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네 번째 기원
아드리아스의 말에 살렘이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드리아스의 상태가 멀쩡해지고 마치 단숨에 강해진 것만 같았다.
‘괴물 같은 새끼. 갑자기 뭐야? 각성이라도 한 거야?’
이거 루시아가 아니라 이 녀석을 데려가야 하나?
고려해 볼 만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발을 묶은 그림자를 단숨에 부숴 버렸다.
“아드리아스. 무모함과 용기의 차이는 알고 있지?”
“진심입니다. 살렘이 흥미를 가질 만한 정보를 제가 알고 있어요.”
자신감 넘치는 아드리아스의 말에 살렘이 정색했다.
다시 한 번 아까와 같은 살기가 대기를 진동시켰다.
“그 말 장담할 수 있겠냐? 입 함부로 놀리다 죽는 수가 있다.”
“신화시대의 신이 남긴 성서, 그게 어디 있는지 제가 알고 있습니다.”
아드리아스의 말을 들은 살렘이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봤다.
“신화시대? 신이 남긴 성서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신화시대의 유적지에 남겨진 성서.
아무 능력이나 효과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단 하나, 중요한 내용이 있었다.
‘네 번째 기원.’
원래라면 이 성서로 인해 새로운 기원이 발견된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되는 기원은 지금의 살렘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 필요 없다. 그보다는 이렇게 써먹는 게 훨씬 낫겠지.’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성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제국이었다.
남서쪽 국경 경계선에 닿는 이르바 호수에서 발견되는 성서는 처음에는 아무 효능도 발견되지 않아 그저 정치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신에게 선택받았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며 자화자찬하던 제국은 저 멀리 대륙 반대편에 존재하는 성국의 코털을 건드리며 도발을 하게 되는데 그러는 과정에서 연구 도중 새로운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발견된 기원은 ‘조화’였다.
‘살렘은 자신의 몸을 대가로 그 마법적 능력과 가치를 올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몸은 붕괴되고 있지. 만약 성서를 찾아 조화를 알게 되면 상태가 호전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제국은 아드리아스의 적과 마찬가지.
만약 성서를 살렘이 먼저 챙기게 되면 원래 주인이 되었어야 할 제국의 뒤통수를 때리는 셈이니 일석이조였다.
“고작 그거 가지고 자신만만했던 거냐? 널 그렇게 보지는 않았는데.”
“성서에 적힌 내용을 확인하시고 난 뒤에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직 거래를 받아들인 것도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네. 거기다 꼭 성서의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얘기한다?”
“무려 신화시대의 유물입니다. 평범할 리는 없겠죠. 물론 선택은 살렘의 몫입니다.”
아드리아스는 배짱을 내밀며 살렘의 결정을 기다렸다.
애초에 지적 욕망이 극에 달한 살렘이었다.
그런 살렘이 개인적인 욕망을 저버리고 루시아를 선택할 확률은 낮다는 게 아드리아스의 생각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살렘은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아드리아스 크롬웰. 예상을 벗어나는군. 그런 정보는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거지?”
“출처는 밝힐 수 없습니다. 거래를 받아들이고 루시아를 돌려보내 준다면 약속대로 위치를 알려 주겠습니다. 만약 말해 준 장소가 맞지 않다면 다시 돌아와 저를 죽이셔도 상관없습니다.”
덤덤한 아드리아스의 말에 진심이 느껴졌는지 살렘도 웃음기를 빼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살렘이 입을 열었다.
“부족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흥정을 하려는 것일까.
‘아니면 루시아의 가능성을 훨씬 높게 친 걸 수도 있겠어.’
솔직히 신화시대의 성서라고 하면 살렘이 뒤도 안 돌아보고 성서를 고를 줄 알았던 아드리아스였다.
그러나 나름 이해가 되기도 했다. 아무 정보도 없이 그저 신화시대의 성서라고 하면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게 당연하니까.
물론 걱정은 되지 않았다.
아직 자신이 가진 패는 무궁무진했기에.
‘하지만 너무 많은 정보를 풀면 살렘이 출처에 대한 의심을 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렇게 풀린 정보들로 일어날 나비효과를 감당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고.’
아드리아스가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의 표정을 살피고 있던 살렘이 말했다.
“아드리아스. 그럼 이렇게 하지. 일단 네가 정보를 주면 루시아는 놓고 갈게. 대신 네가 말한 두 달 안에 루시아를 치료하지 못하면 내가 다시 데려갈 거야. 어때.”
