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과나무 저택 그리고 에이미 크롬웰
빚이 있고 에이미가 아르바이트까지 하는 상황이었으니 누구든지 우리 가문의 재정 상태를 알 수 있을 듯했다.
가세가 기운 것은 내가 아직 어렸을 때였는데 크롬웰가의 영지는 그 무렵에 압류되었다.
뭐, 애초에 내 머리가 굵어졌을 쯤부터는 영지가 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 크롬웰 영지에 대한 추억이나 기억은 희미했다.
오히려 수도 근처에 있는 저택에서 지낸 시절이 더 길었으니.
하지만 수도 인근의 저택도 결국 내가 로들렌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직전에 경매에 붙여졌다.
덕분에 에이미는 지금 수도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조그만 주택에서 지낸다고 들었다.
내가 지금 이 생각을 왜 하냐면…….
“어서 오세요. 손님~”
콧소리를 섞으며 반갑게 나를 맞이하는 부동산 사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웰튼 영지에 ‘사과나무 저택’, 비어 있습니까?”
“예? 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용.”
그는 어떤 서류를 살펴보더니 손으로 훑으며 내가 말한 매물을 찾기 시작했다.
그의 손길을 따라 나도 모르게 시선이 쫓아갔다.
저택이 경매에 넘어간 후로 어찌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미 새로운 주인이 생겨 사람이 살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윌리엄이 준 계약금하고 대출을 받으면 사과나무 저택 정도는 충분하겠지.’
원래라면 인장 반지에 들어갔을 돈이 고스란히 남는 바람에 저택에까지 생각이 미칠 수 있었다.
대출은 내가 가진 특허권으로 충분히 받을 수 있을 테니 문제없었다.
“아! 여기 있네요.”
드디어 찾았는지 그가 내게 서류 하나를 꺼내어 보여 주었다.
서류에는 이젠 그리워진 저택의 모습이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경매 보류가 된 매물이네요. 현재 황실에 귀속된 상태입니다.”
“가격이 얼마나 합니까?”
“음, 확인해 보니 판매하는 매물이 아니에요. 죄송하지만 이건 황실의 영토 관리 부서에 찾아가 보셔야 할 것 같아요.”
허, 이런 식으로 막힐 줄이야.
일요일이라 황실 관련 부서들이 일을 할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대로 아카데미에 복귀하기에는 아쉬웠기에 부동산을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만연한 겨울이었다.
전날 저녁부터 내린 눈으로 하얗게 변한 도시의 풍경은 추운 날씨와 별개로 마음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게임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이렇게 예쁠 줄이야.
평상시 같았으면 마차를 타고 곧장 목적지에 향했겠지만 오늘만큼은 조용히 거리를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에이미가 일하고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은…….’
처음으로 생긴 진짜 가족.
처음 만난 날에 실망을 안겨 주고 말았다.
반지는 되찾았지만 조금 더 떳떳한 오빠가 되고 싶었다.
일요일이라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도 고생하고 있을 에이미를 떠올리자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나는 지나가는 마차를 붙잡고 곧장 황궁 근처에 있는 업무 처리 구역으로 향했다.
* * *
로들렌의 일대귀족(一代貴族)인 소슬렌 남작은 불만에 가득 찬 표정으로 다리를 꼰 채 앉아 있었다.
‘아니, 하필 일요일 당직이 나라고? 많고 많은 하급 관리 중에 왜 나인 거야.’
그래도 곧 있으면 퇴근 시간이기에 불편한 심기를 억누르며 습관적으로 발을 까딱거렸다.
그러나 그런 그의 바람과는 달리 누군가가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저어, 소슬렌 각하.”
“왜? 무슨 일인데?”
“크롬웰 백작 각하께서 용무가 있어 방문하셨습니다.”
백작?
소슬렌 남작은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바로 하고 말했다.
“드, 들어오시라고 하여라.”
근데 크롬웰? 크롬웰이 어디 가문이었지?
생소한 가문의 이름 때문에 조금 머리를 굴렸다.
그사이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한 크롬웰 백작이 들어왔다.
‘뭐야? 애잖아?’
그런 소슬렌 남작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에 들어온 크롬웰 백작은 멀뚱히 남작을 쳐다보았다.
“아, 여기 앉으시죠.”
남작의 안내에 자리에 앉은 크롬웰 백작은 곧바로 용건을 말했다.
“소슬렌 남작?”
“예. 각하.”
“내가 매입하고 싶은 저택이 있는데 그 저택이 황실소속이라 매입이 불가능하더군. 이 저택을 매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나?”
