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깨달음
루나가 허공을 박차고 날았다.
어느새 강령을 사용한 그녀는 한 손에 거대한 낫을 만들어 내며 그대로 헤이겔에게 달려들었다.
콰가가각!
온몸이 검게 변한 헤이겔에게 낫이 박혀 들었다.
그러나 마치 단단한 무언가에 부딪힌 것처럼 불똥만 튀고 아무 상처 없는 모습으로 헤이겔이 웃었다.
“흐흐.”
헤이겔은 인간의 모습을 벗어났다.
검은 달걀귀신같이 변한 헤이겔이 귀까지 찢어진 입을 쩌억 벌리자 검은 나비가 쏟아져 나왔다.
후웅.
쿠아아앙!
루나가 낫을 크게 휘두르며 헤이겔과 나비들을 떨쳐 냈다.
그사이 다른 흑마법사들은 서둘러 방어 마법을 사용하며 거리를 벌렸다.
물론 나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루나, 물러나세요.”
탁자를 밟고 달렸다.
마나가 요동치며 전신으로 마력이 순환했다.
파앙!
새하얀 갈락슈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루나를 옆으로 밀어내며 내가 대신 헤이겔을 상대했다.
“친구!”
“괜히 휘말릴 필요 없습니다. 제가 해결하죠.”
헤이겔이 미친 게 아닌 이상 정말로 날 죽이려고 이런 걸까?
굳이 이렇게 번거롭게?
애초에 그가 날 죽이려 했다면 기회는 많았다.
‘모른도 지켜보고만 있는 걸 보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하여간 생긴 것처럼 속이 시커멓군.’
굳이 이 난리를 만든 걸 보면 아무래도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지만 일단은 어울려 주기로 했다.
[기초 강령술: 강령을 시전합니다.]
[각인된 영혼 1체가 감지됩니다.]
[‘바야트라의 대전사, 알-구르드’의 영혼이 강령합니다.]
‘크라하!’
오랜만에 듣는 알-구르드의 포효.
더 이상 들을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신체 능력이 상승하는 게 느껴졌다.
루나가 걸어 줬던 강령술에 비하면 미미했지만 상관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알-구르드, 오러 마스터의 감각.
‘이건 또 신기하네.’
시야가 훤해지는 느낌이었다.
헤이겔이 만들어 낸 검은 나비들이 단숨에 파악되었다.
‘133마리.’
갈락슈르에 최대한의 마나를 욱여넣었다.
새하얀 검신의 겉에 검은 오러가 넘실거렸다.
[일시적으로 예리도가 상승합니다.(중첩 가능)]
원했던 메시지를 확인하고 곧바로 검을 휘둘렀다.
쿠아아아―!
검기가 섞인 검풍이 소용돌이쳤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미친!”
“마법사 맞아?”
검은 나비들이 검풍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부서져 갔다.
하지만 아직 안심하기는 일렀다.
“내가 보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닌데?”
어느새 내 옆에 다가온 헤이겔이 속삭이면서 주먹을 휘둘렀다.
쾅―!
분명 갈락슈르로 공격을 막아 내었지만 엄청난 충격과 함께 날아갔다.
헤이겔은 그림자를 타고 이동할 수 있는 괴랄한 마법을 사용했다.
인기척도 없이 내 곁에 올 수 있었던 것도 그를 이용한 것.
“날 상대로 전력을 발휘하지 않으면 정말로 죽을 거다.”
다시 한 번 내 귓가에서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쾌속의 검을 뿌렸다.
깡!
불똥이 튀겼다.
아직 예리도가 중첩되지 않은 건가.
헤이겔은 내 공격을 막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상처를 내면…….’
블러드 커스가 오러에 섞여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상처를 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다.
‘언데드를 보여 주기는 싫다.’
내 언데드들은 하나하나가 평범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언데드들을 이 수많은 흑마법사들 앞에 보여 주는 건 숨겨 둔 패를 공개하는 것과 마찬가지.
언데드를 사용하기 싫다면 다른 걸 사용해 보는 수밖에.
