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얽혀 드는 집회
불타오르는 마을은 실시간으로 살육의 현장이 펼쳐지고 있었다.
죽어 가는 마을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수인들이었다.
“끄아악!”
“죽어!”
하얀 정복 위에 체인-메일을 입은 병사들이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소속을 드러내는 듯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붉은 태양의 모습이었다.
“모두 죽여라! 이단 녀석들을 단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피에 젖은 창칼이 늘어지고 바닥은 피의 강을 이루었다.
화마가 휘몰아치는 가운데에 이번 일의 책임자이자 지휘관인 에반 폰 오를레옹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에반 성기사님, 정리가 거의 다 끝난 듯합니다.”
“잘했습니다. 이단의 시체들은 한군데 모아서 모두 불태우도록 하세요.”
병사들을 시켜 모든 것을 불태우게 한 에반은 그 끔찍한 광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보고 있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화마와는 반대로 검게 칠해진 하늘은 이름 모를 별들이 쏟아질 듯 박혀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는 세 개의 달이 또렷한 존재감을 드러내며 에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날이군요.”
꿈에서 나온 빛의 인도에 따라 성기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날로부터 40년.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들을 동경했다.
물론 이 이단들을 정화시키는 불꽃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에반 성기사님, 성국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한 병사가 부르는 말에 에반은 불빛들을 감상하던 걸 멈추고 몸을 돌렸다.
병사가 내주는 통신기를 받은 에반은 곧바로 말했다.
“카시온 성국 제 3 이단 심문관, 성기사 에반 폰 오를레옹 연락 받았습니다.”
―에반 경, 수고가 많네.
들려오는 목소리는 성국의 실세이자 헌신의 추기경이라 불리는 고드릭 헌트였다.
나이가 벌써 90을 넘겨 세간에서는 오늘내일한다고 하지만 에반은 고드릭이 죽어 흙이 되는 것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이나 성국의 권력을 꽉 쥔 채 주무르고 있는 실세였다.
“오랜만입니다, 추기경님.”
―하는 일은 잘돼 가고 있나?
“마무리 단계입니다.”
―그, 에반 경이 직접 나서기에는 너무 자잘한 일이었던 것 같아.
“신의 이름을 대리하며 큰일, 작은 일 나눌 수야 없지요.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입니다.”
―역시 에반 경은 믿음직스럽군.
겉치레식 인사가 끝나고 고드릭이 운을 뗐다.
―다름이 아니라, 최근 흑마법사들의 동향 말일세.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루나 펜드래곤이 출현했다는 소식일세.
루나 펜드래곤.
전대에 활동한 전설적인 마녀, 이브 밀레니엄의 셋째 딸.
이미 태어나는 순간부터 괴물로 성장하는 것이 점찍어진 예언의 아이.
그리고 에반이 담당하는 흑마법사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조용하다 싶었는데 그새를 못 참고 기어 나온 모양이군요.”
―이번에는 부디 그분의 이름으로 제대로 정화시켜 주게.
성국의 4명뿐인 오러 마스터이자 이단 심문관인 에반은 특유의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의 빛으로 인도하겠습니다.”
* * *
“네가 아카데미 밖으로 안 나와서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거리낌 없이 다가오며 말하는 루나는 이전에 모르셰의 둥지에서 보았을 때와 변함이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주변의 동향을 살피며 몸의 긴장을 끌어올렸다.
굳이 루나를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나도 같은 흑마법사니까.
하지만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반응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응? 대답 좀 해 봐, 아드리아스 크롬웰. 널 보려고 내가 여기까지 따라온 거란 말이야.”
“절 왜 따라오신 거죠?”
“네가 카일러를 죽였잖아.”
태평하게 말하는 루나를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경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위험한 상황인가?
‘카일러를 죽인 걸 루나가 확인했구나.’
그녀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내가 죽인 걸 확인할 수 있었겠지.
의문인 점은 굳이 왜 그녀가 직접 나섰냐는 거다.
카일러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은 아닌 걸로 알고 있는데 굳이 루나가 직접 움직였다는 점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루나 펜드래곤이 움직일 줄 알았으면 나도 조금은 조심했겠지.’
계산 밖의 인물의 등장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재미없어.”
“예, 제가 카일러를 죽였습니다.”
이미 밝혀진 사실을 숨길 필요는 없지. 그리고 난 떳떳했다.
흑마법사들끼리 죽이면 안 된다는 조항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물론 집회 소속 흑마법사를 죽였으니 그건 좀 곤란하긴 하다.
괜히 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소속감을 만든 건 아니니까.
어쨌든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시인하자 루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알고 있다니까? 그것보다 굳이 여기까지는 왜 온 거야? 놀러 왔어?”
나야말로 묻고 싶다.
도대체 그럼 왜 내 뒤를 쫓아왔는지.
