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처리 그리고 비비안
배꼽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며 내 예상을 뛰어넘는 속도와 힘이 검으로 전해졌다.
서걱.
마나가 담긴 검은 마치 무를 자르듯 나이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각성.’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다.
니켈이 진화를 마치고 난 이후 매일같이 대련을 한 게 도움이 됐나 보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나이트를 발로 차서 걷어 내고 어깨에 박힌 검을 뽑았다.
그 순간에도 언데드들은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퍼걱.
마지막 남은 한 줌의 마나로 워리어의 정수리를 깨부쉈다.
운 좋게 단전을 뚫은 덕분에 급한 불은 껐지만 각성한 마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워리어까지 처리하자 모두 소진된 단전의 마나는 급격히 힘을 잃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몰려오던 언데드들이 갑자기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다급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사, 살려 줘!”
어느새 파이먼의 목에 검을 들이댄 니켈이 나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블러디 댄은 죽였나.
니켈이 싸웠던 곳으로 짐작되는 장소를 보자 깔끔하게 목이 잘린 댄의 시체와 수급이 보였다.
물론 이길 거라 예상은 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까 대단하네.
난 여전히 한 손에 검을 쥔 채 파이먼에게 다가갔다.
“기분이 어때?”
“허흑. 잘못했다. 제발 살려 줘.”
“반지는 어디 있지?”
“저, 저기에 있다! 집에 있어! 그러니까 제발 살려 줘.”
나는 부들부들 떨며 자신의 잘린 팔을 움켜쥐고 있는 파이먼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를 앞세워 오두막집으로 향했다.
“언데드들은 빨리 역소환 시켜라.”
“알았다.”
근데 아까부터 자꾸 반말이네?
나는 검집으로 그의 복부를 찔렀다.
“우엑. 왜, 왜?”
“네 말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죄, 죄송합니다.”
오두막집으로 들어온 나는 파이먼에게 반지가 있는 위치를 알아냈다.
다행히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용케 가지고 있었네. 팔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 살려 주십시오.”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낀 나는 니켈을 시켜 다시 파이먼을 밖으로 끌고 나왔다.
그렇게 끌고 나온 파이먼 옆에 댄의 시체를 가져왔다.
가져온 김에 댄이 사용하던 아티팩트인 가면도 챙겨 주고.
가면은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해 보였다.
하얀색의 얼굴 전체를 가리는 댄의 가면은 착용자의 외형을 바꾸는 능력을 지녔다.
“아, 아드리아스 님? 사, 살려 주십시오. 제가 당신의 종복이 되겠습니다. 발을 핥으라면 핥을 것이고 개처럼 짖으라면 짖겠습니다. 부디 한 번만 선처를…….”
푸욱!
“커헉.”
나는 시체와 함께 가지고 온 댄의 검으로 파이먼의 심장을 찔렀다.
심장을 관통당한 파이먼은 억울한 표정으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꺾었다.
‘괜한 불안 요소를 살려 둘 필요는 없지.’
불안 요소가 아니었어도 죽였을 거다.
먼저 공격한 상대를 아무 이유 없이 용서할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거든.
나는 그가 확실하게 죽었는지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니켈. 밖에 경비원 좀 처리해.”
니켈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을 가리킨 뒤 목을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언제 죽인 거야?
명령도 내린 적 없는데.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니켈이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묘지 내부까지 들어온 경비원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하긴 그 난리가 났는데 확인하러 왔을 법도 하다.
“저 시체도 가져와.”
니켈이 시체를 가져오는 동안 포션을 복용했다.
자상으로 너덜너덜해진 왼쪽 어깨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충분히 해볼 만했고, 결국 내가 이겼다.’
덕분에 듀얼코어까지 각성했지.
애초에 이럴 목적으로 온 건 아니었지만.
파이먼이 급발진하는 바람에 일이 잘 풀렸다.
이로써 댄으로 인해 발생하는 대규모 전쟁은 막은 셈이다.
비록 미래가 바뀌더라도 전쟁만은 사양이었다.
‘게임 속에서 전쟁 때문에 죽은 것만 수십 번이다. 전쟁을 막을 수만 있다면 무조건 막아야지.’
니켈이 경비병의 시체를 가져오고 나는 각도와 방향을 생각해서 잘 놔두었다.
그리고 댄의 검으로 경비원의 몸에 자상을 만들었다.
파이먼의 시체에도 똑같이 자상을 남겼다.
스켈레톤 워리어가 사용하던 철퇴를 들어 댄의 한쪽 어깨를 박살 내고 나이트의 검을 댄의 시체 곁에 두었다.
마지막으로 포이즌 좀비를 옆에 두면 끝.
아마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중독될 거다.
