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선물 그리고 집에서 온 편지
파릇파릇했던 신입생들은 어느새 어엿한 로들렌 아카데미의 재학생이 되어 있었다.
중간 평가마저 끝나고 이제는 11월 말에 있을 기말 평가만이 남은 그들은 추운 날씨에도 여전히 아카데미 내부를 활발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루이스!”
강의가 끝난 세레나가 멍하니 있던 루이스를 건드렸다.
그제야 눈에 초점이 돌아온 루이스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강의 끝났어. 뭘 그렇게 멍 때리고 있어?”
“어? 어…….”
며칠 전에 있던 일 이후로 계속해서 이런 상태인 루이스를 답답하게 바라본 세레나는 이내 그들을 스쳐 지나가는 크리스를 붙잡았다.
“크리스, 너도 루이스한테 한마디 해. 라이벌이 이렇게 멍 때리고 있잖아.”
“음?”
세레나가 갑자기 붙잡자 미간을 좁힌 크리스는 이내 루이스를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내 알 바 없다. 그리고…….”
크리스는 그대로 떠나며 한마디를 남겼다.
“가끔은 그냥 놔두는 게 좋을 때가 있지.”
크리스의 말이 자신을 겨냥했음을 깨달은 세레나가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지만 이미 크리스는 저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세레나,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근데 생각할 게 조금 많았을 뿐이야.”
루이스가 그런 세레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생각할 게 뭐가 그리 많은데? 보나 마나 그제 있었던 대련 생각이겠지.”
“하하, 맞아. 복기를 하다 보니까 생각이 많아지네.”
“그 아이가 나이에 비해 대단했던 건 인정해. 뭐, 결국 네가 이겼지만. 그런데 넌 평소보다 훨씬 오래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비비안 선배님 때도 이러지는 않았잖아?”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근데 희한하게 자꾸 떠올라.”
그는 손을 들어 마치 검을 쥐듯 웅크렸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레나에게 말했다.
“그 아이, 벤자민이라고 했었지? 모나스 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응.”
“아드리아스 선배님이 보내서 왔다고 했었고.”
“그랬지. 솔직히 아드리아스 선배님의 이름이 나오지 않았으면 무시했을 거야. 다짜고짜 와서 대련을 해 달라니…….”
루이스는 잠시 흐뭇하게 웃었다.
“나는 아드리아스 선배님이 나한테 관심이 없는 줄 알았어. 처음에 대련 신청했을 때도 무시만 당했으니까.”
그의 손이 점차 오므라지며 강하게 움켜쥐어졌다.
“하지만 아니었다는 걸 알았어. 내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면 벤자민을 내게 보내지 않았겠지. 실제로 벤자민하고 한 대련으로 성장했고.”
“성장했다고?”
“어. 그때 너도 대련을 해봤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정신이 없었네.”
숨을 고른 루이스가 확정적으로 말했다.
“그 녀석은 천재야.”
“그 녀석? 벤자민? 그야 그렇겠지. 천하의 루이스 아트만을 상대로 고작해야 모나스 아카데미 학생이 그렇게 오래 버텼으니까.”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하는 소리야. 벤자민 아니키우스는 진짜 천재야. 나와 그, 둘 중 하나만 고르라면 그가 진짜 천재에 속하지.”
“……그 정도라고?”
“물론 내가 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이후로도 나는 계속 벤자민의 앞에 서 있을 거야. 하지만 만약에 내가 벤자민하고 대련을 해보지 않았다면 언젠가 따라잡혔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해.”
루이스의 과감한 칭찬에 세레나는 왠지 모를 분함을 느꼈다.
그동안 루이스와 함께 해 오며 자신보다 밑에 있는 인물을 이 정도로 높게 평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리고 더 대단한 건 아드리아스 선배님이지.”
“어째서?”
“이럴 걸 다 알고 계셨던 거야. 그러니까 벤자민을 나한테 보낸 거지. 서로에게 도움이 될 걸 미리 짐작하시고.”
