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아카데미 복귀 그리고 사건
쾅!
화를 못 이긴 에반이 바닥을 두드리며 울분을 토했다.
“어째서……!”
먼저 나올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오러 비기가 화룡의 드래곤 하트를 깨부순 순간 손을 쓸 새도 없이 밖으로 나와졌다.
더 화가 나는 것은 그렇게 나온 바깥에서 안쪽의 상황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것.
“루나 펜드래곤,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이 상황이 너무나 무력하게 다가왔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처음에는 그저 형식적인 흑마법사 토벌.
그 대상은 미치광이의 그믐이라 불리는 루나 펜드래곤이었다.
하지만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저 잠깐 바람을 쐬고 온다는 기분으로 나섰었다.
실제로 루나를 토벌할 마음은 그렇게 크지 않았으니까.
‘이브 밀레니엄.’
필생의 숙적.
자신과 그녀를 지칭할 때 사용되는 단어였다.
분명 그랬을 터였다.
‘그녀도 원해서 그런 건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빚을 지고 말았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루나를 놔뒀었다.
실제로 루나가 사고를 친 경우도 지금까지 없었고.
‘이곳에 들어오며 또 변했지.’
이 기상천외한 공간에서 끝없는 반복을 경험하며 묘한 감정이 생겼다.
그것은 미혹.
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지금까지의 삶에 의문이 들었다.
분명 절대적인 악이라 상정했던 검은 연기들이 신의 부산물이라 들었을 때는 믿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고개를 치켜드는 불온한 생각들이 선과 악에 대한 정의를 흔들어 놓게 되었다.
‘뭐가 나쁘고 뭐가 착한 거지? 애초에 한낱 인간에 불과한 내가 선악을 나눌 수 있는 건가? 나눌 수 있다면 그 기준은?’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은 흑마법사들에 대한 견해도 뒤흔들었다.
이미 예전에 그토록 혐오하던 흑마법사에게 구원까지 받았던 몸.
게다가 이 반복되는 공간에서 흑마법사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인성이 악하지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특히 루나 펜드래곤의 순수함은 선과 악으로 따질 수 없었다.
또한 함께 지내며 진짜 이름을 알게 된 아드리아스 크롬웰도 전혀 악한 이가 아니었다.
‘모르겠다.’
그래서 결국 도출해 낸 결론이 빛이었다.
자신은 빛을 따를 것이다.
신도 의미 없다.
오로지 빛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리.
‘성국에 돌아가면 모든 걸 반납하고 떠나겠다.’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일들도 과연 선이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동안의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기분.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에 의해서.
그렇기에 회귀 초반에는 너무나 괴로웠다.
반대로 말하면 회귀 덕분에 생각할 시간이 많아 간신히 심마를 다스릴 수 있었고.
‘그러나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에반의 시선이 도시 내부로 향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원래였으면 안개로 가려졌을 도시의 외벽 위.
알 수 없는 힘의 작용으로 안쪽으로 들어갈 수 없었는데 오러 비기로도 뚫리지 않아 허망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제발, 루나를…….’
그가 루나를 구해 주기를 원했지만 회의적이었다.
자신이 죽인 드래곤 근처에서 생성된 알 수 없는 빛무리.
추측하건대 아마 저게 텔레포트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없어지려 하고 있다.’
빛무리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 누구라도 이 광경을 본다면 탈출부터 생각할 터.
게다가 루나를 감싼 검은 연기들은 이미 상대해 본 적이 있기에 얼마나 까다로운지도 알고 있었다.
저 연기들을 뚫고 루나를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겠지.
‘그래도 내가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드리아스 크롬웰과 힘을 합치면 그녀를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신은…… 선이 아니야.”
신은 너무나 중립적이었다.
인간 시선에서의 가치가 무의미한, 그저 자연과 같은 존재.
그걸 알고 있지만 인간인 자신은 신이 원망스러웠다.
지금보다 원망스러웠던 적이 없을 정도였다.
이제 더 이상 루나가 버티지 못하고 검은 연기들이 날뛸 때, 결국 에반은 절망하고 말았다.
