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아드리아스의 결심
모른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안 그래도 루나가 내 편을 들어 주고 있던 상황에서 모른까지 날 옹호하자 제스터의 당황스러워하는 감정이 전해져 왔다.
“도대체 왜?”
“내 제자와 같은 아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 그의 흑마법서로 성장했으니.
모른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전의를 상실한 제스터가 마법을 취소했다.
제스터의 포기를 확인한 모른의 데스나이트도 존재감을 뿜어내던 것을 멈추고 땅으로 꺼지듯 사라졌다.
게임이 아닌 실제로는 처음 보게 된 데스나이트였는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강해 보였다.
“이해가 가지 않아. 그 녀석 때문에 당신이 손해를 봤어. 근데 왜 그의 편을 들어 주는 거지?”
“당사자인 내가 괜찮다는데 더 할 말이 남아 있는 게냐?”
모른의 말대로 티무르와 미리내의 시신은 집회 측의 손해라기보다 모른의 손해. 그런 만큼 모른이 괜찮다고 한 이상 별 문제는 없었을 테지만 그때의 일로 자존심이 상했던 모양이다.
“그는 집회 소속도 아니다. 그건 알고 행동하는 거겠지?”
“제스터, 이 늙은이가 충고하지.”
얌전한 노인과 같았던 모른의 눈에서 언뜻 혈광이 비쳤다.
“박살 나기 싫으면 그만 까불거라.”
콰직!
모른의 말이 끝나자마자 제스터가 옆에 있던 탁자를 마력으로 접어 버렸다.
차마 모른에게는 뭐라 하지 못하고 화풀이만 한 제스터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걱정 말거라.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게다.”
나한테 하는 말이겠지?
일단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가 날 도와준 건 사실이니까.
“모른, 오랜만이군.”
“그래. 자네도 고생이 많구먼.”
언제 소란이 있었냐는 듯 헤이겔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 왔다.
모른도 아무렇지 않게 받는 걸 보며 나도 덩달아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대부님. 오래간만에 뵙자마자 이렇게 바로 도움을 받게 돼서 송구하네요.”
“아니다. 별것 아닌 일로 괜히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지. 제스터는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니 네가 이해하거라.”
일단은 감사하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스터가 나를 적대한다는 건 알았지만 아직은 그를 도발하고 싶지 않았다.
제스터와 모른이 충돌했지만 연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되었다.
그런 걸 보면 흑마법사들 간의 의견 충돌이 종종 일어남을 알 수 있었다.
겉으로만 보면 흑마법사라고 생각되지 않는 이들의 평범한 연회 모습이었지만 이미 대부분의 흑마법사들을 알고 있는 내 눈에는 면면이 화려한 흑마법사들이었다.
‘이번에는 여유가 있어서 대부분 초대했나 보군.’
모르셰의 둥지에서 열렸던 집회는 정말 최소한의 인원만 모였던 지라 오히려 지금이 진짜 집회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집회의 진짜 목적인 회의는 언제 열리는지 궁금해진다.
“저 녀석이 그 녀석인가? 마법과 검을 동시에 다룬다는…….”
“거 참, 별 녀석도 다 있군. 흑마법은 어느 정도 수준이지? 그래 봤자 카론의 제자였다고 들었는데.”
“이번에 막시민 크로넬이 저 녀석을 보러 제국에 왔었다며? 도대체 무슨 능력이 있길래 막시민까지 불러들인 거지?”
“헤이겔 님도 관심이 많은 것 같더군. 애초에 루나 펜드래곤과 모른 님이 편을 들어 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다 들린다, 이놈들아.
아무래도 뉴 페이스인 내게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애초에 집회 소속도 아니면서 이 자리에 있는 게 신기하긴 하겠지.
나도 초대를 받았을 때는 잠깐 멍했을 정도니까.
“친구, 이거.”
그렇게 테이블 한쪽에 앉아 내 험담을 까는 흑마법사들을 관찰하고 있자 루나가 아까부터 음식들을 가져와서 내게 권유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과자를 사 주기로 했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언제 한번 루나와 도시를 활보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을 텐데.
“고마워요.”
나는 루나가 가져다준 알 수 없는 음식을 받아먹으며 오물거렸다.
나쁘지 않네.
“친구. 오크랑은 얘기해 봤어?”