“신기하긴 하네. 도대체 벤자민은 또 어떻게 아시고 너한테 보낼 생각을 하셨을까. 거기다 나까지 신경 썼었잖아.”
둘은 말없이 한동안 이 미스터리를 고민했다.
최근 1년 동안 아카데미 생활을 하며 느낀 거지만 드러나지 않은 아드리아스의 손길들이 알게 모르게 곳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결국 루이스가 감탄하듯 뱉어냈다.
“역시 대단하셔.”
“그래. 그냥 이렇게 된 거 아드리아스 선배님을 향한 찬양 시간이나 가집시다.”
“알았어. 이제 그만 얘기할게. 점심 먹으러 가자.”
세레나의 장난스러운 말에 루이스가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는 듯이 말했다.
‘단순히 실력도 실력이지만…….’
어쩌면 그동안 목표로 삼을 이정표가 없었기에 더욱 아드리아스라는 사람을 동경하게 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식당으로 걸었다.
“와,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냐.”
유난히 많이 모인 사람들을 보며 세레나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한참 생각에 빠져 움직이던 루이스는 그제야 그 광경을 확인하고 물었다.
“무슨 일이래?”
“무슨 일이긴. 저거 안 보여?”
세레나의 손끝을 따라가자 조금 전까지 씹고 뜯던 장본인이 천천히 기사학부 식당 쪽을 향해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루이스는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세레나를 돌아보았지만 사실이었다.
“뭘 그렇게 봐. 그렇게 찬양하던 아드리아스 선배님이 저기 걸어가고 있는데 감사 인사라도 하러 가야지?”
“그, 그렇지.”
루이스의 긴장한 모습에 세레나는 내심 웃음을 흘렸다.
항상 차분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그가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자 더욱 놀리고 싶어졌다.
“그나저나 여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거지? 인사하는 김에 물어보자.”
“굳이 그런 것까지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선배님은 귀찮은 걸 싫어하실 텐데.”
“뭐야. 루이스, 너 지금 졸은 거야?”
“그런 게 아니라…….”
그때 아드리아스가 둘을 확인하고 방향을 틀었다.
대화를 나누다 깜짝 놀란 루이스와 세레나는 이내 얼음처럼 굳어 다가오는 아드리아스를 바라보기만 했다.
“오랜만이다.”
어느새 다가온 아드리아스의 말에 루이스와 세레나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그런 둘의 반응에 냉정하게 보였던 아드리아스의 얼굴에 금이 갔다.
차갑게만 보였던 그의 표정에서 흐릿한 미소를 발견한 세레나가 간신히 숨을 뱉어 내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다.
“저번에는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어떤 거?”
“네? 아! 비비안 선배님한테서 들었어요. 아드리아스 선배님이 비비안 선배님한테 부탁하셨다고…….”
“아, 그거.”
아드리아스는 마치 잊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주었다.
“도움은 됐어?”
“네? 네! 무척 도움 됐습니다!”
“그러면 다행이고. 안 그래도 내가 한 말 때문에 속이 복잡했을 텐데 잘됐으면 좋겠네.”
“아, 아닙니다! 아드리아스 선배님한테는 항상 감사하고 있어요!”
가만히 듣고만 있던 루이스도 슬며시 끼어들었다.
“선배님, 벤자민 아니키우스라는 아이를 이틀 전에 만났습니다.”
“그래? 괜찮았어?”
“그 전에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조금은 도전적인 모습의 루이스를 아드리아스가 차분한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세레나는 자신도 모르게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으로 지켜만 보았다.
“말해.”
“벤자민은 아드리아스 선배가 가르친 아이입니까?”
그 말에 아드리아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듯 피식 웃어 버렸다.
루이스는 자신이 뭔가 실수를 한 게 있었나 뱉었던 말을 곱씹어 보며 괜히 당황스러워했다.
“아니야, 그렇게 당황할 거 없어. 그냥 좀 놀라서 웃어 버린 거라.”
“놀라다니요?”
