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왕관 그리고 뮤리엘 환락가
생명의 은인?
설마 테러를 막아 낸 걸 들은 건가.
알븐가의 장남이니 들을 만도 했다.
사건의 담당을 다름 아닌 바하트 알븐이 직접 나서서 했으니.
일단은 확실하지 않아 모르는 척 해 보았다.
“생명을 구하다니요.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디에네가 그랬습니다. 각하께서 제게 인사를 건네고 싶다고 찾아올지도 모른다고요. 근데 이틀이 지나도 각하를 보기가 요원하더군요. 그래서 제가 직접 각하를 찾아 나서 보았습니다.”
그런 거였군.
그의 오지랖 넓은 성격이라면 직접 찾아보는 게 당연했다.
“치료소에 계시다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찾아왔었군요.”
“예. 무슨 일로 다쳤는지는 알 수가 없어 답답하던 차에 이틀 전에서야 아버지께 직접 전해 들었습니다. 각하께서 어떠한 활약을 하셨는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일단 그 건은 미지의 인물이 도운 걸로 되어 있기에 내 활약은 없는 게 속 편했다.
“전 그 당시에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저…….”
“괜찮습니다. 설령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싱긋 웃는 그의 두 눈이 빛났다.
그 모습이 마치 벤자민이 나를 동경할 때 보내던 눈빛 같았다.
진짜 엄청 부담스럽네.
분명 좋은 사람이지만 그 열정과 부담이 나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그냥 편하게 받으시면 좋겠습니다. 예전 관계를 생각해서 챙겨 주는 선물이라고 보셔도 되고요.”
일단 공짜로 챙겨 주겠다니 그냥 넙죽 받아먹기로 했다.
받아먹는다고 어디 탈이 날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경매에 늦어서 초반 물건들을 놓쳤겠다 싶었는데 오히려 늦어서 다행이군요. 각하를 이리 마주치게 되었으니.”
그 뒤로는 이런저런 일상적인 이야기와 과거에 함께 했던 이야기를 하며 경매를 구경했다.
당연하다고 해야 할까. 내가 관심을 가질만한 물건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내가 관심을 가질 만한 거였으면 이미 정보를 알고 있었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경매에 집중했다.
이왕 카를로스가 하나 사 주기로 했으면 제대로 된 걸 골라야지.
차라리 단상에서 가까웠다면 아이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그건 조금 아쉽네.
그렇게 차례차례 경매 물품들을 넘기고 있을 때였다.
“이번 물품은 해저 깊은 곳에서 건져 올린 유물입니다. 유물이라고는 하나 그 예술성과 미적 감각이 매우 뛰어나 결국에는 이 자리에까지 올라오게 되었죠. 소개합니다. 해저에서 발견한 왕관, ‘바다의 지배자’입니다!”
단상에 올라온 물품은 재질을 알 수 없는 검은 왕관 형태의 물건이었다.
모습을 보고 설명만 들었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내 눈앞에 뜬 메시지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순수한 원죄’가 ‘자선하는 탐욕’의 힘을 느낍니다.]
‘탐욕!’
라녹스에게 얻은 탐욕의 파편은 지금 고이 가방에 모셔 놓은 상태였다.
근데 저 왕관을 보니 그 핏빛 보석이 어디에 박혀 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저 왕관이랑 세트였군.’
왕관의 외형을 보자 군데군데 보석이 박혔다 빠진 듯한 부위가 있었는데 총 5개의 보석이 필요해 보였다.
“경매 시작가는 1억 윌! 호가는 1,000만 윌입니다.”
미친.
무시무시한 경매 시작가에 입도 뻥긋 못하겠다.
아무리 카를로스가 사 준다고는 했지만 1억이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함부로 사 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근데 기가 막히게도 카를로스가 나를 보며 먼저 말을 꺼냈다.
“저걸 원하시는 거 맞으시죠?”
“아. 그, 아닙니다. 형님.”
어떻게 눈치챘지? 그렇게 티가 났나?
그는 생긋 웃어 보이며 태블릿에 입찰 신청을 눌렀다.
“각하.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저 알븐입니다. 돈으로만 따져도 제국 5대 상단과 맞먹는 그 알븐.”
그는 이내 단상 위를 보며 눈을 빛냈다.
“알븐의 돈지랄이 뭔지 오늘 한 번 보여 드리죠.”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있지. 충분히 있지.’
다른 무엇도 아닌 죄악이 걸린 일인데 오히려 돈으로 해결할 수 있으면 감사할 정도였다.
물론 저 왕관 하나로는 탐욕의 페이지가 완성되지는 않겠지만 나머지 파편도 언젠가 차차 모으면 되겠지.
‘여기까지 온 김에 흩어진 파편들의 소재도 조사해 보고 가야지.’