아드리아스의 걱정과 달리 살렘은 더 많은 걸 바라지 않았다.
대신 루시아와 성서, 둘 다를 원한 살렘이 절충안을 내놓듯 물었다.
살렘의 말에서 ‘네가 과연 두 달 안에 치료할 수 있을까?’와 같은 의미를 감지한 아드리아스는 자신 있게 미소 지어 보였다.
“예. 그렇게 하시죠.”
“건방진 새끼. 네 생각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와서 질질 짜지 마라.”
거래가 성립됐다.
살렘이 사악한 뱀을 헝겊에 감싸며 말했다.
“그래서. 그 위치가 어딘데?”
“지금 그냥 말해도 됩니까?”
아드리아스가 루시아를 보며 말하자 루시아는 자신의 귀를 양손으로 막았다.
그 모습을 본 살렘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그냥 말해. 어차피 네가 말한 장소에 물건이 없으면 그냥 내 손에 죽는 거야.”
“제국 남서쪽 국경 지대에 걸친 이르바 호수. 호수 한가운데를 중심으로 7시 방향에 수중 동굴이 있을 겁니다.”
꽤나 자세한 아드리아스의 설명에 살렘의 표정이 묘해졌다.
“들을수록 신기하네. 그런 건 어떻게 알아낸 거냐?”
“이건 절 잡아 죽인다고 해도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안 죽여, 인마.”
거래가 끝나자 이제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살렘이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아직까지도 두 귀를 막고 서있는 루시아를 보며 말했다.
“좋겠다. 저렇게 끔찍하게 챙겨 주는 남자 친구가 있어서.”
“나, 남자 친구 아니에요.”
“그럼, 그럼. 그렇겠지. 나 이제 가 본다. 예쁜 사랑해라.”
살렘이 등을 진 채 손을 흔들며 터덜터덜 걸어갔다.
동시에 아드리아스와 루시아는 긴장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해냈다.’
해냈을 뿐 아니라 아예 제국까지 견제하는 훌륭한 수 싸움에 성공했다.
이제 제국이 성서로 나대는 것도, 새로운 기원을 발견해서 강해지는 일도 없어졌다.
문득 루시아가 꼬물거리며 아드리아스의 눈치를 살폈다.
마치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곁눈질하던 루시아가 이내 입을 열려던 순간.
“뭐지?”
엄청난 압박감.
마나로 만들어 낸 진동이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었다.
길을 가던 살렘이 멈춰 섰고, 루시아도 느꼈는지 다시 바짝 긴장하는 기색을 내보이며 마나를 활성화시켰다.
멀리서 점처럼 보이는 인물은 이내 엄청난 속도로 가까워지며 그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베리얼!”
나타난 인물은 다름 아닌 베리얼 카스테로였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아드리아스와 루시아 그리고 멈춰 선 채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살렘을 순차적으로 둘러보더니 입을 열었다.
“이거, 이거. 여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이 망할 새끼. 유언은 그게 다냐?”
살렘이 말을 걸자 베리얼은 뱀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스승님.”
“스승님?”
루시아가 경악성을 내다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아드리아스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승님? 내 뒤통수를 치고 10년 만에 보면서 한다는 소리가 그게 전부냐?”
“부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솔직히 저와 같은 인재가 스승님의 실험 재료가 되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너 말 잘했다. 뭐? 실험 재료? 고아 새끼 먹여 주고 재워 주고 키워 주고…….”
“고문당하고 실험당하고 죽었다 살아나도 보고, 참 많은 경험을 했었지요.”
“고문? 실험? 이 새끼야. 그건 네가 강하게 만들어 달라고 해서 해 준 거잖아. 어디서 약을 팔아?”
“그렇게 아플 줄 몰랐죠. 저도.”
아무래도 둘 사이에 쌓인 감정은 타인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괜찮습니까? 꽤 다치셨군요.”
베리얼이 아드리아스를 살펴봤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는 루시아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왜 또 괜히 저희 아카데미의 학생들을 건드리신 겁니까.”
“지랄 났네, 지랄 났어. 너 같은 새끼가 학생들을 신경 써 준다고? 애초에 여기는 어떻게 알고 온 거냐?”