“날 너무 높게 평가해 준 것 같아서. 질문에 대답부터 한다면 벤자민을 가르친 적은 없어. 애초에 가르칠 실력도 안 되고.”
그리고는 몸을 돌리며 말했다.
“직접 상대해 봐서 너도 알 거 아니야? 그 녀석은 천재야. 나 같은 게 가르칠 수 있는 애가 아니지.”
“아, 선배님! 어디 가시는 건가요?”
“비비안 찾으러 왔어. 혹시 어디 있는지 알아?”
“확인해 보겠습니다.”
“아니야. 나중에 다시 보자.”
아드리아스가 손을 흔들며 떠나자 루이스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몸의 긴장을 풀었다.
세레나도 마찬가지였는지 긴 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특이한 선배님이야.”
“역시 강해.”
“넌 또 그것부터 확인하고 있었냐? 으이구. 지겹다, 지겨워.”
세레나가 뭐라 하던 루이스는 아드리아스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꼭 따라잡고 싶어. 나란히 설 수 있게.”
* * *
비비안을 만나러 기사학부에 온 김에 운 좋게 루이스랑 세레나를 만났다.
지금 내가 비비안을 찾아가는 것도 세레나를 봐준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려는 거라 연관이 없지는 않지.
“식당에 없으면 연무장을 가 봐야 하나.”
내 허리춤에는 지금 갈락슈르를 제외하고도 한 개의 검이 더 달려 있었다.
트라울러에게 얻은 비비안을 위한 선물이었다.
트라울러는 결국 내 언데드들을 위한 장비를 만들어 주기로 했다.
하지만 장비가 뚝딱하고 나오는 건 아니라서 시간이 꽤 걸렸다.
결국 주문만 하고 다시 아카데미에 복귀할 수밖에 없었는데 대신에 미리 만들어 놓은 검을 하나 얻어 낼 수 있었다.
‘니켈한테 줄 수도 있지만 어차피 검 같은 건 더 좋은 걸 구할 수 있으니까.’
트라울러에게 받은 검은 충분히 좋은 명검이지만 네임드급은 아니었다.
그가 만든 네임드는 ‘별 사냥꾼’밖에 없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있는 대장간 ‘내 망치질은 세계 제일’보다는 훨씬 좋은 품질의 장비를 만드니 나쁘지 않지. 사실상 네임드급 아이템을 제외하면 끝판왕급 장비를 만드니.
‘비비안이 좋아했으면 좋겠네.’
예전에 내 갈락슈르를 보고 관심을 보일 때부터 알았지만 비비안도 검사인 만큼 검에 꽤 관심이 많아 보였다.
‘정작 비비안이 사용하고 있는 검은 별 볼 일 없는 양산품이었지.’
그녀의 가정사를 대충 알고 있는 나로서는 이해가 갔다.
아마 그리 풍족한 생활을 하고 있는 건 아닐 터.
“와, 아드리아스 선배다.”
“여기는 어쩐 일이시지?”
원래도 이목을 끌었던 나지만 막시민을 만난 이후로는 부담스러울 정도의 관심을 받았다.
검을 사용하는 이들로서는 한 번쯤은 동경할 수밖에 없는 최강의 검사를 만나고 대화를 나눈 거니 당연한 건가.
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하며 주변에 물었다.
“혹시 비비안 벨로칸이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비비안 선배님?”
“어? 아까 식당 쪽으로 가셨는데?”
내 예상이 맞았나 보다.
나는 멈췄던 걸음을 옮겨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에 도착해 주변을 스윽 훑어보자 눈에 띄는 초록 머리카락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초록 머리카락도 내 등장으로 소란스러워진 식당 분위기를 눈치채고는 고개를 돌려 내 쪽을 바라봤다.
“아드리아스?”
그녀는 큰 눈망울을 끔뻑이며 멍하니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제야 비비안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내게 자리를 건넸다.
“비비안, 잘 지냈어요?”
“응. 갑자기 와서 놀랐어.”