반응을 보면 딱히 적대적인 것 같지는 않은데 카일러를 죽인 내 뒤를 왜 굳이 뒤쫓은 거지?
“찾아야 할 물건이 있어서요.”
그렇게 대답하며 주위를 둘러보자 역시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몰려 있었다.
루나의 외모가 워낙 눈에 띄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애초에 그녀는 유명인.
단지 아무 일도 없는 것은 이곳이 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랑디스 왕국은 흑마법사에 대한 인식이 그리 나쁘지 않지.’
물론 불법적인 일이 금지된 건 당연했다.
하지만 흑마법이라고 항상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는 것은 아니라서 딱히 범법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오히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그들로서는 흑마법사들의 전력조차 귀중하게 여기기에.
“무슨 물건? 나도 따라가도 돼?”
“그전에 하나만 물어봅시다. 왜 절 따라오신 겁니까?”
“심심해서. 그리고 헤이겔이 보고하라고 했거든.”
헤이겔이 보고를 하라고 했다고?
이런 걸 숨기지 않고 말을 하는 걸 보면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린 것 같기는 하다.
“대답했으니까 따라갈게?”
솔직한 심정으로는 거절하고 싶었다.
아무리 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그랑디스 왕국이라 하더라도 루나 펜드래곤과 함께 있었다는 목격담이 퍼지면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거절한다고 내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은데.’
저 성격 하며 행동 하며, 내가 싫다고 해도 내 말을 무시할 게 뻔했다.
일단 말이나 꺼내 볼까.
“죄송하지만 전 혼자 여행을 하고 싶은데요.”
“뭐? 내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따라갈 거야!”
루나 펜드래곤은 복불복이 심한 능력을 사용하지만 기본적으로 오러 마스터도 두려워하지 않는 실력자. 그런 그녀에게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서 날 알고 있는 사람도 없을 테니…….’
더 이상 거절했다가는 무슨 돌발 행동을 할지 모르니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절 따라오는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영혼 각인을 받고 싶습니다.”
내 말에 루나는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민에 빠진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거 귀찮은데…….”
“당신이 절 따라오는 것도 제게는 귀찮은 일이죠. 정당한 대가를 바라는 겁니다.”
우선은 통 크게 질렀다.
크게 질러야지 그 이후에 작은 부탁을 했을 때 들어줄 확률이 올라가니까.
영혼 각인은 지금은 사장되고 루나 펜드래곤만이 익히고 있는 기술이었다.
그 절차의 복잡함은 물론이고 루나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인 만큼 아무나 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성능만큼은 확실했다.
들어가는 재료부터 방법까지, 그리고 루나만 사용할 수 있다는 복잡함이 있지만 그런 과정을 충분히 감내할 만큼의 기술이었다.
그런 걸 무슨 배짱으로 부탁했냐고 묻는다면, 루나의 나사 빠진 듯한 행동에서 기회를 엿봤다고 해 주겠다.
‘일단 찔러보는 거지. 안 되면 말고.’
하지만 고민하는 듯한 루나의 모습을 보면 괜히 희망이 생긴다.
진심으로 고민하는 것 같은데?
한참을 고민하던 루나는 다시 나를 찡그린 얼굴로 올려다보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꿍얼거렸다.
“영혼 각인은 너무 귀찮은데.”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보면 어지간히 귀찮은 작업인가 보다.
그래도 왠지 모르게 가능성이 보이는 것 같아 오히려 내가 안달이 났다.
“그러면 이렇게 하죠.”
“어떻게?”
“저를 따라오시는 거에 덤으로 루나가 원하는 걸 한 가지 들어드리겠습니다. 대신 제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서요.”
내 제안에 심드렁한 표정을 짓던 루나는 이내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그럼 내 친구가 돼 줘.”
“예?”
너무나 의외의 부탁이라 어안이 벙벙했다.
“친구가 돼 주면 영혼 각인 새겨 줄게. 친구가 되면 내가 따라가는 것도 안 귀찮잖아? 나도 친구를 위해서 영혼 각인 해 줄 수 있는 거고!”
루나의 사고방식을 따라가기 힘들었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내게는 이득이었다.
허울 좋은 친구라는 명목에 영혼 각인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니.
“알겠습니다. 친구가 되겠습니다.”
“좋아! 이제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내 친구야!”
루나의 말에 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래도 밤이라서 사람이 많지 않아 다행이지, 사람 많은 곳에서 저런 말을 했으면 난처할 뻔했다.
“친구! 궁금한 게 있어!”
“예, 말씀하세요.”
“카일러를 죽인 걸 보고 궁금했는데,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강해진 거야?”
루나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 왔다.
“최근에 봤던 네가, 카일러를 죽일 정도로 강하지는 않았단 말이야? 도대체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렇게 강해진 비결이 뭔가 궁금해졌어. 친구니까 알려 줄 수 있지?”