파편의 형태가 보석인 만큼 생각보다 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탐욕의 힘이 깃든 만큼 평범한 보석은 아닐 테니.
“2억 5천! 2억 5천 윌이 나왔습니다! 더 있습니까?”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에 가격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탐욕의 힘이 깃든 왕관인 만큼 사람들의 욕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이었다.
그때 카를로스가 담담하게 태블릿에 입력했다.
“헉!”
갑자기 놀란 숨소리가 진행자의 입에서 나오고 침을 삼키며 말했다.
“5억 윌! 5억 윌이 나왔습니다.”
단숨에 두 배를 불러 버리는 카를로스가 점차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카를로스는 5억이나 불러 놓고도 태평한, 아니 오히려 냉철한 눈빛으로 주변의 동향을 확인하고 있었다.
“5억 1,000만 나왔습니다!”
“쯧.”
카를로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차더니 평소와는 다른 삭막한 표정으로 다시 태블릿에 입력했다.
“6억 윌! 6억! 6억입니다!”
돈지랄을 보여 준다고 했는데 진짜로 돈지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내 돈이 아님에도 기가 빨리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카를로스보다 더한 미친놈이 등장했다.
“10억!”
나는 나도 모르게 10억을 입력한 사람을 찾기 위해 보이지도 않는 같은 층을 둘러보았고 카를로스는 무섭게 미소 짓고 있었다.
“재밌네. 감히…….”
카를로스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항상 소탈하고 남을 도우려 오지랖을 부리는 모습만 보아 왔는데 나름 알븐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었던 모양이다.
원래 같았으면 입찰을 말렸을 테지만 도저히 말릴 수가 없었다.
세상의 멸망과 관련된 아이템을 먼저 빼돌릴 수 있다면 10억이 대수냐.
100억이어도 돈만 있다면 가져다 주지.
‘그나저나 10억을 부른 놈이 궁금한데. 집회인가? 아니면 황제 측 인물? 아니 애초에 탐욕이 누구한테 갔는지를 모르겠네.’
어쩌면 그냥 돈 많은 부호가 탐욕에 홀려 지른 것일 수도 있었다.
누가 입찰한 건지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2층의 VIP 좌석은 전부 룸으로 되어 있었기에 알 수가 없었다.
“15억 윌!”
상대가 4억을 올리자 5억이나 올려 버리는 카를로스의 귀여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액수는 전혀 귀엽지 않았지만.
하지만 액수는 그에 그치지 않고 천정부지 치솟아 올랐다.
“50억 윌입니다. 50억 윌!”
이제는 숫자가 너무 커져 버리니 현실 감각이 사라졌다.
심지어 1, 2억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질 정도였다.
“흐음.”
아무리 카를로스여도 이 정도의 금액은 예상치 못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본인이 필요한 물건도 아니고 고작해야 선물치고는 너무 비싼, 아니 이미 비싼 범주를 넘어선 물건이기는 했다.
이쯤 되자 말리는 척이라도 해야 되나 싶을 즘, 카를로스가 나를 보며 웃었다.
“역시 제 성격에 참는 건 힘들군요. 지금까지 불안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예?”
뭔 소리인가 싶을 때 카를로스가 다시 입찰 금액을 입력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식은땀이 등 뒤로 흐르는 것을 느꼈다.
‘100억…….’
그리고 동시에 진행자가 외쳤다.
“100억! 100억 윌―!”
진행자의 호들갑과 함께 웅성거리는 1층의 객석들이 보였다.
오늘 나온 입찰 금액 중 가장 높은 금액인 것도 있었지만 50억에서 한 번에 100억으로 뛴 점도 그들을 흥분으로 몰아넣은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이해가 안 되네.
잘하다가 왜 갑자기 2배나 되는 금액을?
내 시선을 눈치챈 카를로스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웅성거리는 1층 객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뭐, 아버지한테 잔소리를 조금 들을 것 같기는 한데 각하께 선물을 드렸다고 말하면 대충 넘어갈 수 있을 겁니다.”
“100억인데요?”
“예? 아아. 괜찮습니다. 100억 정도면 몇 달 안에 복구할 수 있을 거예요.”
역시 진짜 귀족은 경제 관념이 달랐다.
아무리 마법으로 인해 평범한 중세 시대보다 발달했다고는 해도 빈익빈 부익부는 똑같은 세상.
특히나 알븐가와 같이 부호로 소문난 귀족들은 100억이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하긴 아카데미의 알븐 스트리트도 이름을 다는 조건만으로 몇천 억 규모를 투자했지.’
난 모르겠다.
일단 탐욕의 파편이니 거절할 수도 없는 선물이었다.
“이야. 알차게 돈을 썼네요. 혹시 저녁에 있다는 약속이 식사 약속이신가요?”