‘이걸로 감춰질지 모르겠네.’
그래도 마치 댄과 파이먼이 싸운 것처럼 최대한 조작했다.
들킬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시간은 끌어 주겠지.
* * *
해가 저문 아카데미 기사학부의 연무장은 한산했다.
주말인 탓도 있었지만 애초에 개인 수련실이 있는 이상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인가 한 명의 학생이 꾸준히 그런 연무장을 이용하고 있었다.
“며칠 안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단하네.”
“그러게. 한 달은 지났지?”
“어. 이제 딱 한 달쯤 됐을걸.”
“그런데 쟤는 왜 갑자기 저런데?”
“내가 아냐? 네가 말 걸어 봐.”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도 비비안 벨로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수련에 집중한 탓에 누군가가 구경하고 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휘이이이.
평소보다 3배가량 느린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근육 한 올, 한 올의 움직임을 느끼려 애쓰며 가상의 적과의 대결은 계속되었다.
상상 속의 상대도, 그를 상대하는 자신도 평소보다 수배는 느린 속도로 공방을 펼쳤다.
동작이 느린 만큼 상대의 공격이나 방어는 모두 읽혔다.
반대로 자신의 공격과 방어도 모두 꿰뚫렸다.
덕분에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수 싸움이 일어나며 그녀의 손에 들린 검은 다양한 변화를 일으켜 상대를 현혹시켰다.
‘부족해.’
더! 더!
자신의 재능은 빛난다.
고작 이 정도가 끝이 아니다.
그녀의 손목과 손가락 끝이 한계에 가까운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자 신기에 이른 그녀의 검은 마치 그녀의 손에서 벗어난 것처럼 춤을 췄다.
“나왔다!”
“와, 진짜 미쳤다.”
그것은 귀신의 춤이었다.
지나다니며 그 모습을 본 학생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그녀의 검술을 ‘귀무(鬼舞)’라 칭했다.
“우리도 쟤처럼 매일 저렇게 수련하면 될까?”
“일주일도 못 버틴다에 내 전 재산 건다.”
“하긴.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수련만 하는 건 너무했지.”
그때 다른 곳에서 나타난 기사학부 학생들이 지나가며 비비안을 발견했다.
“이야. 대단하다, 대단해.”
“올해 토너먼트 1등은 비비안 아니야?”
“진짜 그럴 수도 있겠다. 쟤는 갑자기 뭐 처먹고 저렇게 각성했냐?”
그렇게 한 마디씩 감상을 늘어놓던 이들은 미리 와서 구경하고 있던 학생들을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구경하냐?”
“어. 이제 가려고.”
“그래? 아, 비비안 보니까 생각난 건데 저번에 비비안이랑 같은 조 돼서 흑마법사 잡은 마법학부 학생, 그 뭐더라?”
“나도 이름 몰라. 걔가 왜?”
“아니, 알븐 스트리트에 있는 민간 치료소에 가더라고. 그냥 비비안 보니까 갑자기 생각났네.”
그때 바람이 한차례 일더니 누군가가 불쑥 끼어들었다.
녹빛의 머리카락이 치렁거렸다.
“아드리아스 크롬웰이 치료소?”
어느새 다가온 비비안의 움직임에 놀란 학생들은 깜짝 놀라며 흩어졌다.
그리고 말을 꺼낸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어. 나도 정확히는 모르는데 어디가 다친 모양이더라고.”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볼로릭 영지에서 겪은 일 이후, 아드리아스 크롬웰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자신의 꿈속에서 나온 요정님과 같은 목소리.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분명 요정님이라면 자신에게 관심을 가졌을 터.
‘그냥 우연히 목소리가 같은 건가?’
우연이라고 치기에는 하필 같은 장소에 있었던 게 마음에 걸렸다.
그래서 하루는 수업이 전부 끝난 후 그를 찾아 나섰다.
분명……분명 그가 요정님이 맞다면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리가 없는데?
그러나 아드리아스 크롬웰은 철저히 그녀를 무시했다.
오히려 왜 자신을 따라다니는지 모르는 눈치였지.
그래서 그녀도 그만 그를 놓아주고 수련에 집중했다.
요정님이 말했던 빛나는 재능을 위해.
“……?”
생각을 멈춘 비비안은 어느새 열차에 탑승한 자신을 알 수 있었다.
‘내가 언제 탄 거지?’
그리고 그녀의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알븐 스트리트에서 내려 치료소로 향하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에 이끌린 듯 자연스럽게 치료소에 들어간 그녀는 직원을 향해 물었다.
“아드리아스, 크롬웰.”
“예? 아, 아드리아스 환자분이라면 저기 있는 외상 치료실에 있어요.”