“저택이 어디에 있는 무엇이지요?”
“웰튼 영지에 있는 사과나무 저택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슬렌 남작은 태블릿을 꺼내 크롬웰 백작이 말한 저택을 검색했다.
쭈욱 훑어본 그는 이내 잠금이 되어 있는 저택을 발견했다.
‘잠금이라고? 왜지?’
겪어 본 적 없는 상황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매뉴얼대로 행동했다.
“저어, 각하. 죄송하지만 이 저택은 매입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째서지?”
“비매품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알아서 포기하고 가겠지?
소슬렌 남작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골머리를 앓을 수도 있었던 상황을 현명하게 대처한 것만 같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그런 남작의 생각과는 다르게 크롬웰 백작은 품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남작에게 건넸다.
“내가 지금 당장 줄 수 있는 건 이런 것밖에 없는데 어찌 안 되려나?”
“아이고. 각하. 저희는 이런 뇌물을 받으면 안 됩…….”
남작의 말은 이내 물건을 확인한 순간 줄어들었다.
잘못 본 건가 싶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침이 넘어갔다.
“가, 각하. 혹시 이건……?”
“에버라스트 포션일세. 이건 절대 뇌물이 아니고 일요일에도 일하느라 지쳤을 그대에게 내가 주는 선물이니 부디 받아 주길 바라네.”
에버라스트 포션?
돈이 있어도 재고가 없어서 못 구한다는 꿈의 포션!
그리고 포션을 보는 남작의 머릿속으로 번갯불이 튀었다.
크롬웰 백작? 설마 아드리아스 크롬웰?
에버라스트 포션의 발명자!
남작은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포션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드리아스는 그가 포션을 받자마자 얼굴을 내밀며 물었다.
“이 저택, 어떻게 안 되겠나?”
“아!”
그제야 본인이 무슨 행동을 한지 알아차린 남작은 울상을 지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포션을 거절하려 손을 뻗었지만 노란 액체가 담긴 포션은 소리 없이 자신을 유혹했다.
‘요즘 베크만 각하께서 애타게 찾는다고 하셨지. 이걸 진상할 수 있다면…….’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 세습 귀족이 될 길이 열릴 수도 있을 터였다.
소슬렌 남작의 망설이는 모습을 살핀 아드리아스는 품에 손을 집어넣어 또 한 개의 포션을 꺼냈다.
“나도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그대가 너무 고생하는 것처럼 보이는군. 이걸 먹고 힘 좀 내게.”
“가, 각하! 저는 이런 걸 받으면 안 되는…….”
“아! 하나가 더 있었군! 자, 여기 받게나.”
……거절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포션이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포션을 받은 소슬렌 남작은 이내 충성심 어린 눈빛으로 아드리아스를 보고 태블릿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무슨 저택 하나에 잠금 장치가 이렇게 많아?’
살짝 겁이 나기 시작했지만 찬란한 미래를 위해 두 눈 질끈 감기로 했다.
하지만 점차 자신의 선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긴 남작은 아드리아스를 향해 말했다.
“아무래도 상부에 보고를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문제는 없는 건가?”
“예. 저보다 한 단계 높은 직급의 권한이 필요해서 잠시 도움을 구하려는 거라 괜찮습니다.”
“알겠다. 기다리지.”
소슬렌 남작은 곧바로 마법 통신기를 들어 상사인 우들렌 자작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일에 전화를 건다는 게 실례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포션 3병은 잔소리를 듣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만들었다.
―하아, 여보시오. 소슬렌 경.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알고 있나?
“죄송합니다. 지금 사무실에 크롬웰 각하가 매물을 구입하러 오셨는데 아무래도 잠금이 걸려있어서…….”
―잠금? 자네가 해결하지 못하는 건가? 애초에 잠금이 걸려 있으면 정중히 거절하면 되지 않은가?
“그것이…….”
남작은 고민 끝에 살며시 언질을 주기로 했다.
거기다 더해 조금 아깝기는 해도 포션 하나를 양보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리된 것입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라. 어흠,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알았다. 대신 내 몫으로 한 병은 반드시 얻어 놔야 한다.
“물론입니다. 각하.”
통화를 마친 남작은 아드리아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잘 해결되었다고 전해 주었다.
“아! 됐습니다. 잠금이 다 해제가 되었는데…….”
남작은 태블릿의 적힌 내용을 아무리 살펴봐도 이상한 점이 없음을 느꼈다.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잠금을 해 놓은 거지?
그때 아드리아스가 물었다.
