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정리 그리고 히든 피스
미친 새끼들.
베리얼과 살렘이 싸움을 벌이자 든 내 첫 감상이다.
물론 누구라도 제국의 수배범인 걸 알면 공격하겠지만 베리얼은 그런 이유가 아닌 단순히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충분히 그럴 만한 캐릭터라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설마 아무 예고도 없이 선빵을 갈길 줄은 몰랐다.
‘그래도 결국 살렘이 이기겠지. 베리얼이 대단한 건 인정하지만 살렘은 대륙 최강자 중 하나라는 칭호가 붙는 괴물 중의 괴물.’
그 둘의 싸움은 여파만으로도 주변에 피해를 가했다.
결국 나는 루시아를 데리고 멀찍이 떨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콰과과광―!
계속해서 터져 나가는 폭음을 들으며 워록급 마법사들의 싸움을 보자 전혀 오러 마스터에 꿇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정도의 마법 활용도면 근접전조차도 위력적이었다.
“와아…….”
루시아가 넋이 나간 듯 화려한 전투를 구경했다.
생각해 보면 나중에는 내 옆에 있는 루시아가 저 둘보다 강해진다.
저런 괴물들보다 강해진다니 도대체 얼마나 강해지는 거지?
쿠구구궁!
콰지직.
저 둘도 진심으로 싸우면 사지 중 한쪽은 내줘야 한다는 걸 알기에 적당히 하는 것 같았다. 애초에 워록급 마법사들이 진심으로 싸우면 웬만한 도시 하나는 터져 나갈 정도로 그 파괴력의 여파가 엄청난데 비록 물러났다지만 아직까지는 시야에 남은 우리가 멀쩡한 걸 보면 말 다 했지.
‘오러 비기는 오리지널 마법하고 융합할 수 있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금방 지워졌다.
전투는 생각보다 싱겁게 끝이 났다.
살렘이 오른손에 새겨진 마법진을 발동시켜 단탈리온의 서를 소환하고, 각막에 새겨진 마법진을 발동시켜 책을 읽자 베리얼의 마법은 발동되기도 전에 모두 무산되었다.
‘근접전도, 원거리 요격전도 완벽에 가깝다. 역시 살렘이네.’
결국 베리얼이 두 손을 들며 졌음을 시인했다.
물론 진심으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었으면 단탈리온의 서로 인해 꼬인 술식을 풀어 가며 싸웠겠지만 베리얼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이 건방진 새끼야. 날 이기려면 한참은 멀었다.”
“하하. 역시 스승님이십니다.”
안 그래도 역량에서 차이가 나는데 살렘의 악마 소환 마법은 모순을 기원으로 한 오리지널 마법. 순수를 기원으로 둔 베리얼로서는 뒤집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순의 가능성을 보인 나한테 개인 교습을 해 주겠다면서 꼬신 건가.’
어쩌면 베리얼의 목적은 스승인 살렘을 뛰어넘는 것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살렘도 더 이상의 싸움은 득 될 게 없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마법진을 가라앉히고 원래대로 돌아왔다. 선빵을 맞은 살렘치고는 꽤나 양보한 셈이었다. 그만큼 베리얼과의 싸움이 꺼려진다는 뜻이겠지.
“오랜만에 몸 좀 풀었더니 상쾌하네요. 스승님도 10년 만에 보게 돼서 기분이 좋습니다.”
“지랄을 해라. 괜히 애들한테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난 간다.”
살렘은 그 말을 끝으로 정말 쿨하게 떠났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과 함께 엉망이 된 주변 광경이 묘하게 어울렸다.
떠나던 살렘은 갑자기 멈춰 서더니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새끼 조심해라.”
뜬금없지만 그 한마디만 남기고 진짜로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게 된 우리는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침묵을 지켰다.
“어쩌다 저희 스승님과 엮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어색하다고 생각했던 건 나만의 생각이었는지 베리얼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이미 살렘에게서 그가 나를 가르치는 이유를 들은 후라 조금 거북했지만 나도 그냥 받아넘겼다.