그런 그녀에게 나는 곧바로 허리에 맨 검을 풀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자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비비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항상 부탁만 하고 도움만 받아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리고 이건 이번에 우연히 얻게 된 건데 선물로 가져왔어요.”
“난 이미 귀걸이를 받았어.”
그녀가 하얀 귀걸이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그것도 선물이고 이것도 선물이에요. 그리고 어차피 저는 이게 있어서 새로 얻은 검은 비비안이 받아 줬으면 좋겠습니다.”
결국 검을 받아 든 비비안이 천천히 검을 뽑아 보았다.
검신의 색은 특이했다.
옅은 노란빛이 감도는 검신은 평범한 광석으로 만든 게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건?”
“소생철(蘇生鐵)로 만든 검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로 마법 연구에 사용되는 희귀 광석인데 저도 이걸로 검을 만들 수 있다는 건 처음 알았네요. 특징으로는 굳이 관리를 하지 않아도 예리함이 유지된다고 합니다.”
네임드급 아이템은 아니지만 특성을 지닌 만큼 뛰어난 무기였다.
그 예리도나 마나 전도율은 트라울러가 만든 만큼 보장할 수 있었고 소생철로 제작이 된 덕분에 거의 반영구적인 날카로움을 자랑했다.
“이건 안 돼. 받을 수 없어.”
비비안이 드물게 얼굴을 굳히며 내게 다시 검을 건넸다.
그러나 나는 검을 받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미 검의 주인은 정해졌습니다. 이름도 주인이 될 비비안이 정하라고 대장장이가 말하더군요.”
“하지만…….”
“비비안이 받지 않으면 그 검은 주인 없는 검이 될 겁니다. 저한테는 예전에 마탑주님께 받은 검이 있으니 그 검을 쓸 일이 없거든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던 비비안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고마워. 가보로 간직할게.”
“가보로 간직할 만큼 좋은 검은 아니에요. 제가 나중에 진짜 가보로 간직할 만한 검을 선물해 드릴게요.”
“아니야! 이걸로도 충분해.”
그녀는 검을 품에 꼭 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다시 검을 반쯤 뽑아 보며 말했다.
“검의 이름은 ‘영원한 맹세’로 할게.”
“좋은 이름이네요. 부디 잘 사용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녀도 이 검을 만든 사람이 트라울러라는 걸 모르겠지.
아마 알았으면 더 받지 않으려 했을 거다.
그만큼 트라울러의 명성은 널리 알려진 편이었으니까.
“그…… 밥은 먹었어?”
“아니요. 이제 먹어야죠.”
“그럼 같이 먹을래?”
“그럴까요?”
띵!
그때 내 태블릿으로 메시지가 도착한 알림음이 울렸다.
잠시 양해를 구한 나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관리동에 아드리아스 크롬웰님 앞으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편지?
내게 올 편지라면 에이미밖에 없었다.
집회나 뒤가 구린 곳에서 오는 편지는 관리동으로 보내지지 않고 내게 직접 전달되었으니까.
‘무슨 일이지.’
태블릿에는 편지의 내용을 원한다면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도 있었기에 조금만 살펴보기로 했다.
―오빠를 찾아온 손님이 있음. 확인하는 대로 당장 집으로 돌아올 것!
“뭐라는 거야, 얘는.”
손님이 있다는 소리가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잘 생각해 보자 조금 불안해졌다.
나를 찾아올 손님치고는 멀쩡한 사람이 없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사람이 지금 내 여동생과 함께 집에 있다고?
“비비안, 죄송하지만 급한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괜찮아. 다음에 또 봐.”
조금 의아한 듯싶었지만 비비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나는 그런 그녀와 일별하고 그대로 식당을 빠져나왔다.
‘집회 측 인물인가? 모른? 루나? 헤이겔? 아니면 트라울러의 장비가? 아니야, 장비가 벌써 다 만들어졌을 리는 없어.’
불안한 마음을 안고 곧바로 웰튼 영지를 향해 열차를 타러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