그녀는 직원에 말을 따라 외상 치료실로 향했다.
그리고 치료실의 문 앞에 도착한 그녀는 자신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수련, 해야 되는데…….’
그때, 문이 벌컥 열렸다.
“비비안?”
요정님의 목소리였다.
* * *
어깨의 상처는 내가 무리해서 움직인 탓에 재생 포션만으로는 완치가 되지 않았다.
나는 열차를 타고 아카데미에 복귀하자마자 곧바로 알븐 스트리트에 있는 치료소로 향했다.
평일이었으면 학부 내에 있는 치료소를 방문했겠지만 주말이라 문을 닫은 상태였다.
“어?”
알븐 스트리트에서 내리자 어느 기사학부 학생이 나를 보며 아는 척을 했다.
누구지? 모르는 얼굴인데?
나는 녀석을 무시한 채 치료소로 갔다.
다행히 손님이 별로 없는 덕분에 곧바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에잉, 쯧쯧. 어쩌다 이렇게 됐어?”
“어쩌다 그렇게 됐습니다.”
내 상처를 본 대머리의 치료사가 혀를 찼다.
나는 고통을 견디며 마취도 없이 그의 수술을 받았다.
“자네, 인적사항에 보니까 마법학부 학생이던데.”
“예.”
“몸도 그렇고 신음 소리 하나 안 내는 것도 그렇고, 꼭 기사학부 학생 같구먼.”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당연히 칭찬이지! 요즘 마법사라는 것들은 허약해서 어디다 쓸 수가 없어! 전쟁이라도 나면 어찌 될지 매일이 걱정이야.”
그 전쟁.
제가 막았습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그럼요. 그럼요.”
그렇게 30분에 가까운 수술이 끝나자 그가 말했다.
“그래도 꽤 아팠을 것인데 잘 견뎠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팔을 사용하는 데 조심하고 요금은 밖에서 결제하게.”
“예. 감사합니다.”
나는 감사의 말을 전하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아니, 나가려 했다.
문을 열자 바로 앞에 누군가의 정수리가 보였다.
“비비안?”
의외의 인물의 등장에 어리둥절해하며 이름을 불렀다.
그녀는 이름이 불리자 나를 올려다보더니 갑자기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크헉.”
예상치 못한 공격에 폐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비비안을 보자, 그녀는 나를 끌어안은 채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허허. 좋을 때구먼.”
치료사의 말에 차마 반박도 못 했다.
나는 머릿속에서 아른거리는 어린 시절의 비비안 때문에 차마 밀쳐 내지도 못하고 그녀를 한동안 놔두었다.
* * *
“미안.”
시간이 조금 흐르자 비비안은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가 놀라며 일어섰다.
허리를 꾸벅 숙이며 인사하는 비비안에게 그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왜 그랬는지는 둘째 치고 여기에 온 이유가 궁금했다.
“근데 갑자기 웬일이에요?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요?”
“들었어. 다른 애들한테.”
그녀의 말에 열차에서 내릴 때 마주쳤던 기사학부 학생 하나가 떠올랐다.
그 녀석이 말해 줬구나.
“그래서. 절 보러 온 거예요?”
내 물음에 비비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도 몰라.”
“비비안이 모르면 누가 압니까.”
비비안은 동료로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캐릭터를 잘 모르겠다.
애초에 빌런이라 게임 속에서는 토벌 대상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얼떨결에 그녀와 함께 열차를 타고 복귀했다.
“이번 역은 리오스 기숙사입니다…….”
기사학부의 기숙사에 먼저 도착한 열차로 인해 비비안이 먼저 내리게 되었다.
오는 동안 서로 한 마디도 없던 우리는 서로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세요.”
“응.”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작게 흔들었다.
그렇게 그녀가 내리고 열차가 출발하자 시야에서 점차 사라졌다.
‘나태의 결계 때문이겠지?’
아마 요정의 목소리와 같으니 의심하고 있는 거겠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밝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어쩌면 게임과는 달리 빌런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면 이득이고. 원래라면 일으켰을 사건도 언제 일어날지 알고 있으니까 한번 살펴봐야지.’
그때까지 내 정체가 들키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전제가 붙지만 나는 자신이 있었다.
이미 내 행동들로 인해 미래가 많이 바뀌었을 터.
게다가 게임 속 아드리아스와 달리 나는 카론의 말만 듣는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부정적인 미래는 최대한 바꾼다. 그로 인해 긍정적인 미래도 같이 없어진다고 해도 상관없어. 내가 원하는 건 살아남는 거지 미래의 정보를 이용해 한탕 하려는 게 아니니까.’
그리고 이왕이면 가족과 같이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작지만 큰 소망을 꿈꾸며 열차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