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카일러 슈츠만 그리고 전투
마법학부 교수동에 위치한 한 건물.
포션 제조학 교수, 카일러 슈츠만은 차분하게 짐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차가우리만치 냉정한 그 모습은 평소에 그를 알던 사람들이라면 어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얼어붙어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는 정체가 들키지 않아 급하게 챙길 필요는 없었지만 메이른 왕국의 그레이스 왕자가 사건에 휘말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쩔 수 없이 서두르고 있었다.
‘가르디언 펠. 하필이면 제 포션을 담당하던 녀석이 뒤통수 칠 줄은 예상도 못 했군요. 지금쯤에는 이미 도망쳤겠지요.’
똑똑!
“교, 교수님. 저희 왔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것을 듣자마자 불렀던 나머지 제자들이 도착한 모양이었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말소리에 카일러는 손을 휘저어 잠금 마법을 풀려다 멈칫했다.
제자의 떨리는 음색이 아카데미에서 일어난 사건 때문에 당황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카일러는 문을 열기 전, 확인을 위해 제자의 이름을 불렀다.
“알렉산더.”
“예. 교수님.”
“혹시 누가 같이 왔습니까?”
“…….”
잠시 아무런 대답이 없었고 거기에서 수상함을 느낀 카일러는 곧바로 정리하던 짐을 챙긴 뒤 비상용으로 만들어 둔 일회용 포탈 마법진을 가동했다.
“그, 그게……. 저랑 네트밖에 없습니다. 교수님?”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를 무시하고 카일러는 그대로 포탈을 타고 사라졌다.
잠시 후 아무 소리가 들려오지 않자 문이 격하게 덜컹거리더니 이내 검은색의 검기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놓쳤군.”
방으로 들어온 이는 아드리아스 크롬웰.
그런 그의 뒤에는 덜덜 떨고 있는 카일러의 제자들이 있었다.
“저, 전 아무것도 모릅니다. 교수님이 어디로 갔는지도, 저런 비상 탈출구가 있었다는 것도!”
제자 중 하나인 알렉산더 티번이 무릎을 꿇으며 울음을 토해 내듯 말했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옆에는 이제 고작 2학년밖에 안 된 학생이 거의 졸도하듯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채 아드리아스는 방 안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살폈다.
‘분명 카론과 같이 숨겨 둔 연구실 같은 게 있을 텐데.’
방 한가운데는 아직 마나의 기운이 희미하게 남아 있는 비상용 포탈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카일러가 어디로 도망쳤는지 알고 있기에 상관은 없었다.
지금은 단서부터 파기할 시간.
한참 방을 뒤지던 아드리아스는 이내 알렉산더에게 손짓했다.
“저, 저요?”
“분명 카일러가 숨겨 둔 장치나 장소가 있을 텐데. 어디에 있지?”
“그, 그걸 어떻게…….”
카일러의 제자들은 아드리아스가 숨겨 둔 장소를 알고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 아드리아스는 그가 놀라든 말든 재촉했다.
“빨리 말해라.”
“예, 예.”
알렉산더는 카일러에게 버려진 시점부터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에 최대한 아드리아스에게 협조적으로 대했다.
이미 그가 엄청난 정보력을 보유했다는 걸, 카일러의 제자들인 자신들을 단숨에 찾아낸 걸로 증명이 되었기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저, 아드리아스 학생. 이걸 알려 주면 정말 저희를 놓아주는 거지요?”
숨겨진 장치는 카일러의 책상에 있었다.
그 위치를 알려 주는 알렉산더는 불안한 눈빛으로 아드리아스를 바라봤다.
아드리아스는 대답 없이 그 장치에 내재된 마법진을 읽어 내고 마나를 볼 수 있는 재능을 이용해 강제로 열어젖혔다.
“아, 아드리아스 학생?”
“그래. 이제 가라.”
아드리아스로서는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카일러의 제자들은 상관없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자신의 정체가 들킬 만한 요소.
우선은 이곳에 있는 단서를 지우고 도주한 카일러를 쫓아가야 했다.
