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신성 출현
아드리아스는 단 한 번의 휴식도 없이, 마치 자신을 극한으로 내모는 사람처럼 결투를 이어 나갔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엔데버 진영 측은 환희에 불타올랐다.
“저건 대체 무슨 검술이지? 중검, 쾌검, 환검이 다 섞여 있잖아?”
“저런 인물이 아직까지 명성이 없었다는 게 의문이네. 혹시 아는 사람 없어?”
필리온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하며 유심히 결투를 지켜보았다.
벌써 다섯 번째 결투.
아드리아스는 우악스러운 족장의 손아귀를 피하며 자연스레 그 손에 상처를 남겼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의 검에 상처를 입는 순간부터 오크들은 빌빌거리기 시작했다.
‘저 검이 유물이라도 되는 건가?’
필리온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그의 몸놀림은 오크 족장에 비해 전혀 딸리지 않는다는 것과 예측할 수 없는 검술로 상대를 농락하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 모습이 정형화가 된 기사의 검이라기보다 본능적인 검으로 보였으나, 언뜻 보이는 기술들은 꽤 뛰어난 검법을 사사했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끝내 다섯 번째 상대마저 쓰러트린 아드리아스가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내며 말했다.
“다음.”
“와아아아!”
예상치 못한 그의 활약.
병사들은 그런 그의 모습에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동안 오크들에게 당하기만 했던 병사들은 이번 결투가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무려 오크 족장이었다.
한 부족의 대장, 그 말은 즉 인간으로 따지면 기사 단장과도 비슷한 위치.
물론 기사 단장이 더 강한가, 오크 족장이 더 강한가는 따질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여기 모여 있는 병사들이 수십 명이 뭉쳐도 이길 수 없는 존재임은 확실했다.
환호가 끝나지 않자 알-구르드의 표정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
그 광포한 웃음은 성벽 위에서 울린 환호성조차 묻힐 정도였다.
바로 앞에 선 아드리아스는 그 웃음에 담긴 마나로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알-구르드의 웃음소리로 환호가 끊겼다.
이내 한참을 웃던 그는 웃음기를 거두고 아드리아스를 자신의 철퇴로 가리켰다.
―베리 샌더스! 그대는 정말 놀라운 전사다! 얕잡아 봤던 것을 사과하며 경의를 표하지. 그대의 움직임은 우리 오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어.
인간들로서는 칭찬인지 욕인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은 알-구르드는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인지 진지한 표정이었다.
―명예를 아는 전사여, 앞으로 남은 넷도 그대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나는 알 수 있다.
쿵!
그는 자신의 철퇴를 바닥에 내려찍으며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본 후 아드리아스를 바라봤다. 그 행동이 오크가 타인을 인정할 때에만 사용하는 행동임을 안 아드리아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우리는 결투를 무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연이어 다섯을 상대했으니 쉴 시간을 조금 주도록 하지.
알-구르드의 말이 끝나자 마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나머지 오크들도 아드리아스를 향해 경외심이 담긴 행동을 취했다.
쿵. 쿵. 쿵. 쿵!
그 모습에 엔데버 측의 사람들은 묘한 감동을 느꼈다.
비록 적이었지만, 그런 적에게까지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보자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던 아드리아스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게임이나 실제로 만나온 초인들은 성격이 정상인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이 오크 로드는 무려 오러 마스터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간들보다 나아 보였다.
“호의는 고맙지만 사양하지.”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돌려 엔데버 요새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마치 당장에라도 내려올 듯 흥분한 모습의 루나가 있었다.
“빨리 끝내야 할 것 같거든.”
―좋다. 그대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결투를 속행하겠다.
다시 결투가 재개되었고, 성벽 위에 사람들도 이제는 별걱정 없이 아드리아스를 지켜보았다. 오히려 이미 승리를 점치고 다른 요새들을 향해 지원 요청을 보낸 참.
“세상은 넓고, 기인들은 많군요.”
“항상 조심해야 하는 이유지.”
필리온과 도슨의 말을 들으며 주변에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히 루나 펜드래곤의 지인으로만 알고 있던 사내가 이리 강할 줄은 여기 있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으니.
―크흐으.
털썩.
마침내 마지막 남은 오크 족장을 쓰러트린 아드리아스가 검에 묻은 피를 닦아 내자 엔데버 요새 측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베리 샌더스!”
“베리! 베리! 베리!”
다시 한 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늦은 새벽이라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열기가 군중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울려 퍼지는 환호를 들으며, 순간 뭔 소리인가 싶던 아드리아스는 이내 그게 자신의 가명이라는 것을 알고 쓰게 웃었다.
알-구르드는 주변에 쓰러진 족장의 시체들을 보더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 기쁜 마음을 가지고 영원한 전투의 땅으로 떠났을 것이다. 명예로운 전사여, 그대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구나.
“너도 제정신이 아니군.”
―우리의 풍습을 이해하길 바라지는 않는다. 그저 내 진심을 전할 뿐이지.
알-구르드는 그리 말하고는 자신의 철퇴를 한쪽 어깨에 얹으며 떠날 준비를 했다.
―젊은 전사여, 만약 그대가 이번 전쟁에서 무사히 살아남는다면, 그대는 훗날 나와 비등한 전사가 되겠지. 인간들은 대단하군. 그런 몸뚱이로 용케 나와 같은 대전사가 될 수 있다니.
그 말을 들은 아드리아스는 그저 조용히 알-구르드를 마주 보았다.
인간의 검은 눈동자가 오크의 붉은 눈동자를 짙게 응시했다.
잠시 조용히 서로를 바라본 아드리아스와 알-구르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소를 지었다.
―크흐.