“……오크?”
입에 있던 음식들을 삼키며 되물었다.
오크랑 이야기해 봤냐니 그게 뭔 소리지?
“영혼 각인 해 줬잖아. 아직도 안 써 봤어?”
“아!”
뭐야, 알-구르드랑 이야기할 수 있는 거였어?
물론 영혼 각인을 했으니 각인된 영혼으로 강령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루나가 엔데버에서 방법을 알려 주기도 했고.
마침 내가 네크로맨서였던 덕분에 기초적인 강령술을 쉽게 배울 수 있었는데, 아직까지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크셰인하고 싸울 때도 크리브마허를 사용한다고 미처 생각도 못 했었지.’
언젠가 기회가 되면 굳이 싸우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강령술을 사용해 알-구르드와 대화를 나눠 보고 싶었다. 오크라고는 해도 오러 마스터의 경지를 밟아 본 초인인 만큼 검에 대한 조언을 들을 수도 있으니.
털썩.
루나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한참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온 모른이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다.
다른 흑마법사들은 내 험담만 깔 뿐 다가와서 말을 걸지는 않았는데 루나와 모른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대하고 있었다.
‘조금 양심에 찔리는군.’
막상 모른을 마주치자 제 발이 저렸다.
카론을 죽인 건 다름 아닌 나.
그리고 카론은 모른의 제자였다.
내가 죽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항상 모른에게 도움만 받았던 나로서는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제는 늙어서 길게 이야기도 못하겠구나. 허허.”
“할아버지, 집에 가서 쉬어.”
루나가 모른의 어깨를 주물러 주며 말했다.
하는 짓이 기꺼웠는지 모른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내가 슬쩍 말을 걸었다.
“대부님, 예전에 알려 주신 드래곤 레어 있지 않습니까.”
“음?”
모른은 내 말에 게슴츠레 눈을 뜨더니 잠시 주변을 훑었다.
몇몇 사람들이 이쪽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가야, 보는 눈이 많구나.”
“상관없습니다.”
일부러 들으라고 말한 거다.
내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자 내 속을 들여다보듯이 지그시 바라본 모른은 이내 미소를 지었다.
“알겠다. 계속 말하거라.”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대부님 덕분에 좋은 물건을 얻었어요.”
“그래?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구나.”
굳이 뭘 얻었는지 물어보지도 않는 게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렇기에 나는 이 질문을 더욱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만……. 대부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첫 만남 때부터 줄곧 궁금했었다.
모른은 왜 나에게 이리도 호의적인가.
내 어렸을 적의 기억을 아무리 뒤져 보아도 그와 연관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도와주는 걸 보면 분명 어딘가에서 인연이 있긴 할 터.
아마 내가 모르는 뒷이야기가 있거나 선대의 인연일 거라고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대부님께서 대가 없이 너무나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저 내가 좋아서 도와주는 것일 뿐이니 걱정하지 말거라. 원하는 건 하나도 없다.”
그는 애써 대답을 회피하며 옆에 있던 잔을 들어 와인을 음미했다.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의 완고한 표정을 보고 참았다.
굳이 캐물어 봤자 대답해 줄 것 같지도 않고 굳이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화제를 넘겼다.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카론 교수의 일은 유감입니다.”
“괜찮다. 어차피 아카데미에 심어 둘 녀석이 필요해서 넣어 둔 것일 뿐이니. 별로 유감스러운 것도 없다. 오히려 네가 괜찮은지 묻고 싶구나. 그래도 스승이랍시고 같이 지내 왔을 텐데.”
“예. 사실 저번 집회 참석 이후로 사이가 요원해져서 대화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스럽네요. 조금 더 대화를 나눴어야 하는데.”
나는 가증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애도를 표했다.
모른도 카론에 대해 그다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어차피 모른에게는 카론을 제외하고도 제자들이 더 있었다.
여기에 온 흑마법사들 중에도 벌써 2명이나 눈에 띌 정도니 카론 하나쯤은 별일 아니겠지.
‘애초에 사제 관계가 그리 단단한 건 아니니.’
마법사들은 이기적인 면모가 강했다.
그건 흑마법사나 일반적인 마법사나 별다를 게 없었는데, 굳이 제자를 두는 이유도 자신을 도와줄 보조가 필요해서 구하는 것이지 정말로 제자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들이는 경우는 드물었다.