‘아카데미에서는 카론과 함께 유일하게 내 정체를 알고 있는 녀석이다. 혹시 모르지만 화근이 될 수도 있으니 처리해야겠지.’
숨겨진 장치를 가동하자 책상 밑바닥이 열리며 계단이 드러났다.
곧바로 내려가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중요한 건 모두 가져간 듯 여기저기 엎어 놓은 흔적이 있었다.
아드리아스는 카일러를 뒤쫓아야 했기에 일일이 찾는 것을 멈추고 연구실 내부에 불을 질렀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불은 마나의 힘이 섞여 쉽게 꺼지지 않기에 걱정 없이 그대로 뒤돌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카일러의 제자들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혹시 모르니 이곳도…….’
아드리아스는 집무실에도 깔끔하게 불을 지르고 유유히 현장을 벗어났다.
* * *
우― 우.
올빼미 울음소리가 적막한 숲을 가로질렀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아카데미가 아닌 야외.
아카데미가 혼란한 틈을 타 밖으로 빠져나왔다.
‘플레이어블은 모두 살렸으니 안심이다.’
내가 발견하지 못한 포션의 복용자도 더 존재했다고 하는데, 그들을 막느라 교수 하나와 조교수 셋의 희생이 있었다고 들었다. 안타까운 희생이었지만 나도 몸이 두 개는 아닌지라 모든 걸 알고 막아 낼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아카데미 내부는 혼란스러운 상황으로 제대로 통제가 되고 있지 않았는데 그 덕분에 카일러의 집무실을 정리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원래 게임 시나리오라면 이 길을 다른 캐릭터들하고 같이 걷고 있을 텐데.’
카일러가 도망친 은신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게임 속 1차전이 아카데미 내부에서 발생한다면 도망친 카일러의 뒤를 쫓아 그의 은신처에서 벌어지는 싸움이 2차전이었다.
평범한 원소 마법만 사용하는 1차전에 반해 2차전에서는 흑마법까지 드러내며 패턴이 다양해져 까다로워진다. 솔직히 동료 NPC 없이 깨기에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1차전은 건너뛴 셈이니 이득인가.’
2차전에서 항상 카일러를 놓치는 전개였는데 게임이 아닌 현실이 된 이상 그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슬슬 카일러의 은신처에 가까워졌다.
나는 미리 준비해 둔 블러디 댄의 가면을 쓰고 정체를 숨겼다.
굳이 감출 필요는 없지만 철저한 게 편했다.
카일러의 은신처는 마치 폐가처럼 보이는 숲속의 작은 오두막이었다.
저 오두막 안에서도 마법진을 통해야 은신처로 입장할 수 있었는데 이미 게임에서 여러 번 겪어 봤기에 문제는 없었다.
나는 낡아 빠진 오두막에 들어가 갈락슈르를 뽑아 들고 마법진이 숨겨진 장소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위이이잉.
마법진이 발동하며 숨겨져 있던 통로가 드러났다.
그리고 곧바로 마나가 요동치는 기운을 느껴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휘익― 쾅!
가면을 스치고 지나간 마법이 오두막 벽을 산산조각 냈다.
“어떻게 여기를 알고 오신 거죠?”
통로에서 말소리가 들리며 어둠에 잠겨 있던 카일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카일러의 말에 대답 한마디 해 주지 않고 곧장 튀어 나갔다.
후와앙.
통로의 안쪽으로 달려가며 검풍을 쏟아 냈지만 카일러는 자신의 그림자를 움직여 가볍게 검풍을 막아 냈다. 그의 그림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입체적으로 움직였는데 게임 속에서 상대해 봤음에도 까다롭기 짝이 없는 흑마법이었다.
상대가 검풍을 막는 사이 나는 순식간에 카일러에게 다가가 그림자를 뚫었다.
“절 너무 무시하는군요.”
뚫었다고 생각한 그림자가 그대로 휘감겨 들어왔다.