나는 애써 거리를 벌리려 하지 않았다.
어차피 헤이겔 특유의 마법 때문에 거리 싸움은 의미가 없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
문득 막시민이 보여 줬던 움직임이 떠올랐다.
어째서일까. 알-구르드를 강림시킨 영향인가?
왠지 지금이라면 나도 가능할 것 같았다.
후웅!
헤이겔의 검은 주먹이 날아왔다.
그림자에 뒤덮인 듯 검게 변한 주먹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다가왔다.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며 전투 재능이 바쁘게 머릿속을 휘젓기 시작했다.
파앙!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해 내자 공기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풍압만으로 달팽이관이 흔들려 어지러웠지만 간신히 균형을 잡고 검을 휘둘렀다.
‘이렇게?’
막시민이 했던 것과 같이.
마나를 폭사시켰다.
쿠앙!
짧은 섬전이 터져 나왔다.
막시민의 그것에 비하면 태양 앞에 반딧불처럼 희미했지만…….
주륵.
헤이겔이 자신의 볼을 만졌다.
검은 얼굴 위로 자그마한 생채기가 나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이전과는 달리 진지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 뭔가가 손에 잡힐 것만 같았다.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때는 단순해 보였지만 직접 막시민을 따라 해 보니 느껴졌다.
그가 휘둘렀던 일검, 일검은 온갖 무리가 섞여 있다는 것을.
‘가른다.’
상대를 베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공간을 갈랐다.
피슉!
다시 한 번 내 검이 움직였다.
그러자 헤이겔의 몸에 또다시 생채기가 생겼다.
집중하느라 블러드 커스도 사용하지 않고 있었기에 헤이겔에게는 전혀 대미지가 없을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멈출 수가 없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헤이겔이 말을 하자 나비가 사방으로 피어났다.
수백 마리의 나비가 동시에 펄럭이는 장관을 연출하며 헤이겔이 움직였다.
나비가 있던 장소에는 헤이겔이 있었으며, 동시에 없었다.
그 기가 막힌 움직임 도중에도 그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대는 괴물이군. 지금 이 순간에도 성장한다는 건가?”
“후우.”
잠시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고.
꿈틀거리는 가슴 속의 열망을 억눌렀다.
곧이어 그 열망을 검으로 표현했다.
오직 검의 움직임만 쫓는 나는 주변의 모든 것을 잊었다.
내가 검을 쫓는 건가, 검이 나를 쫓는 건가.
뒤틀린 세상 속에서 오로지 검은 나비들과 나, 그리고 검만이 느껴졌다.
[재능 ‘검술…… 획득…….]
[조건이 충족…….]
[진화가 가능한…….]
주변이 조금 소란스러운 것 같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 검무에 완전히 몸을 맡긴 상태.
처음에는 막시민의 검을 흉내 냈었지만 점차 달라져 갔다.
데슈른에게 배웠던 무아검이 자연스레 녹아들며 또 다른 무언가로 계속해서 변해 갔다.
‘막시민은 검도, 오러 비기도, 검술도, 결국 모두 도구에 불과하다고 했지.’
오로지 본신의 힘만을 강조한 그의 의견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르게 생각했다.
본신의 힘도 결국에는 도구에 불과하지 않을까?
‘내 몸도 결국에는 도구. 도구를 다루는 것은 오직 내 의지.’
모두가 도구라면 결국 모두가 같다는 것 아닐까.
그 말은 곧…….
‘내가 곧 검이고, 검이 곧 나다.’
내 몸은 검이오.
내 검법도 검이다.
내 검은 곧 내 몸의 일부이고, 내가 사용하는 검술도 곧 나 자신이었다.
[특성 ‘깨달음’이…….]
그렇게 모든 게 합쳐지자 데슈른의 가르침이 떠내려왔다.
‘무아(無我).’
애초에 나라는 것은 없다.
그저 적을 향한 내 의지만 남을 뿐.
[‘바야트라의 대전사, 알-구르드’의 강령이 종료됩니다.]