“예. 그런데 학부장님. 부탁 좀 해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루시아 에버라스트의 자퇴를 취소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 정도는 별것 아니지요.”
나는 일부러 그에게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부탁을 함으로써 혹시라도 베리얼이 자신의 목적을 들킨 것에 대해 무안해할 것을 방지했다.
무안해하는 성격은 아니겠지만, 일종의 암묵적인 거래였다.
‘베리얼이 나를 이용하려 한다면 나도 그를 이용하면 그만.’
게다가 게임 속의 지식이 있는 내게 오리지널 마법 하나쯤은 아깝지 않았다.
마법 실력만 늘어난다면 내가 가진 지식으로 언제든 만들 자신이 있었으니까.
지금 당장은 그의 도움을 받아 빠르게 실력을 향상시키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그, 감사합니다.”
루시아가 나와 베리얼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는 그 틈에 품속에서 중화제를 꺼냈다.
“이거 아직 완벽한 치료제는 아니고 상태를 조금 낫게 할 거야. 고통도 줄이고.”
“이런 건 언제…….”
“만들자마자 너한테 연락했는데 네가 자퇴했다고 들어서 깜짝 놀랐다. 앞으로 고민이 있으면 그냥 나한테 말해.”
그래야 관리하기가 편하지.
루시아는 언뜻 떨려 오는 손으로 내게서 중화제를 받더니 품에 안았다.
당장 마시라고 준 건데 그걸 왜 끌어안고 있냐.
“전 그런 줄도 모르고……. 고마워요. 선배.”
“자, 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슬슬 돌아가 볼까요? 여기 계속 있으면 아마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겁니다.”
조금 전에 일어난 살렘과 베리얼의 싸움은 인근에 위치한 도시에서도 그 소음이 들렸을 거다. 이제 도시 자경대나 제국 수사대가 오는 건 시간문제겠지.
이야기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 * *
흑마법의 재능이 진화한 것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나는 수재가 영재로 진화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카테고리가 변했다.
[흑마법(수재)]
뒤에 붙은 사령 계열이라는 단어가 빠지고 조금 더 포괄적인 재능으로 변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지만 오히려 좋았다.
어차피 수재에서 영재로 진화시키는 건 시간문제.
‘덕분에 카일러의 그림자 마법도 곧바로 응용할 수 있게 됐지.’
전투의 선택지가 늘어났다.
물론 당장은 카일러처럼 응용할 수는 없어도 점차 숙련도가 쌓이면 그와 같이 다룰 수 있게 될 거다. 아니, 오히려 카일러보다 잘 활용할 자신이 있었다.
‘이참에 한번 오리지널을……?’
오리지널이라고 무조건 어려운 마법이 아니었다.
말했듯 오리지널 마법은 일종의 고유 스킬트리라고 보면 되었는데 스킬트리 최하단에는 당연히 초급이나 하급 마법들도 포진되어 있었다. 그런 하급 마법들을 만들어 내는 건 지금의 나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이미 여러 마법사 캐릭터를 플레이 해 보며 수많은 오리지널 마법을 만들어 보았다. 물론 직접 만드는 것과 게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였지만 그 아이디어나 최종적인 이미지만큼은 남아 있었다.
‘카일러의 그림자와 모른의 흑마법서를 섞으면 꽤 나쁘지 않은 결과물이 나올 것 같은데.’
안 그래도 슬슬 페어리 퀸인 미리내를 언데드로 만들 생각이었다.
앞으로 있을 에피소드들을 위해서라도 전력 강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쩌면 괜찮은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해 보고 있었다.
“그래도 치료제가 먼저지.”
루시아의 자퇴 소동이 벌어진 지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나고 있었다.
나는 그동안 미리 포션 재능을 진화시켜 놨는데 진화한 포션 재능은 영재가 되었다.
덕분에 곧 있으면 루시아의 치료제에 대한 윤곽이 잡힐 것만 같았다.
