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드러내다
아드리아스의 등장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걸까.
관중들은 물론이고 사회자조차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귀빈석에 앉은 누군가가 헛기침을 하자 그제야 사회자가 정신을 차리며 입을 열었다.
“네, 저, 참가를 확인했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32강전 첫 번째 시합! 디에네 알븐 대 아드리아스 크롬웰의 대결이 시작되겠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된 시작이 알려지자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이대로 디에네 알븐의 화려한 마법 세례를 못 보는 건 아닌가 걱정했었던 사람들은 아드리아스의 등장이 너무나 반가웠다.
그중에서도 아드리아스의 승리를 점치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최대한 오랫동안 버텨서 볼거리를 선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뿐이었다.
경기장 가운데로 나온 디에네는 아드리아스의 모습을 보며 물었다.
“뭐 하고 왔길래 그 모양이야?”
“일이 좀 있었습니다.”
아드리아스는 태평하게 말하며 허리춤에 검을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디에네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시간 좀 줄게. 준비도 안 된 상대를 공격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아.”
“겁나십니까.”
“뭐?”
“전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잔말 말고 들어오시죠.”
아드리아스의 도발적인 말에 디에네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나름 배려해 준다고 한 말을 저렇게 받아치다니!
“그래. 필요 없다면…….”
디에네의 주변으로 마나가 모여들었다.
마나의 대한 재능이 범인을 넘어선 그녀는 마법의 준비 과정 자체도 평범하지 않았다.
“사양하지 않을게.”
거대한 화염구가 태양을 가릴 듯 두둥실 떠올랐다.
문제는 그러한 화염구가 한두 개가 아닌 무려 다섯 개.
그 엄청난 광경에 시합의 심판부터 중재의 역할을 맡은 여러 교수들까지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저도 이번에는.”
그와는 반대로 여유로운 모습으로 선 아드리아스는 검을 땅끝으로 늘어뜨린 채 곧장 튀어 나갈 것처럼 자세를 낮추었다.
“사양하지 않고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팡!
예상치 못한 속도로 튀어 나가는 아드리아스를 향해 디에네는 자신도 모르게 준비가 덜 된 마법을 집어 던졌다.
화르륵.
엄청난 온도의 화염구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업화처럼 쏟아졌다.
아드리아스는 4번째 화염구까지 신체 능력으로 회피해 내고 마지막 다섯 번째 화염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푸화―악!
시커먼 마나가 둘러진 검에서 검풍이 나오며 화염구를 갈랐다.
갈기갈기 찢겨지는 화염구 사이로 두 눈을 부릅뜬 채 미소 짓고 있는 아드리아스가 보였다.
그 모습이 마치 싸움을 즐기고 있는 괴물 같았다.
‘도대체……!’
디에네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눈앞에 두고 침착해지려 노력했다.
아드리아스가 어떻게 기사의 마나를 다루는지, 그가 정말 아드리아스가 맞는지는 미뤄 두고 다음 마법부터 준비했다.
아드리아스는 다시 한 번 폭발적인 속도로 디에네의 근처에 다다랐다.
하지만 디에네의 다음 마법은 공격 마법이 아니었다.
휘잉.
검면을 휘두른 아드리아스는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허공을 보며 다시 한 번 웃었다.
벌써부터 공간 마법을 다룰 줄은 예상하지 못한 그였다.
순식간에 공간 마법으로 거리를 벌린 디에네는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리며 방심을 지웠다.
지금의 아드리아스는 기사로 상정해야 했다.
그러나 상대의 몸 상태를 보면 100%의 컨디션은 아닐 터.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전격 마법.’
대 기사용 마법을 준비했다.
넓은 범위로 지져 버리면 아무리 그라도 피하거나 파훼할 수 없을 거다.
지지지직!
디에네의 두 눈에서 번개 속성의 마나가 춤추는 걸 본 아드리아스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달려갔다.
그렇지만 디에네의 마법이 한발 빨랐다.
‘썬더 코브라.’
엄청난 전류가 디에네로부터 흘러나와 바닥을 기어갔다.
곧이어 달려드는 아드리아스를 휘감을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콰지지직―!
아드리아스는 몸을 휘감으려고 하는 거대한 전류를 보며 무심하게 바위 벽을 세웠다.