“오러 마스터라는 허울이 의미가 없다.”
벌써 두 번째 겪는 절망.
오러 마스터면 뭐하나. 아무 힘도 보태지 못하는데.
그렇게 자신의 나약함에 좌절하고 있을 때.
빛이 쏟아졌다.
“아?”
검은 왕관을 쓴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강렬한 시선으로 빛을 뿜었다.
에반의 눈에 비친 왕관을 착용한 아드리아스의 모습은.
검은 연기에 대한 두려움조차 없이, 그저 당당하게, 모든 것을 자신의 아래로 보듯…….
그것은 가히 제왕의 풍모였다.
“아아…….”
언젠가 로들렌의 황제를 보았을 때는 그저 기운만 조금 강한 인간임을 확인하고 실망을 금치 못했었는데.
“왕이시여…….”
검은 왕관을 쓰고 빛에 둘러싸여 그 빛들을 시종처럼 부리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왕의 재림이었다.
* * *
루나와 함께 포털을 타고 건너가자 희한한 풍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에반?”
에반 폰 오를레옹.
그가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왜 저러지? 미친 건가?’
간신히 던전을 클리어했더니 미쳐 버렸다고?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이 기우였다는 듯 에반이 말했다.
“두 분 다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그래도 던전을 벗어난 순간 조금은 어색해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근데 이후로 이어진 에반의 행동이 다시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다.
“저는 빛을 따르겠습니다.”
무릎을 꿇고 마치 선서를 하듯 말하는 그를 루나와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바라보기만 했다.
“에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나요?”
어쩌면 이 바깥에서도 회귀를 겪은 건가?
그래서 결국 미쳐 버린 건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그저 왕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갈수록 알 수 없는 말만 해 대는 탓에 머리만 아팠다.
뭔 일이 있긴 있었나 본데 지금은 지쳐서 상대하기가 싫네.
“에반! 어디 아파?”
루나가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의 어깨 위에 있던 룰프도 에반을 삿대질하며 울어 댔다.
“맞습니다. 저는 아픈 걸지도 모릅니다. 신념의 썩은 부분을 도려냈으니 아플 수밖에 없군요. 하지만 도려낸 부분만큼 새로운 희망을 보아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합니다.”
도저히 해석이 되지 않아 나와 루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까 이곳은 도시의 외벽 위였다.
저 멀리 조금 전까지 격전을 치렀던 장소가 보이는데 이제 어디로 가면 되지?
“일단 나가는 길부터 찾죠.”
쉬는 건 나가서 쉬자.
일단은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루나와 에반도 순순히 내 말을 따라 주었다.
아마 나랑 같은 생각이겠지.
이 지긋지긋한 던전에서는 잠시라도 더 있고 싶지 않다.
또 무슨 일이 생길 수도 있는 노릇이고.
“저거!”
외벽을 따라 빙 둘러 걷자 뜬금없는 문이 하나 보였다.
그런데 문의 생김새가 익숙했다.
“처음 들어온 문!”
“맞군요.”
나무로 된 아치형 문이었다.
그 문을 보자 드디어 탈출이라는 생각에 긴장이 조금 풀렸다.
‘보상 방은 없는 건가? 뭐, 상관없지.’
지금은 보상이고 뭐고 나가는 게 우선이니까.
애초에 게임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히든 던전이기에 다른 던전들과 똑같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잠깐만.”
나무 문에 다가가 문을 열려고 할 때, 루나가 갑자기 도시 방향을 바라봤다.
그리고는 양손을 부여잡고 기도를 하듯 고개를 숙였다.
“불쌍한 영혼들. 다음에 다시 와서 꼭 없애 줄게.”
영혼과 교감이 가능해서일까.
나는 전혀 생각도 못 한 행동을 한 루나는 이내 우리를 보며 미소 지었다.
“끝났어! 가자!”
“다시 올 거라고요?”
“응! 어어어엄청! 강해져서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면 그때는 이 불쌍한 영혼들을 다 없애 줄 거야.”
없애는 게 좋은 거겠지?
하긴 나도 저 공간에서 영원히 반복된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했다.