“잠금이 되어 있었다고?”
“예? 아, 별거 아닙니다. 가끔 뭐, 저주받은 매물이나 사연이 있는 매물은 잠금이 되거든요. 별일 없을 겁니다.”
그게 별일이 없는 건가?
본인이 말해 놓고도 어이가 없었지만 다행히 상대는 조용했다.
오히려 생각에 잠긴 듯 가만히 허공을 응시했다.
“저, 크롬웰 각하?”
“음?”
“일단은 주변 영지의 시세와 비교해서 매입가를 책정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가격을 확인한 아드리아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바로 구입하도록 하지.”
“예. 아! 참고로 매입가와 별도로 세금과 관리비 그리고 정리 비용이 듭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흠. 내 정성이 부족했나? 충분히 정성을 보였다고 생각했는데…….”
“하하! 사실 관리비나 정리 비용이 말이 됩니까? 구입해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죠.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고맙네.”
그렇게 그 자리에서 바로 대금을 지불한 아드리아스가 집문서를 받고 떠나자 소슬렌 남작은 한숨을 토해 냈다.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뭔가 불법을 저지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찜찜했다.
‘아니지. 이게 왜 불법이야. 본인이 하자가 있는 저택을 사겠다는 걸 제값에 판 건데 오히려 잘한 일이지.’
그러고 보니 도대체 잠금은 왜 이렇게 많이 되어 있던 거야.
남작은 투덜거리며 다시 한 번 이상이 없는지 아드리아스가 구입한 저택을 살폈다.
* * *
‘잠금이라…….’
그 의도가 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래도 팔지 않으려 한 느낌이 강했다.
누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되찾았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생각보다 싸게 살 수 있었어.’
대출까지 생각했었지만 그럴 걱정을 덜었다.
돌아가는 길에 다시 한 번 에이미가 일하는 가게에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가게에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저번과 다른 직원이 맞이해 주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에이미 크롬웰 있습니까?”
“예? 무슨 일로 오셨죠?”
“에이미의 친오빠입니다. 혹시 오늘도 일을 하나 해서.”
“에이미요? 방금 막 퇴근했는데?”
나는 알려 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열차 역으로 뛰어갔다.
역에 도착하자 저녁이 되어 퇴근을 위해 열차를 이용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중에서 에이미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에이미!”
조금 쪽팔리더라도 가장 원초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에이미 크롬웰!”
내가 역에서 소리를 치기 시작하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을 하며 나를 피해 지나갔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었다.
나는 에이미를 찾기 위해 다시 한 번 이름을 외쳤다.
“에이미 크롬웰!”
“뭐 하는 거야!”
뒤쪽에서 들려오는 잔뜩 뿔이 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도깨비와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노려보는 에이미가 있었다.
“에이미.”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서 창피하게!”
나는 그저 기쁜 마음에 에이미가 화를 내든 말든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이미. 이제 일은 그만해도 돼.”
“갑자기 와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뭐 잘못 먹었어?”
“이거.”
나는 집문서를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그것보다 반지는?”
그녀는 물어보면서도 시선이 내 손을 향해 갔다.
내 손에 끼워진 인장 반지를 본 에이미는 안도하는 눈빛을 보이며 이내 도끼눈을 하고 말했다.
“반지 다시 찾았나 보네. 그렇다고 내 화가 풀릴 줄 알아?”
“에이미. 그거 읽어봐.”
내 말에 그녀는 내가 건네준 집문서를 보았다.
그리고 점차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해 갔다.
“이게, 뭐야? 이게 왜 오빠한테 있어?”
“샀어. 그리고 이제 일은 그만둬도 돼.”
이해를 못 하는 에이미에게 나는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다.
아카데미에서 포션을 만든 일 그리고 그 일로 인해 돈을 벌게 된 일.
“정말이야?”
“어. 이제 다달이 네 카드에도 돈이 들어갈 거야. 내가 그렇게 해 놨어.”
에이미는 잠시 말없이 집문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어. 일단 이건 오빠가 가지고 있어.”
그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다가 감정이 복받쳤는지 떨리는 음색으로 말했다.
“난, 오빠가 해낼 줄 알았어. 오빠는 크롬웰의 가주니까. 그니까 분명 해낼 줄 알았어.”
“그래.”
“나, 이제 조금 쉬어도 되지?”
“어.”
나는 어깨를 떠는 에이미를 감싸며 말했다.
“고생 많았어.”
에이미의 떨림이 전해지며 다시 한 번 다짐을 했다.
수고했어. 에이미. 이제 내가 대신 고생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