“여기 있는 아드리아스 학생은 제가 개인 교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따라 보이지 않길래 흔적을 따라왔죠.”
베리얼의 말에 살렘의 얼굴이 다시 한 번 묘한 빛을 띄웠다.
그리고 이내 미소를 지으며 뭔가를 알아냈다는 듯 운을 떼었다.
“아드리아스를 개인 교습한다고? 대충 눈에 보이는군. 네가 뭘 노리는지.”
“그렇습니까? 역시 스승님은 못 당해 내겠군요.”
자신의 이야기가 나오자 아드리아스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안 그래도 궁금했던 사실이었다.
베리얼 같이 자신밖에 모르는 캐릭터가 왜 자신에게 교습을 해 주는지.
“아드리아스한테서 가능성을 봤던 거냐? 오리지널을 뺏으려고? 하긴 넌 항상 나를 따라잡으려고 했었으니.”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서로에게 좋은 거지요.”
오리지널을 뺏는다는 말에 아드리아스는 물론, 루시아마저 베리얼을 돌아봤다.
마법사에게 있어서 오리지널 마법이란 엄청난 명예인 동시에 고유의 아이덴티티 그 자체였다. 그러나 마나의 배열과 술식을 카피당하면 의외로 빼앗길 위험이 높은 게 오리지널 마법.
‘검사의 오러 비기가 자신만의 필살기와 같은 단발성 기술의 느낌이면, 오리지널 마법은 그 마법사만의 독창적인 스킬트리. 하지만 재능만 있다면 술식과 마나의 배열만 익혀 배울 수는 있지.’
그런 특성 덕분에 몇몇 명문 마법 가문에서는 대대로 내려오는 오리지널 마법이 존재할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알븐가의 공간 마법.
오러 비기와는 다르게 기록과 전수가 가능한 게 오리지널 마법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이 세상에서는 상대의 오리지널 마법에 대한 언급은 금기에 가까웠다.
“너도 진짜 미친놈이네. 그렇게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면.”
“당연한 이야기를 했을 뿐입니다.”
“그니까 그게 미친놈이라는 거야. 그게 왜 당연해.”
천하의 살렘조차 미쳤다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세간의 인식과 동떨어진 이야기를 하는 베리얼이었다.
그때 베리얼이 예고도 없이 살렘을 공격했다.
쿠아아아앙―!
손끝에 모인 마나가 광선처럼 쏘아지고 광선에 닿은 모든 것들이 소멸했다.
“스승님께서 말해 버린 덕분에 제 계획이 다 어질러졌군요. 어차피 제국의 수배범인데 화풀이나 좀 해야겠습니다.”
“이 씨발놈이.”
돌연 옆에서 들려오는 말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뱀 머리가 베리얼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나 베리얼은 태연하게 바라만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까가가가강!
어느새 베리얼의 주위로 얇고 투명한 막이 펼쳐져 있었다.
‘베리얼의 오리지널 마법은 순수를 기원으로 뒀다. 마나의 성질을 이용하지.’
저 얇게 펼쳐진 마법도 고유의 마나 배열과 술식으로 만들어진 마나막.
마나의 순수한 성질 중 반발력만 이용해서 만들어 낸 기술이었다.
“오랜만에 몸 좀 풀겠군.”
살렘이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멀리서 달려들었다.
그 순간에도 사악한 뱀은 베리얼의 빈틈을 노리고 있었다.
콰드드.
베리얼과 사악한 뱀 사이를 두고 불똥이 튀었다.
그리고 베리얼은 가볍게 발을 튕겨 움직였다.
“어쭈? 요 10년간 못 봤다고 지랄 났네?”
가까이 다가오는 베리얼을 보며 살렘이 헛웃음을 흘렸다.
근접전에 있어서는 오러 마스터와도 견줄 수 있다고 자부하는 그로서는 베리얼의 행동이 같잖았다.
교육을 제대로 해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곧바로 왼팔에서 불꽃을 피워 냈다.
화르륵― 쾅!
살렘의 왼 주먹이 베리얼에게 닿자 마나로 만든 막이 출렁이며 굉음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자잘한 실금이 가며 무너져 내렸다.
“스승님은 전과 달리 말이 많아지셨군요. 늙으신 건가요?”
그러나 베리얼은 전혀 당황하지 않고 손을 뻗어 마나를 터트렸다.
초근접 거리에서 터져 나간 마나가 순간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났다.
콰아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