솔직히 영혼이라는 것도 무슨 원리인지도 모르겠고, 루나가 알아서 하겠지.
“그럼 나가 볼까요?”
나무 문을 열고 또다시 펼쳐진 검은 공간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거짓말처럼 느껴졌다.
그동안 매일 스쳐 지나오며 아무렇지도 않게 여겼던 모든 게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선배, 괜찮아요?”
“뭐가?”
“그냥 좀……. 분위기가 약간 바뀐 것 같아서요.”
지금 나는 아카데미로 돌아가는 열차를 타고 있었다.
내 맞은편에는 돌아오는 길에 방문한 홀링턴 영지에서부터 함께한 루시아가 있었다.
“그래? 난 모르겠네.”
“방학 동안 별일 없었다고 해 놓고, 별일 있었던 거죠?”
있었지.
하지만 말하기에는 애매하고.
2주 전쯤에 던전을 탈출한 나와 루나, 그리고 에반은 바야트라 요새로 돌아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작 열흘?’
에반의 놀란 음성이 아직도 생생했다.
평소에 점잖은 말투로 경어를 쓰는 에반이 놀라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다니는 모습은 확실히 볼만했지.
우리가 던전에서 보낸 시간은 적어도 연 단위.
애초에 계속 같은 하루가 반복되고 하루를 온전히 지낸 적도 드물기에 정확히 셀 수는 없었지만 고작 열흘이 지났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해야지.’
정말로 그 시간만큼 바깥의 시간도 흘렀으면 이미 세상은 난리 통이었을 거다.
그전에 준비를 마치고 플레이어블의 성장을 도와야 하는 나로서는 정말 다행이지.
에반과는 그랑디스 왕국에서 헤어졌다.
그는 성국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다며 사라졌는데, 사라지기 전에 한 말이 의미심장했다.
‘기다려 주십시오. 반드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 말의 의미를 물었지만 에반은 그저 정중한 미소를 지으며 사라졌었지.
다시 돌아온다는 게 뭔 소린지 모르겠네.
게다가 이제 내 정체를 아는 에반인지라 불안한 마음도 있었고.
그래도 그의 실력을 알고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저 그동안 함께 해 온 정으로 선처를 바랄 뿐이지.
‘애초에 죽일 생각이 있었으면 당장에 죽였겠지.’
그리고 그는 사라지기 전까지 계속 호의적이었다.
가끔씩 왕이니 뭐니 알 수 없는 소리를 해 댔지만 던전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했었다.
‘루나도 다음에 다시 보기로 약속했는데, 언제 볼지 모르겠네.’
루나와 약속한 게 많았다.
그리고 그녀의 슬픔과 외로움을 알고 있는 나는 그녀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외모만 조금 평범했으면 같이 지낼 방법이 있었을 텐데.’
일단은 은신처로 돌아가 있기로 한 그녀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 또 생각이 깊은 것 같아 더 안쓰러워 보였다.
그렇기에 루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홀링턴 영지에 도착했을 때도 고민 중이었다.
그 고민은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중이었고.
“선배! 거의 다 왔어요!”
“그러네.”
시간상으로는 2달 조금 안 되는 시간에 복귀를 했지만 내게는 무려 몇 년 만에 돌아온 기분을 들게 했다.
그 괴리감에 조금 헛웃음이 나올 때.
“연결됐다. 어?”
아카데미 부지에 들어오자마자 태블릿을 꺼내 든 루시아가 뭔가를 보고 놀랐다.
“선배, 선배 기숙사가 물푸레 기숙사였죠?”
“어, 왜?”
“지금 폐관됐는데요?”
“폐관?”
폐관…… 폐관!
나는 그녀가 들고 있던 태블릿으로 그 소식을 곧바로 읽었다.
불가사의한 사건이 지속적으로 발생, 현재까지 학생 2명이 숨지고 여러 사고가 일어남?
‘벌써?’
짐작하고 있던 일이었지만 시기가 빨랐다.
사실 얼마 전에 있던 히든 던전의 후유증이 너무 컸던 탓에 생각도 못 하고 있었던 일인데.
‘오히려 잘됐네.’
악연을 끊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