“아닙니다. 더 늦은 밤입니다.”
“잘됐네요. 밥이나 먹을까요?”
방금 100억을 쓴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데 실제로 아무렇지 않은 건지 그런 척을 하는 건지 이제는 분간하기 어려웠다.
‘호흡이나 동공의 크기를 보면 진짜 아무렇지 않은 모양인데…….’
아직까진 귀족이란 생물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 * *
“오늘은 오랜만에 꽤 즐거웠습니다.”
“다음에는 제가 알븐가에 직접 방문하겠습니다, 형님.”
“아니에요. 어차피 제가 집에 붙어 있는 경우는 없어서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버지도 마탑에 계시고 디에네도 아카데미에 있으니 오셔도 어차피 아무도 못 볼 거예요.”
식사를 마친 뒤 카를로스는 손을 흔들며 이별을 고했다.
결국 경매에서도 자신의 물건은 하나도 구입하지 않은 그를 보자 기분이 묘했다.
그가 사 준 왕관은 경매장에서 바로 받아 내 공간 확장 가방에 넣어 놓은 상태였다.
‘정말 알 수 없네.’
의외의 면들을 조금 엿본 거 같기도 하고.
애초에 그는 게임에서 살아 있는 인물이 아니기에 이렇게 직접 만나 보자 신기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결국 카를로스를 살린 덕분에 탐욕의 파편을 얻은 셈인가.’
벤자민의 경우에는 나로 인한 나비효과로 불행을 겪었지만 이런 좋은 영향력도 생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앞으로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인물들은 살려 봐야겠네.
언제 어디서 또 도움이 될지 알 수 없으니.
‘이제 슬슬 출발하면 되려나.’
나는 잠시 여관을 대실했다.
그곳에서 옷을 갈아입고 갈락슈르를 천으로 감싼 뒤 가면까지 착용했다.
이왕 음지에 가기로 했으면 철저히 정체를 숨겨야지.
나는 뮤리엘의 뒤 세계로 이어진 주점으로 향했다.
우선은 이 주점을 통해서만 음지의 경매장이 있는 ‘환락가’로 갈 수 있었다.
애초에 게임 속에서도 자주 와 봤던 장소이기에 모른의 편지가 없었어도 접선 방법은 전부 꿰차고 있었다.
환락가는 그 이름답게 질이 좋은 곳은 아니었는데 게임에서는 거의 10번을 방문하면 그중 8, 9번은 사건에 휘말렸던 것 같다.
'괜한 일에 휘말릴 확률이 높지만 그렇다고 모른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으니.'
그리고 무려 드래곤 레어에 관한 정보다.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지.
주점은 시끌벅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다를 떨며 술을 비우고 있었는데 외진 구석에 죽은 듯 엎어진 주정뱅이가 한 명 보였다.
나는 그의 테이블로 다가가 금화로 된 동전을 은근슬쩍 건넸다.
그러자 주정뱅이는 언제 술에 취했냐는 듯 냉큼 낚아채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어디론가 향하기 시작했다.
‘바뀐 게 없어 다행이다.’
게임과 같은 진행에 안도했다.
물론 바뀌었더라도 모른이 편지로 알려 주었을 테지만 역시 익숙한 게 최고다.
그를 따라가자 주점의 주방과 연결된 뒷문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들어가자 날카로운 예기가 위쪽에서 느껴졌다.
“블러디 댄?”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가면을 보고 착각한 모양이군.
‘역시 음지의 녀석들이라 가면을 바로 알아보는군.’
그래도 상관없었다.
애초에 내 정체를 숨기기 위해 쓴 거니까.
나는 대답 없이 그냥 서 있기만 했다.
그러자 천장에서 누군가가 스르륵 내려오더니 나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흐흐. 이제 보니까 네가 댄을 죽인 녀석이구나. 항상 궁금했지. 녀석은 죽었는데 가면이 사라졌으니.”
상대가 뭐라 하든 전혀 반응하지 않고 서 있기만 하자 이내 혀를 찬 녀석은 내게 손짓했다.
나는 그 손짓에 곧장 입장료를 지불했다.
“조심하라고. 그 가면을 노리는 녀석들은 이 안에도 꽤 있으니까.”
그가 비켜나자 나는 주점 주방의 한쪽 벽면을 향해 그대로 걸어갔다.
이내 벽과 부딪히자 벽은 거짓말처럼 내 몸을 통과시켰다.
퍽!
“크악!”
벽을 통과하자마자 보인 풍경은 지저분한 회색빛 거리와 칼에 맞아 쓰러지는 사내였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님에도 누구 하나 쓰러지는 이를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가 뮤리엘의 환락가.’
양지에 나올 수 없는 온갖 범죄와 불법이 연루된 위험구역.
그리고 오늘의 진짜 목표가 있는 장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