마나가 담긴 갈락슈르를 제외한 내 팔과 상체 일부를 속박한 그림자가 단단하게 유지됐다. 그렇게 옴짝달싹 못 하게 된 내 모습을 보고 카일러는 여유를 부리며 내게 다가왔다.
[‘순수한 원죄’가 ‘자선하는 탐욕’의 힘을 느낍니다.]
갑자기 떠오른 문구에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탐욕을 찾았는데? 나머지 보석을 갖고 있는 건가?
“이곳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찾아온 건지 궁금하군요. 어디 한번 얼굴부터 봅시다.”
카일러는 마치 거미줄에 걸린 듯 꼼짝 못 하는 내게 다가오며 가면을 향해 손을 뻗어 왔다.
그리고 그의 손이 내 가면에 닿으려는 순간.
툭.
백골로 된 새하얀 무언가가 카일러의 어깨를 잡았다.
“어?”
당황한 음성의 카일러와 허공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니켈의 눈이 마주쳤다.
서걱!
“끄아아악!”
붙잡은 상대의 어깨를 거침없이 베어 버린 니켈이 카일러를 향해 멈춤 없이 쇄도해 들어갔다.
그사이에 나는 융합 마법을 사용해 갈락슈르로 불을 피웠다.
화륵.
오러로 만들어진 검은 불꽃이 그저 태운다는 성질만 지닌 채 나를 감싼 그림자를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상대의 방심을 노리고 가한 치명적인 일격.
사실 바로 죽이길 원했는데 안타깝게도 죽이는 건 실패했다.
‘이러면 조금 골치 아파지는데.’
단숨에 죽이지 못한 이상, 방금과 같은 요행은 이제 없었다.
이제 순수한 실력으로만 승부를 봐야 한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니켈의 공격은 죽이지만 못했을 뿐 치명적이었다는 점.
파사삭!
오른팔이 잘린 카일러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지혈도 제대로 못 한 채 니켈의 공격을 막아 내고 있었다. 니켈도 이렇다 할 결정타를 날리지 못한 채 그림자들에 막혀 뒤쫓고만 있는 형국이었다.
‘어스 실드.’
나는 상대의 퇴로를 막았다.
그러자 갑자기 길이 막힌 카일러를 향해 니켈의 검이 떨어졌다.
콰드드득!
급했던 모양인지 순식간에 불어난 그림자가 소용돌이처럼 휘몰아치며 니켈의 검을 막아 냈다. 그리고 이내 그림자를 타고 자리에서 벗어난 카일러가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품을 뒤졌다.
‘2페이즈인가.’
그렇게는 안 되지.
니켈처럼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용하려 아껴 둔 소환을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
“크허엉!”
진화를 통해 한층 강해진 티무르가 거대한 포효를 내지르며 튀어나왔다.
[레버넌트 버서커(전설)]
―티무르
―언데드
―6티어
―마나: 2010
―특성: 자아/극의: 권拳, 버서크
니켈이 진화했을 때와는 달리 종이 변하지는 않았지만 티어가 한 단계 상승했다.
아무래도 죄악과 관련된 진화이거나 그동안 어떤 경험을 했냐에 따라 진화의 분기점이 늘어나는 느낌이었는데 어쨌든 티무르는 어엿한 6티어의 언데드가 되었다.
‘아직은 그래도 니켈이 더 강한 느낌이지만.’
티어는 다른 게임에 존재하는 전직과 같았다.
6티어는 마치 6차 전직과 마찬가지.
하지만 니켈의 경우 5티어임에도 히든 전직을 한 것과 같았기에 6티어인 티무르나 루도보다 강했다.
티무르는 소환되자마자 버서크를 발동하며 달려 나갔다.
육체 능력만큼은 니켈을 앞섰기에 수상한 행동을 하는 카일러에게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쿠구궁!
퍼벙!
카일러는 급했던 모양인지 원소 마법까지 사용하며 티무르의 돌진을 막으려 했지만 버서크를 발동한 티무르는 터프하게 마법들을 맞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퍼엉!