오히려 서로 이용하는 관계라고 보는 것이 옳지.
“모두 주목.”
연회장의 분위기가 점차 무르익어 갈 때쯤 헤이겔이 연회장 한가운데서 말했다.
그동안 마치 평범한 귀족들처럼 행세하던 흑마법사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집중되었다.
“이제 슬슬 장소를 옮겨 볼까.”
그의 말에 연회장은 적막에 휩싸였다.
드디어 회의인가.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예상했던 대로 ‘분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해졌다.
“그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군.”
헤이겔의 말은 끝나지 않았었다.
그는 누가 듣더라도 나를 겨냥하는 게 분명한 이야기를 뱉었다.
“아무리 그래도 다음 장소에는 집회에 소속된 자만 참가하는 게 맞겠지. 그렇지 않은가?”
“맞지, 맞아.”
“당연한 얘기!”
이렇게 나오겠다 이건가?
하긴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걸 수도 있겠다.
‘그래도 이렇게 뒤통수를 칠 줄이야.’
헤이겔의 목적이 뭔지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굳이 이제 와서 저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뭔가가 있는 건 확실한데.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가 내게 천천히 다가왔다.
얼굴에 그려진 기묘한 문신이 계속해서 꿈틀대고 있었는데 표정 변화가 없음에도 마치 웃는 것과 같은 착시가 일어났다.
“이제 슬슬 결정을 내려 주지 않겠나?”
“결정?”
“그래, 결정. 집회에 가입할 건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 물러날 건지 정하게. 그냥 물러난다고 해서 불이익은 없을 거야. 단지 내 개인적인 욕심에 그대를 부른 거니.”
헤이겔의 태도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꽤 호의적이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그는 진심으로 내가 집회에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도대체 왜지.’
뭘 노리고 있는 걸까.
‘원죄?’
아니다.
원죄는 황제와 그 측근만이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직까지는 집회에서 원죄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터.
어쩌면 내가 아드리아스가 되고 원죄를 가져가며 미래가 바뀐 이상, 집회 측에서는 영영 원죄의 존재가 알려지지 않을 수도 있다.
7가지 죄악의 존재는 알 수 있어도 0번째인 원죄가 있다는 건 차마 상상도 못 하겠지.
‘그렇다면 나한테서 도대체 뭘 노리고 있는 거지? 탐욕을 들킨 건가?’
한참 죄악에 대한 생각을 하다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고…….
결단을 내려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집회에 가입하는 걸 꺼릴 이유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네크로맨서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거기서 집회 소속의 흑마법사가 된다고 뭔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회 가입을 내가 계속 꺼려 왔던 건.
‘흑마법사를 항상 적이라고 생각해 왔다.’
게임 플레이 경험 때문일까.
나 자신이 흑마법사임에도 언제나 흑마법사에 대한 적의를 느껴 왔다.
정말 모순되게도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며 그들과 나를 분리했다.
“친구.”
루나가 나를 나직이 부르며 옷깃을 잡았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며 바라보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생각해 보면.
루나도 집회 소속의 흑마법사였다.
‘내가 뭔가 착각한 건가.’
흑마법사라고 모두 나쁜 게 아니란 걸, 흑마법사인 내가 알고 있다.
이들 중에 사연 없는 이는 없으며 실제로 악독한 방법으로 흑마법을 익힌 케이스는 많지 않을 거다. 애초에 그런 짓을 벌이면 금세 소문이 퍼져 토벌되니 조심하는 게 당연했지만.
‘앞으로의 에피소드를 헤쳐 가기 위해서는 세력의 힘도 필요할 거다.’
첫 번째 플레이어블인 루이스가 속하게 될 자유 기사단도 그렇고, 다른 플레이어블도 각자의 가문과 마탑의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나라고 이용하지 못할 게 어디 있나.
“결정은 내렸나.”
헤이겔이 충분히 기다려 줬다는 듯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회에 가입하겠습니다.”
“좋은 선택이다. 집회에 들어온 걸 환영하지.”
헤이겔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눈치를 살피던 다른 이들도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친구, 괜찮겠어?”
“예. 괜찮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말끔해졌다.
그리고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집회.
내 걸로 만들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