지직.
디에네의 코브라 썬더는 무려 중급의 마법이었지만 상성상 대지 마법을 뚫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했다.
원래 같았으면 이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디에네였지만 너무나 당황했던 탓에 아드리아스가 땅 계열 마법을 사용하는 것을 한순간 잊고 있었다.
‘낭패…….’
이미 자신의 턴을 사용해 버린 디에네는 본인이 세운 어스 실드를 무너트리고 다가오는 아드리아스를 바라만 봤다.
“포기하신 겁니까.”
아드리아스의 말에 순간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알븐가의 후손인 이 내가 고작 저런 녀석에게 진다고?
용납할 수 없었다.
우우웅.
마나의 공명이 경기장 내부를 울렸다.
귀빈석에 앉아 있던 이들 중 강자의 축에 속하는 인물들은 그 변화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엄청난 마나 감응력!”
디에네의 심장이 터질 듯 박동했다.
그녀는 그동안 의도적으로 노력해 봐도 재현해 낼 수 없었던 기술을 사용했다.
‘폭발이 부여된 화염창 그리고…….’
그녀의 앞으로 화염으로 이루어진 창이 소환되고 그대로 아드리아스를 향해 쏘아졌다.
그러나 단순히 직진하는 화염창을 아드리아스는 감흥 없다는 듯 피해 내며 계속해서 전진했다.
……전진하려 했다.
콰―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화염에 휘말린 아드리아스가 검은 연기를 흩날리며 몸을 가누었다.
마나로 몸을 보호했기에 충격을 모두 입지는 않았지만 상당한 공격력이었다.
디에네의 마법은 화염창 하나가 아니었다.
그냥 사용하기도 힘든 공간 마법을 더블 캐스팅으로 시전하여 화염의 창을 전이시켜 아드리아스를 명중시킨, 웬만한 마법사는 시도하기도 힘든 계산과 마나 배열을 해냈다.
아드리아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거야. 디에네.”
아드리아스는 디에네의 성장이 즐거웠다.
그로서는 자신의 성장만큼이나 보람이 느껴지는 플레이어블의 성장이었다.
위이잉.
디에네의 마법은 끝이 아니었다.
예열이 끝났다는 듯 온갖 마법들이 더블 캐스팅으로 시전되기 시작했다.
이전과 같이 힘겨워하지도, 코피를 흘리지도 않고 온전히 자신의 실력으로 더블 캐스팅을 소화해 내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 아드리아스의 미소가 쓴웃음으로 변했다.
‘이건 나도 좀 힘들겠는데.’
전투 재능은 상대의 움직임에서 미리 전조 현상을 읽고 다음 행동을 예측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디에네의 공간 마법은 전조 없이 공간 자체를 전이시키기에 예측이 불가했다.
드디어 공간 전이 마법과 함께 사방팔방에서 마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드리아스로서는 그저 최대한 몸을 움직여 디에네가 눈으로 쫓을 수 없도록 하는 수밖에 없었다.
콰앙!
콰지지직.
디에네는 괜히 천재라 불리는 기재가 아니었다.
비록 눈으로 쫓을 수 없어도 그녀의 엄청난 두뇌 회전은 아드리아스의 경로를 미리 예측하고 연산하여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기껏 아드리아스가 거리를 따라잡게 되더라도 공간 마법으로 거리를 벌렸다.
결국 대미지가 축적된 아드리아스는 갑자기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러자 계산이 한결 편해진 디에네는 미친 듯이 마법을 쏟아 냈다.
“하아.”
검을 휘두르며 마법을 갈라내거나 막아낸 아드리아스는 숨을 내쉰 뒤 크게 들이마셨다.
각성을 한 듯한 디에네를 이기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마나가 둔탁한 성질로 변했다.
단단하게 뭉친 마나를 뻣뻣하게 휘둘러진 검으로 토해 냈다.
콰과가가가각―!
대지가 갈라져 나갔다.
아드리아스가 쏘아 낸 검풍은 검기가 섞여 경기장의 지반을 부숴 내고 디에네가 서 있는 땅을 뒤흔들었다.
공간 이동을 통해 피하려던 디에네는 무너지는 땅에서 중심을 못 잡고 쓰러졌다.