그림자가 티무르의 주먹을 휘감으며 충격을 흡수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카일러가 급하게 포션을 마시는 걸 볼 수 있었다.
‘못 막았군.’
어차피 다 계산했던 일이이지만 조금 아쉽네.
그림자에 막힌 티무르가 다시 한 번 몸을 들이박을 때쯤에는 이미 상대의 마력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뿜고 있었다.
꼬드득. 퍼엉!
티무르의 팔이 그림자에 휘말리더니 그대로 꽈배기처럼 꼬였다.
그리고는 마치 토해 내듯 튕겨지는 모습을 보며 이마가 찌푸려졌다.
“흐으으. 이제 보니까 누군지 알겠군요.”
포션의 영향인지 몸이 기괴하게 변해 가는 카일러가 검게 변한 눈으로 나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아드리아스 학생. 맞죠?”
굳이 대답해 주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아까 전부터 집중하고 있던 새로운 융합 마법에 신경을 쓰고 있을 뿐이었다.
“흐흐흐. 정곡을 찔렀나 보군요. 근데 너무 티가 나잖아요. 검과 마법을 동시에 부리고 거기다 네크로맨시까지. 그럴 거면 왜 굳이 가면을…….”
어느새 다가간 니켈이 카일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전과 다르게 강력해진 그의 그림자 마법은 무리 없이 니켈을 막아 냈다.
“도대체 언제 이런 언데드들을 사역하게 된 거죠? 이 정도면 당신의 스승인 카론이 가진 언데드들보다 뛰어난 것 같군요.”
“쫑알쫑알 시끄럽군.”
나는 거의 다 완성해 낸 융합 마법이 담긴 검을 들고 걸어갔다.
그러면서 동시에 루도를 소환했다.
“그워어어어!”
쿠구구구궁―!
거대한 덩치의 루도가 소환되자 통로가 부서지며 난장판이 되었다.
그 거대한 덩치의 언데드를 본 카일러가 놀랍다는 표정을 지으며 떨어지는 잔해물을 막아 냈다.
“그 언데드는 대체? 플레시 골렘(flesh golem)인가요?”
그의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루도의 대검이 휘둘러졌다.
그 압도적인 질량이 내려 찍히자 아무리 포션을 복용한 카일러여도 방심할 수는 없었는지 마나를 폭주시키며 그림자로 막아 냈다.
한쪽은 니켈, 또 한쪽은 어느새 다시 붙은 티무르 그리고 위쪽으로는 루도의 대검이 휘둘러지는 상황 속에서 나는 천천히 검에 담긴 마법을 완성시켰다.
‘실전에서 사용해 보는 건 처음이지만…….’
예상치 못한 성과를 보인 새로운 융합 마법.
촤르르르륵.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마법은 ‘뼈’였다.
이번 융합 마법은 다름 아닌 네크로맨시와 검의 결합.
날카로운 뼈들이 돋아난 내 검은 채찍처럼 늘어나 휘둘러졌다.
콰드드득!
위기를 느낀 카일러는 순식간에 그림자들을 불러와 자신의 주변을 둘러막았다.
그러자 오러가 담긴 내 뼈 채찍은 그림자에 박힌 채 뚫지 못했다.
“이건 뭡니까? 오러? 마법?”
나는 대답 없이 검을 틀었다.
그러자 긴 채찍과도 같은 뼈에서 잔가지가 돋아나듯 뼈들이 솟구쳤다.
솟구친 뼈는 기어코 그림자를 뚫고 카일러에게 닿았다.
하지만 포션을 먹어 단단해진 카일러의 육체를 뚫지는 못했다.
“하하하! 뭐 대단한 거라도 준비한 줄 알았더니 겨우 그 정도입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머리에 과부하가 걸렸다.
동시에 코피가 주르륵 흘렀지만 나는 마나 배열을 멈추지 않았다.
“응?”
그제서야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카일러는 뒤늦게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내 캐스팅은 이미 끝난 뒤였다.
“넌 너무 시끄러워.”
콰앙―!
콰과광―!
더블캐스트.
본 익스플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