉽게 피로해지고 그는 곧 전력의 손실. 모두 긴장을 좀 풀고 억지로라도 좋으니 주변 친우들과 대화라도 나누시죠.”
전직 베틀메이지의 조언은 확실히 공신력이 있었다.
학생들은 숨을 내뱉으며 억지로라도 긴장을 몰아냈다.
“긴장 안 돼?”
심호흡을 내뱉은 유리히가 디에네를 향해 물었다.
그러자 디에네는 약 올리듯 미소 지었다.
“난 이미 성적 다 따 놨으니까.”
“아, 그러네. 거기다 토너먼트 우승까지 했잖아. 진짜 부럽네.”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억지로라도 대화를 해 보려던 학생들도 이내 잠잠해지고 결국 전과 같은 침묵이 열차 내부를 감쌌다.
결국 7시간에 가까운 침묵 끝에 도착한 장소는 나름 유명한 명소였다.
“모네의 미로.”
수십 년 전에 발견된 유적이자 현재는 황궁에서 관리하고 있는 장소.
이미 발굴은 완전히 끝났지만 그 구조적 특성과 마나 이상 현상으로 인해 민간인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이번 평가가 무언지 짐작이 가시겠지요?”
미쉘 교수의 말에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로에 왔다는 건 너무나 뻔한 내용이었으니.
“이번 평가는 모네의 미로 통과하기. 당연한 이야기지만 얼마나 빠르게 탈출에 성공하느냐로 상대 평가가 이루어질 겁니다.”
톨먼이 내용을 설명했다.
“여러분들은 한꺼번에 미로에 입장하시게 될 겁니다. 그러면 무작위로 시작 지점이 정해지고 모두 중앙에 위치한 탈출구로 탈출하시면 됩니다.”
평범한 미로라면 아무 문제가 없었으나 이곳은 고대 유적.
비록 발굴이 끝난 상태라 큰 위험 요소들은 다 제거되었지만 여전히 곳곳에 자잘한 함정들이 즐비한 곳이었다.
“참고로 이번 평가는 조별 평가로 짜일 조는 방금 말했듯이 무작위로 정해집니다. 같은 시작 지점에서 시작하는 분들이 같은 조라 생각하고 탈출을 향해 서로 힘써 주시면 되겠습니다.”
톨먼의 말이 끝나자 학생들은 웅성거리며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탈출에 걸린 시간도 중요하지만 조원 평가 점수도 따로 있습니다. 탈출이 끝난 후 조원들끼리 서로에게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죠. 만약 탈출에 도움이 되지 않았거나 협조적이지 않았던 학생들은 여기서 점수가 깎이게 되겠죠.”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묘한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톨먼이 전부 말했다는 듯 양손을 펼쳤다.
“이제 입장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산을 해 보니 조별로 조원들은 더도 말고 딱 다섯 명씩이 되겠더군요. 부디 다섯이서 다투지 않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입구에 다가간 학생들이 긴장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가운데 유리히는 디에네의 손을 붙잡으며 빌고 있었다.
“제발! 제발 디에네 알븐하고 같은 조가 되기를!”
“네 기도가 갸륵하니 부디 나와 같은 조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장난치는 거 아니야! 진짜로, 제발, 너랑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다고!”
“그래. 나도 이왕이면 유리히랑 같은 조가 됐으면 좋겠네.”
일부러 긴장을 풀기 위해 장난스레 수다를 떤 둘은 이내 다른 학생들과 같이 조용해졌다.
성적이 이미 갖춰진 이상 긴장할 필요가 없었지만 주변 분위기에 동화가 된 디에네는 자신도 모르게 아드리아스를 찾았다.
‘긴장하고 있을까?’
예전이었으면 고개도 못 든 채 떨고 있었을 아드리아스였지만 지금의 아드리아스가 긴장하고 있다는 건 상상이 되지 않았다.
“…….”
디에네의 예상대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로의 입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 시선을 느꼈는지 디에네 쪽으로 고개를 돌린 아드리아스가 이내 입 모양을 만들었다.
‘조원을 조심해.’
조원을 조심해?
디에네는 아드리아스의 알 수 없는 충고를 보며 이내 빛이 나기 시작한 유적을 보았다.
거대한 미로의 입구가 아가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목울대를 넘기며 지켜보는 학생들 사이에서 미쉘 교수가 소리쳤다.
“자, 입장하세요!”
탈출 시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빨리 입장할수록 유리하다고 생각한 학생들이 입구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들어가기 직전까지 디에네의 손을 잡았던 유리히도 그녀와 함께 입구로 들어섰다.
“아!”
기묘한 감각과 함께 공간이 전이되는 것을 느낀 디에네는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유리히가 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하네. 역시 고대 유적?”
“디에네? 디에네 알븐이다!”
“정말? 이야! 당첨이구나!”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주변을 둘러보자 먼저 입장했던 학생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쓰게 웃으며 바라본 디에네는 이내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잠시만요.”
“응? 왜?”
그녀의 표정이 이상함을 느낀 조원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그녀를 살폈다.
그러자 디에네가 조원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더니 이내 자신을 가리켰다.
“분명 조별로 다섯 명이라고 하지 않았나요?”
“그렇지. 무조건 다섯이라고 했…….”
말을 하던 학생은 그제야 무언가를 눈치채고 자신의 조원들을 둘러보았다.
디에네가 처음에 느꼈던 의문을 천천히 말했다.
“근데 왜 우리는 여섯 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