[쿨타임: 80시간]
알 수 없는 소리와 함께 세상에 금이 갔다.
오직 검과 내 자신의 의지만을 느꼈던 것이 무너지고 주변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아!”
앞으로 한 발자국.
손에 닿기 직전이었는데…….
‘근데 뭐가 닿을 뻔한 거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후폭풍이 몰아와 생각이 이어지지 못했다.
“허억.”
나는 온몸이 땀에 젖어 있는 것을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도대체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친구!”
근육들이 비명을 질렀다.
몸 곳곳에서 산소가 부족하다며 아우성이라 나는 제대로 서 있기도 버거웠다.
“친구, 괜찮아?”
누군가가 나를 부축했다.
간신히 고개를 돌리자 루나의 얼굴이 보였다.
잠시만, 루나가 누구였지?
여긴 어디고, 나는 뭘 하고 있었지?
눈꺼풀이 닫히려 하고 있었다.
간신히 버텨 보려 했지만 역부족이다.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난 누구지?’
* * *
“아, 오셨군요. 여기에 앉으시지요.”
환한 얼굴로 손님을 맞이한 홀링턴 자작이 손수 의자를 꺼내 주었다.
그러자 에이미 크롬웰은 감사를 표하며 자리에 앉았다.
“감사합니다, 각하.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요즘 이보다 더 잘 지낼 수가 없을 정도로 좋습니다. 그나저나 2달 만인가요? 시간이 빠르군요.”
“그만큼 할 일이 많았죠.”
오직 실력으로만 상단을 키워 가려 했던 에이미는 예상하지 못했던 인맥 아닌 인맥 덕분에 순항하고 있는 중이었다.
최근에는 아드리아스가 알려 준 정보를 이용해 에버라스트 상단과 연계하여 쏠쏠하게 콩고물을 주워 먹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 슬슬 크롬웰 상단도 한 건 맡아야지요?”
“네. 이번 일을 위해 그동안 끌어모았으니까요.”
랑크라트 백작가에서 이루어질 철광산의 지분 매입.
드디어 하루 앞으로 다가온 시점이었다.
그 어떤 때보다 큰 건이었던 만큼 에이미는 요즘 잠도 줄여 가며 주변 정보를 취합해 정리하고 있었다.
“에이미 양도 슬슬 비서를 두심이 어떻습니까? 광산 지분 매입까지 하고 나면 슬슬 벅찰 겁니다.”
“아직은 괜찮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우선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고려해 보겠습니다.”
“상단의 일이란 게 사람을 함부로 믿기 힘든 일이긴 하지요. 하지만 결국 규모를 키우려면 혼자서는 감당하지 못합니다. 결국 저희도 사람이니까요.”
“명심할게요.”
에이미가 당차게 말하자 홀링턴 자작의 입가에도 미소가 남았다.
그렇게 남은 일정과 앞으로 있을 경매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던 도중,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렸다.
“홀링턴 각하, 급히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자작은 에이미에게 쓴웃음을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정말 급한 일이 아니면 방문을 두드리지 말라고 했는데 아무래도 급한 일인가 봅니다. 죄송하군요.”
“아니에요. 저희 일은 급한 게 아닌데요, 뭘. 아무래도 중요한 일 같은데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에이미와 홀링턴 자작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문을 향해 갔다.
이내 홀링턴 자작이 방문을 열어 주려 할 때, 누군가가 먼저 문을 열어젖혔다.
벌컥!
“응?”
당황한 홀링턴 자작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에이미도 놀라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바깥에서 방문을 연 인물은 그런 에이미와 홀링턴 자작을 번갈아 보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점심?”
“아, 살……! 아니, 하겐달 님!”
“불쑥 찾아와서 미안해. 사과했으니까 받아 줘라.”
윙크를 하며 방에 들어온 그는 에이미를 보았다.
그리고는 갑자기 허리를 숙이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너, 좀 닮았다?”
“무례하네요. 누구시죠?”
“성격도 비슷한 거 같고.”
이내 허리를 편 남자가 말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하고 무슨 사이냐?”
살렘 예디디아.
그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