“노력을 했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걸 믿냐?
루나랑 대화를 하다 보니까 나도 정신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우선 가려던 여관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저희 방부터 잡을까요?”
루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여관을 향해 걸었다.
어딘가 조금 이상했지만, 그런 그녀가 두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영혼 각인까지 해 준다는데 감사하다고 절해도 부족하지.
여관을 향해 걸어가면서도 꽤 많은 시선이 쏠렸는데, 아무래도 루나의 외모와 유명세가 내 생각보다 훨씬 이목을 집중시키는 모양이었다.
시선은 여관에 들어와서도 지속됐다.
주점 겸 식당을 함께 운영하는 여관이었는데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내 옆에 나란히 선 루나를 보며 조용해졌다.
“방 두 개. 그리고 식사까지 부탁드립니다.”
“예, 예. 식사부터 하실 겁니까?”
“밥부터!”
루나가 데스크에 턱을 받치며 소리쳤다.
다리를 까딱거리는 모습이 마치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여관의 주인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한쪽에 있는 테이블을 가리켰다.
“저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식사를 내오겠습니다.”
그가 가리킨 테이블에 앉은 나는 힐끗힐끗 쳐다보는 부담스러운 시선을 무시하고 루나의 모습을 살폈다.
어디 아픈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창백한 피부, 백은발의 머리카락과 눈썹은 마치 요정과 같은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오팔과 같이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는 눈은 신비로운 분위기에 정점을 찍었다.
“아, 맞다.”
루나는 천진하게 주변을 둘러보며 여관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통신기?’
통신용 아티팩트였다.
누구한테 연락하려고 하는 거지?
딸칵.
“헤이겔! 나야, 루나.”
―루나 펜드래곤, 꽤 일찍 연락했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헛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응, 지금 아드리아스 크롬웰 만났어. 예상했던 대로 아드리아스가 카일러를 죽였어!”
―……설마 지금 옆에 있는 건가?
“응!”
나도 어이가 없는데 헤이겔은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을까.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수화기 너머로 헤이겔이 간신히 입술을 떼는 게 느껴졌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지금 옆에 있는 건가.
“아드리아스! 헤이겔이 너 찾는다.”
태평하게 통신기를 건네는 루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
일단은 그녀가 건네는 통신기를 받고 대답했다.
“아드리아스입니다.”
―정말이군. 조금 당황스러운데.
헤이겔의 솔직한 감정 표현은 묘한 동질감을 만들었다.
나도 지금 엄청 당황스럽거든.
―이왕 이리됐으니 한 가지 물어보지. 최근에 라녹스를 죽인 것도 네가 한 짓인가?
헤이겔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일단은 그와 척을 지는 게 좋아 보이지는 않았으니까.
“라녹스가 누군지 모르겠군요.”
―그런가. 하긴 녀석은 크라테스 산맥에 살았으니 네가 거기까지 갈 이유가 없지.
그렇게 잠시 어색한 분위기가 조성되며 적막에 휩싸였다.
마침 음식이 나온 탓에 루나는 나와 헤이겔은 신경조차 쓰지 않고 배를 채우는 데 집중했다.
―카일러를 죽인 일은 유감스럽군. 녀석은 내 동료였거든.
헤이겔의 말은 언뜻 무미건조했다.
정말로 유감스럽다기보다는 내게 경고의 의미로 말하는 느낌이었다.
―이미 죽은 인물을 두고 자네를 뭐라 할 수는 없겠지. 자네도 나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서 그와 싸운 것일 테니.
“카일러가 당신의 수하였습니까?”
―수하? 음, 방금도 말했지만 굳이 말하자면 동료라고 하지.
수하인지 아닌지는 솔직히 상관없었다.
일단은 헤이겔과 굳이 척을 지고 싶지는 않았다.
여러모로 번거로운 상대이기도 하고, 지금 당장 워록급의 흑마법사를 내가 상대할 수는 없었으니까.
“일단 사과드리겠습니다. 당시에는 제 정체가 발각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손속이 과했습니다.”
―괜찮네. 조금 전에 말했지만 이미 죽은 인물로 자네를 뭐라 할 수는 없지. 근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
“아쉬운 점?”
―아카데미의 교수직으로 몰래 사람을 심어 놓는 일은 굉장히 번거로운 일이야. 근데 이번 일로 검문이 강화돼서 다시는 시도하지 못하게 됐거든. 자네의 스승인 카론은 굳이 따지자면 제스터 녀석의 휘하라 내 정보통만 부서진 셈이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말을 늘릴까.
아쉽다는 표현을 하는 걸 보면 내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말인데, 아드리아스.
조금 뜸을 들인 헤이겔의 목소리가 어느새 처음과 같이 시끌벅적해진 주점 안에서 또렷하게 들려왔다.
―자네도 집회에 가입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