알-구르드는 겁 없는 인간 전사에게 감탄을 하며 자신의 철퇴를 어깨에 짊어졌다.
―젊은 인간 전사여, 부디 전장에서 그대와 겨뤄 보길 바라겠다.
“미안하지만 넌 내 상대가 아니야. 네 상대는 따로 있어.”
―흐흐. 그런가? 기대하고 있겠다.
아드리아스는 그 말을 끝으로 알-구르드가 뒤에 있든 말든 몸을 돌려 요새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그의 길을 수많은 요새의 사람들이 환호로 반겨 주었다.
“개문하라!”
“하지만 아직 오크 로드가 바로 앞에…….”
“괜찮다. 그리고 녀석이 우리를 공격할 거였으면 진즉 공격하고도 남았을 거다. 오러 마스터에게 성벽이 유의미할 거라고 보는 거냐?”
도슨은 자신의 아들에게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소리쳤다.
“개문하라! 영웅을 맞이해라!”
“베리 샌더스! 우리의 영웅!”
“베리! 베리! 베리!”
엔데버 요새는 모두가 잠들 새벽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드리아스의 예상대로 이번 일기토는 그들의 사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그가 요새의 문을 통해 들어오자 병사들뿐만 아니라 요새 안의 시민들이 나오며 그를 환영했다.
‘나이가 결코 많아 보이지 않는데, 괴물 같은 실력이군.’
필리온은 복면 때문에 제대로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아드리아스가 오크 족장을 이기는 것을 보고 큰 충격에 빠졌다.
만약 그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다면 알-구르드가 했던 말대로 오러 마스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보였다.
‘대륙의 새로운 신성인가.’
여러모로 전율이 흐르는 밤이었다.
* * *
알-구르드는 약속대로 하루의 유예를 주었다.
그동안 미리 연락했던 병력들이 도착했지만 엔데버 요새에서 한 가지 예측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총공세라…….”
오크들의 주력은 엔데버 요새 앞에 모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요새들도 공격받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도착한 병력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거기다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병력도 한정되어 있었기에 도슨의 이마는 깊게 고랑이 파여 있었다.
“일단 인선을 정하지. 남문에는 저번과 같이 내가 맡겠다. 필리온은 북문, 그리고 나머지 두 곳은…….”
잠시 말을 멈춘 도슨의 시선이 나와 루나에게 향했다.
“베리 샌더스, 동문을 맡아줄 수 있나? 지휘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저 그곳에서 오크들을 막아 줄 수 있나 묻는 거지.”
“보상만 확실하다면.”
“보상은 내가 장담하지. 이미 자네는 족장 아홉을 쓰러트린 전적이 있으니.”
마지막으로 루나에게 시선을 돌린 도슨이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다 말을 꺼냈다.
“루나 펜드래곤, 원하는 대로 날뛰어라. 오크 로드가 나타나면 바로 전령을 보내서 위치를 알려 주마.”
“응, 슬슬 지루해지는데 잘됐다. 그치, 친구야?”
루나의 물음에 쓰게 웃어 주었다.
저번 결투 당시에 나만 재미를 봤다고 얼마나 구박했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 당시에 가만히 있어 줘서 고맙긴 하지.
‘오크 로드한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으니까.’
딱히 오크 로드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오크 로드랑 한판 붙어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애초에 그녀는 오크 로드의 소식을 들었을 때, 그 영혼으로 내게 각인을 해 주겠다며 본인 일인 것처럼 기뻐했다.
‘나야 고맙지. 오러 마스터가 흔한 것도 아니고.’
오크인 건 조금 거슬리지만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오러 마스터의 영혼을 각인하면 그 정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지.
영혼 각인은 말 그대로 영혼을 각인하는 시술이었다.
강령술과 비슷한 효능을 영구적으로 얻는 거라 보면 됐다.
물론 영구적인 효력을 발휘하는 만큼 강령술보다 효과가 떨어졌다.
한 명에게 단 하나의 영혼만 각인할 수 있었는데, 내가 알기로 루나는 자신의 어머니인 이브 밀레니엄의 영혼을 각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덕분에 이브 밀레니엄이 사령하던 영혼들을 물려받을 수 있었지.’
나와 비슷한 나이임에도 명성이 자자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전설적인 마녀인 이브 밀레니엄의 힘을 그대로 계승한 거나 마찬가지이니.
솔직히 말하면 이브 밀레니엄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나도 몰랐다.
게임 속에서는 간간이 거론되는 이름이긴 하지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엄청 강했구나 싶은 감상만 느낄 정도였다.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알-구르드를 잡지 못하면 영혼 각인은 물론이고 대수림도 못 들어가니.’
그랑디스 왕국에 막 도착했을 때는 이렇게 일이 꼬일 거라고 생각도 못 했었는데.
하지만 이번 일을 이겨 내면 나는 훨씬 강해질 수 있다.
‘알-구르드의 오러 비기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루나가 쉽게 이길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처음에는 오크가 오러 마스터라기에 조금 얕본 것도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마주해 본 결과, 전혀 만만한 상대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웃음만으로도 속을 진탕시킨다니 괴물이 따로 없지.
물론 나 정도니까 버틴 거고,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피를 토해 냈을 거다.
땡! 땡! 땡! 땡!
“시간이 됐군. 일단은 나가지.”
이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다급한 종소리가 요새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다 함께 밖을 나와 성벽 위로 올라간 순간.
“허…….”
누군가의 탄식이 귓가에 들려왔다.
하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못했다.
녹빛 물결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엔데버 요새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대수림이 직접 몸을 일으켜 다가오는 것과 같은 착시를 만들었다.
사체들이 들끓는 전장의 땅 한가운데에서.
오크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수많은 오크들을 보며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단 하나였다.
이건 나를 위한 전장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