‘아……!’
집중이 깨지며 더블 캐스팅이 끝났다.
애초에 그녀에게는 마나가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
디에네는 패배를 직감했다.
이미 2학년 때부터 토너먼트를 매 차례 참가하며 패배도 많이 겪어 왔지만 이번에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특히나 이번 싸움에서 자신이 보인 실력은 작년의 우승자가 오더라도 이길 만한 수준이었다.
‘근데도 지다니.’
허탈함을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번 싸움을 통해 습득해 낸 능력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자신은 강해졌다.
비록 이번에는 졌지만 다음에는…….
“경기 종료!”
갑자기 울린 심판의 목소리에 디에네가 상념에서 깨어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지? 내가 아무것도 안 해서 그냥 끝낸 건가?
그러나 다시 들려오는 사회자의 목소리는 그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승자! 청코너! 디에네 알븐!”
그제서야 그녀는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검을 땅에 박고 서 있는 아드리아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상처들은 이미 그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나 있던 상처들이었는데 그녀가 맞춘 마법의 영향으로 아물었던 상처들이 충격을 입은 듯했다.
“인정할 수 없어.”
디에네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건 내 승리가 아니다.
만약 그가 온전한 상태였다면 지금쯤 쓰러진 사람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을 거다.
“인정할 수 없어!”
그녀가 소리치며 심판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누군가가 갑자기 그녀의 앞을 막았다.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인물을 디에네는 떨리는 눈으로 바라봤다.
“아, 아버지…….”
“고생했다. 그리고 훌륭한 전투였다.”
“이, 이건 제가 이긴 게 아니에요. 전 이런 식으로 이기려던 게…….”
“디에네.”
나직하지만 힘 있는 바하트의 목소리에 디에네의 말이 끊겼다.
“전투에 있어서 만약이란 없다. 아드리아스가 몸 관리를 못한 것도 실력의 일종이야. 그 결과는 오롯이 녀석이 감당해야 할 부분이지, 네가 신경 쓸 게 아니다.”
“하다못해 경기를 이런 식으로 끝내는 건 말이 안 돼요. 봐 봐요! 아드리아스도 아직 포기하지 않고 서 있는데 어째서 경기를 중단하고 승자를 결정해요!”
그녀의 말에 바하트는 조심스레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심판이 상태를 살피고 있는 아드리아스에게로 함께 걸어갔다.
“디에네. 너의 그런 점은 정말 본받을 만하구나. 정의롭다는 건 정말 가지기 어려운 장점이지.”
가까이 다가가서 확인한 아드리아스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뭐가 그리 만족스러운지 활짝 웃고 있는 그는 선 채로 기절한 상태였다.
사람이 선 채로 기절할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저 표정을 보자 다시는 그와 싸우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그렇게 악에 받치며 기를 쓴 싸움이었는데 아드리아스는 그런 싸움을 즐기고 있었다니.
‘혹시……변태?’
승패와 별개로 엉뚱한 생각을 하는 디에네였다.
* * *
콰과가가가각―!
검기가 섞인 검풍이 대경기장의 바닥을 깨부수는 걸 보며 바하트가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주변에 앉은 인물들도 모두 손에 땀을 쥐고 경기를 관전 중이었던 터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검풍은 다행히 바닥만 깨부수며 디에네에게는 위해를 가하지 못했다.
‘아니. 일부러 힘 조절을 했어.’
여전히 서 있던 바하트가 두 눈에 사용된 마법으로 파악했다.
저 시건방진 아드리아스 놈은 디에네가 다칠까 봐 일부러 힘을 뺐다.
그렇다고 치더라도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대경기장의 바닥은 평범한 바닥이 아니었다.
토너먼트가 일어나는 곳인 만큼 재질은 물론이고 바하트 본인이 직접 설계를 한 마법진을 그려 흠집 하나 만들기 힘든 바닥이었다.
지금 아드리아스는 힘을 뺀 상태로 그러한 바닥을 깨부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아마 이곳, 귀빈석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을 터.
‘숨기지 않기로 한 건가……. 곧 바람이 불겠군.’
그것도 단순한 바람이 아닌 태풍의 전조가 불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