‘적어도 중간 평가가 오기 전에는 성과를 보고 싶은데.’
첫 번째 플레이어블, 루이스가 아카데미에 와서 처음으로 겪게 되는 중간 평가.
게임이었던 세상답게 조금 작위적으로 1학년 기사학부와 4학년 마법학부의 합동 평가가 진행된다.
원래 같았으면 여기서 1학년 트리오와 디에네가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데 이미 교류회로 인해 루이스와 디에네는 안면을 튼 상황. 게다가 이때 일어났어야 할 흑마법 포션 소동이 조기에 종결되어 버렸다.
어쨌든 흑마법 포션 소동이 없어졌다면 그냥 평범한 평가가 될 것 같았는데 평가의 내용이나 일정은 모두 꿰차고 있었다.
‘앞으로 일주일 뒤면 중간 평가.’
이번 중간 평가는 일종의 예습이었다.
로들렌 제국에서는 매년 로들렌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이들에게 황궁에 존재하는 ‘탑’을 등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데 이번 평가는 그 탑을 열화판으로 구현한 시험이었다.
이를 통해 미리 ‘탑’을 경험하게 해 주려는 목적이었는데 이 열화판조차 아직까지 끝을 본 자가 없었다.
‘여기에 히든 피스가 숨겨져 있지.’
히든이라고 하기에는 딱히 숨긴 건 아니었다.
그저 그 난이도 때문에 그 누구도 끝까지 깬 적이 없을 뿐.
이 열화판 탑을 끝까지 정복하게 되면 이를 만든 초대 알븐 가주의 보상을 얻을 수 있었다.
‘지금의 나는 공략법을 알고 있다.’
수십 번은 치러 본 에피소드였다.
대부분의 플레이에서는 평가 도중에 흑마법 포션 소동이 일어나 끝까지 올라가지 못했지만 딱 한 번 이런저런 버그성의 운이 겹쳐 끝까지 올라갔던 적이 있었다.
대놓고 차려진 밥상이었다.
이 상황에서 숟가락도 뜨지 못하면 바보겠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시간을 확인해 보자 어느새 베리얼과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베리얼과는 서로 암묵적인 동의하에 개인 교습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의 목적이 대충 뭔지는 알았지만 이미 알게 된 이상 그다지 걱정할 건 없었다.
애초에 나는 이 세상 사람들과 달리 오리지널 마법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기원을 중심으로 마법사가 그간의 경험을 녹여 내어 창시하는 마법이 오리지널 마법. 그러나 그런 오리지널 마법쯤은 이미 게임 속에서 수십 개는 만들어 봤다.
다른 마법사들은 겪어 보지 못했을 수십 회차의 인생을 살아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흑마법사인 데다 재능도 떨어지지만 그건 시간이 차차 해결해 준다. 급할 건 없어.’
오히려 예정보다 훨씬 강해졌기 때문에 급한 마음은 없었다.
이렇게 밤낮으로 빡세게 구르는 건 그저 내가 이런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연구실의 문을 열자 언제나와 같이 베리얼이 대기하고 있었다.
“좋은 오후입니다. 아드리아스 학생.”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입꼬리만 올려 미소 짓는 베리얼은 여전히 적응하기 힘들었다. 아마 베리얼의 심정은 잡아먹을 가축의 살을 일부러 찌우게 하는 기분이겠지?
“예. 학부장님.”
“그럼 오늘은 개인 단련장으로 가 보도록 하지요. 이미 대부분의 이론은 습득하셨으니 이제 몸으로 체득해 보죠.”
“알겠습니다.”
이렇게 베리얼에게 배우다 보면 곧 마법과 관련된 재능을 얻게 될 것 같았다.
그동안 해 온 게 있으니까 슬슬 뭔가 나와 줬으면 하는데.
이왕이면 중간 평가 전에 능력을 성장시키고 싶었다.
공략법을 알고 있다지만 확실하게 가는 게 좋지.
‘새로운 포션들도 미리 준비하고, 할 게 많네.’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